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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파워인터뷰 게재 일자 : 2018년 06월 15일(金)
“病名 같아도 환자는 달라… 치료기술 개발하는 의사 과학자 양성 시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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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경발 전 보훈병원장이 지난 12일 서울 중구 신당동 자택 인근 공원에서 우리 의학계가 기술만 가진 의사가 아닌 탐구하고 연구하고 실험해 의학 기술을 개발하는 의사 과학자를 양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동훈 기자 dhk@

의료계 산증인 허경발 박사

환자 간의 미세한 차이 관찰해
문제 발견하고 해결법 찾아야

기술만 가지고 의사하지 말고
깊은 同情 가지고 최선 다해야

박정희 前대통령 형수·JP 장모
위암 치료했더니 18년 더 살아
의사로 현대사 속 무수한 인연

그래도 가장 기억 남는 환자는
담석 수술만 3차례 한 일반인
“배에 칼질 말고 지퍼를 달라”


의과대학을 다니던 22세의 한 청년은 1950년 6월 6·25전쟁이 터지자 군의관으로 입대했다. 정식 의사가 아니었기에 험한 일은 계급이 낮은 그의 몫이었다. 말이 중환자실이었지 천막이나 다름없는 진료실에서 다리가 잘린 군인, 총알이 복부를 관통한 군인 등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심한 부상군인을 처음 치료하는 것이 그의 역할이었다. 이렇게 대한민국 외과 의사의 산증인으로 불리는 전 보훈병원장 허경발(90) 박사의 본격적인 의사 인생은 지금으로부터 68년 전 전쟁터에서 시작됐다. 수없이 많은 죽음을 목격했지만 그는 ‘희망’을 얘기했다. “아무리 절망적인 질병에 걸린 환자라도 끝까지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하며 아무리 가능성 없어 보이는 환자라도 치료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는 “의사생활을 하면서 실제 절망적이라고 생각했던 환자가 놀랍게 치유되고 소생하는 것을 수없이 목격했다”면서 “세상이 불만과 실망으로 가득 찼어도 희망을 간직하고 살아간다면 새 삶을 꿈꿀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젊은이에게 ‘판도라 상자’에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것은 희망이란 말을 해주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은 절망에도 좌절하지 않는 도전 정신”이라며 “의학계도 의사가 아니라 탐구하고 연구하고 실험하는 의사 과학자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의 70년 의사생활은 우리 현대사 그 자체였다. 일제강점기와 6·25전쟁 등 굴곡의 현대사가 없었다면 그는 의사의 길이 아닌 다른 길을 걸었을지도 모른다. 의대를 선택하게 된 계기, 포화 속에 만난 미군을 통해 미국 유명병원으로 가서 일하게 된 사연, 4·19혁명 시위로 다친 학생들을 치료한 일, 박정희 전 대통령 가족에 대한 치료, 김종필(JP) 전 국무총리와의 인연으로 보건사회부 장관직을 제안받은 이야기, 김대중(DJ) 전 대통령이 직접 전달해 준 노벨상 수상기념품, 박목월 시인, 이당(以堂) 김은호 화가, 평보(平步) 서희환 서예가, 언론계 고위인사들과의 에피소드 등 파란만장한 그의 의사 인생은 우리 현대사와 곳곳에서 엮여 있다.

지난 12일 서울 중구 신당동 자택에서 만난 허 박사는 90세라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역사의 현장에 서 있는 것처럼 당시 시대 상황을 자세히 기억했다. 인터뷰 동안 허 박사를 보면서 정말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사라는 직업을 선택하게 된 동기가 있습니까.

“1945년 3월에 중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중학교는 고교과정을 합쳐 5년제였는데 일제강점기 말년에 일본이 우리나라 젊은이들을 군대로 보내려고 4년 만에 졸업시켰어요. 대학생들은 병역을 면제해줬는데 그 제도를 없애고 의과대학생만 면제해줬습니다. 그때 일본 군대에 안 가려고 의대를 간 거죠.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에 합격했습니다. 그때는 아사히(旭) 의학전문학교라고 했습니다. 일본군에 안 끌려가려고 의사의 길을 걷게 됐습니다. 1학년 여름방학에 서울로 올라오는 기차 안에서 광복 소식을 들었어요. 아사히 의학전문학교가 세브란스로 이름이 돌아오고 세브란스 의대가 됐습니다. 1945년 세브란스에 입학한 30명은 예과로 내려가 2년 공부하고 세브란스 의과대학에 진학해 공부했습니다.”

―6·25전쟁에도 참전하셨죠.

“의과대학 4학년 때 6·25전쟁이 터졌습니다. 정식 의사는 중위 계급을 주는데 당시 전 4학년이라 군의관으로 소위 계급을 받았습니다. 3학년생들은 위생장교 소위로 임관했어요. 그래서 군대에 갔는데 부상자들이 수없이 나오고 의사는 외과 의사밖에 없고 거기에 전 학생이기 때문에 제일 밑바닥에서 험한 일 하고 험한 환자들을 주로 맡아 치료하면서 비참한 일을 많이 봤습니다. 처음엔 대구 제1육군병원에 갔습니다. 거기서 육군병원 근무를 의과대학 4학년 과정으로 본다는 정부의 특별 배려가 있었고 그때부터 의사 국가고시가 시행됐습니다. 합격했고 정식 의사가 돼 보병 제1사단에 배치됐습니다. 1사단은 경기 문산 서부전선에 있었죠. 의과대학 졸업 전에 벌써 임상경험도 많이 했고 험한 꼴도 많이 봤습니다. 1사단이 미 1군단 지휘하에 있어서 미 1군단 군의관들과 친하게 지낼 수 있었습니다. 가끔 미군 야전병원에 가서 식사도 하면서 군의관들과 친해졌어요. 미국 고위 군의관들은 여기 근무가 끝나면 대구에 내려가서 한국 의무중대 의무 참모단을 했는데 거기서 저를 잘 봐준 거죠. 제가 미국 뉴욕 벨뷰(Bellevue)병원에 가게 된 동기도 그들이 주선해 준 덕이에요.”

허 박사는 휴전 후인 1954년 미국으로 유학을 간다. 부산항에서 AKF(American Korean Foundation)가 주선한 화물선을 타고 2주일 이상 걸리는 미국으로 떠났다. 미국에서 허 박사는 뉴욕대 의대 소속의 뉴욕시립병원인 벨뷰병원에서 근무하게 된다. 선진 의술을 배우는 기회를 잡은 것이다.

―미국 생활은 어떠했습니까.

“1954년에 갔다가 1958년까지 있었습니다. 근무한 병원이 시립벨뷰병원이기 때문에 모든 환자의 진료비는 무료였습니다. 특수한 병원이었던 겁니다. 운영을 뉴욕시에서 하고 제 월급도 뉴욕시에서 줬지요. 의료에 대한 지시는 뉴욕대에서 받았습니다. 병상이 3000베드나 되는 엄청나게 큰 병원이었습니다. 침실과 식당, 수술실, 병실만 오가는 생활을 몇 달 동안 했습니다. 무료 병원이었기 때문에 환자가 많았는데 그 점이 레지던트 수련엔 최상의 병원이었던 거죠. 대신 미국 병원은 의사 훈련이 철저합니다. 제 가방에 소변검사 시약하고 피검사 시약 등 진단·진찰에 필요한 시약들을 다 넣어서 다녔습니다. 오후 5시가 지나면 검사실에서 환자 검사를 안 해주니 급한 환자는 의사가 다 검사하고 방사선 사진도 찍어서 판독해 환자에게 말을 해줘야지 그렇지 않으면 ‘얼차려’가 가해집니다. 한국 병원에선 그런 과정이 없었는데 정말 참혹하게 훈련받았죠.(웃음) 순천향대병원 설립자인 서석조 박사를 거기서 만났습니다. 벨뷰병원엔 미국 4개 의과대학 출신 교수들이 나와요. 제1 퍼스트디비전은 컬럼비아대, 제2는 코넬대, 제3은 뉴욕대, 제4는 뉴욕대 포닥(박사후연구원) 교수들이 나왔습니다. 이 교수들은 수술을 안 하고 레지던트 지도만 하는 거예요. 일의 한계를 구분 짓는 건 명확해서 당신 일은 당신 일이니 잘하라며 도와주진 않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공부가 잘됐던 것 같아요.”

―‘병에도 멜로디가 있다’는 것을 미국에서 배우셨다고요.

“1954년 벨뷰병원에 근무한 지 얼마 안 된 때였습니다. 미국 외과계의 최고 유명교수인 멀홀랜드 교수가 강의한다는 거예요. 학생 15명을 앉혀놓고 강의하는데 손자와 할아버지가 농담하는 것 같았습니다. 거기서 이 교수가 했던 말이 아직도 잊히지가 않는데 ‘음악감상을 즐기는 사람이 있지요. 음악이 흘러나올 때 첫 소절만 듣고도 무슨 곡이라는 것을 알게 되듯이 병에도 멜로디가 있습니다. 환자가 걸어 들어오면 멜로디를 적용해서 반 이상 진단해야 합니다’라고 하더군요. 아주 감탄을 했죠. 한국에 와 연세대 의대에서 똑같은 내용으로 강의하니 ‘이 사람이 미국에 가서 한방 공부하고 왔냐’고 힐난 받았어요. 하지만 지금도 병에는 가락(멜로디)이 있다고 생각해요. 의사가 그 가락을 알면 환자가 걸어 들어올 때 ‘이 사람이 어디가 아파서 왔구나’ 하고 딱 알 수가 있어요.”

허 박사는 1958년 귀국해 10년 동안 연세대 의대에서 외과 교수로 일했다. 이후에는 고려병원(현 강북삼성병원), 한양대 의대, 순천향대병원 등을 거친 뒤 한국보건산업진흥원 이사장, 보훈병원 원장 등으로 45년 이상 활동했다.

―지난 4월에 낸 책 ‘배에 지퍼 다는 연구나 하시오’의 추천사를 JP가 썼던데요. 의사로 활동하면서 유명인들과 많은 교류를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1974년 순천향대병원이 생긴 지 얼마 안 돼서 할머니 한 분이 위암으로 특실에 입원한 적이 있어요. 그런데 그 사람이 입원하자 화환이 들어오기 시작하는데 복도가 화환으로 꽉 찼어요. 특실엔 할머니가 있고 특실 건너편 방에는 가족들이 머물면서 심부름하고 그 옆방엔 경호원들이 또 있어요. 인턴들이 이 광경을 보고 기가 막혀 하더라고요. 그런데 이 할머니 사위가 국무총리고 시동생이 박정희 대통령이라는 거예요. JP의 장모였죠. 위암 수술을 한 뒤 치료도 잘 받았습니다. 그 후 그 할머니가 18년을 더 살았어요. 이런 인연으로 JP와 제 관계가 환자 보호자와 의사가 됐죠. 이번에 책을 낼 때도 JP에게 추천사를 받았는데 고령이라 몸이 좀 안 좋아 보이긴 하더군요. 출간되고 나서 직접 가져다 드렸습니다. 오랜 인연이죠.”

JP는 허 박사가 쓴 책 추천사에서 ‘청하(허 박사의 호)는 서석조 박사가 한남동에 새 병원을 발족할 때 동참하였다. 그때 순천(順天)의 정신으로 의료사업이 이루어지길 원하는 뜻에서 내가 순천향병원이라고 작명을 해주기도 했다. 1988년 보사부 장관직을 추천했을 때 자신의 천직을 다하겠다며 그 자리를 사양한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고 회고했다.

▲  허경발 전 보훈병원장이 지난 12일 서울 중구 신당동 자택에서 2000년 김대중 전 대통령이 직접 선물한 노벨상 수상 기념품을 들어 보이고 있다. 김동훈 기자 dhk@

―다른 분들과 맺은 인연도 많지 않나요.

“1970년대 초 고려병원에 근무할 때죠. 유명 화가인 이당 김은호 화백의 딸이 황달에 걸려 담석이 있다고 수술해 달라고 왔어요. 진료를 해보니 담석이 아니고 회충이 거꾸로 들어가서 담도를 막고 있었지요. 그래서 수술 안 하고 고치겠다고 다짐을 하고 회충약을 먹였더니 회충들이 싹 배출돼 깨끗이 낫고 퇴원했습니다. 김 화백이 가족 관계를 묻길래 ‘집사람과 아들 둘이 있다’고 했는데 두 달 후에 그림을 가지고 왔어요. 그러면서 ‘화창한 봄날에 복숭아꽃이 만발하고 꿀벌이 날아드는 풍경이네. 참새 세 마리가 복숭아 꽃 위에 앉아 있고 한 마리는 벌레를 잡으려 날고 있어. 이 그림의 안료는 보통 안료가 아닐세. 예전에 어영(御影·임금님의 초상화)을 그리고 남아 있던 것을 특별히 사용했으니 100년이 가도 변색이 없을 거야. 잘 보관하시게나’라고 말하더군요. 고려병원을 세운 이병철 삼성 회장이 와서 김 화백의 그림을 보고 ‘어떻게 김 화백의 그림을 얻었냐’며 깜짝 놀랐습니다. 잘 보관하라고 하더군요. 이 회장과도 가까이 지냈습니다. 김 총리와도 그랬고 제가 그분들과 접촉하게 된 건 병 때문이지만 그다음엔 서로 믿는 사이가 됐습니다.”

이야기는 계속됐다.

“청록파 박목월 시인과도 인연이 있어요. 1960년대 박 시인의 부인이 세브란스병원에서 근무하던 나에게 갑상선 수술을 받았지요. 부인이 많이 걱정했는데 제가 수술을 한 거죠. 2007년 박 시인의 아들인 박동규 서울대 명예교수가 발간한 책 ‘아버지와 아들’에 당시 상황을 표현하기도 했죠. 수술하고 난 얼마 뒤 박 시인으로부터 한국 현대 동양화단의 대표적인 화가이자 서울대 미대 교수인 남정(藍丁) 박노수 화백의 그림 ‘청노루’를 선물 받았지요. 박 시인의 대표 시를 그림으로 표현한 문화계 거목 두 분의 명작이 담긴 참으로 귀하고 감사한 선물이었습니다.”

―언론계 인사들과도 교류가 많으셨다고요.

“‘맥주가 약’이라는 유명한 말을 한 환자는 모 신문사 고위인사입니다. 1970년대 초 이분이 친구들과 함께 있다 심한 통증을 느껴 응급수술을 해야겠다면서 고려병원에 왔습니다. 요로결석이 원인이었습니다. 다른 검사를 할 건 없었고 방사선을 찍었더니 하얀 돌이 보였어요. 물을 많이 먹으면 내려갈 수 있는 거였죠. 마침 여름이어서 수박이나 냉수가 어떠냐고 권하니까 ‘냉’자가 들어가면 냉맥주가 어떠냐고 했습니다. 이분이 평소 약주를 많이 먹어서 부인한테 싫은 이야기를 많이 들은 것 같아 보였습니다. 그런데 맥주가 약이라면서 맥주 몇 박스를 시켜다가 파티를 하는 거예요. 저한테도 맥주를 권하더군요. 그래서 병원에서는 술을 못 먹는다고 거절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맥주를 먹는 거니 양해하라고 하더라고요. 이분 병은 다른 치료는 하나도 안 하고 맥주만 가지고 치료했습니다.”

―육영수 여사 가족도 허 박사님의 진료를 받았습니까.

“육영수 여사 바로 위 언니를 제가 치료했습니다. 이 분의 사위인 장덕진 전 경제기획원 장관도 제 환자였지요. BCG(결핵예방백신)를 가장 먼저 쓴 환자가 장 전 장관의 장모예요. BCG가 그때만 해도 결핵예방 주사약이었는데 그걸 어떻게 암 환자에게 쓰느냐고 신문에 나오는 바람에 제가 욕을 많이 먹었습니다. 1971년 고려병원으로 내원한 장 전 장관 장모의 암은 암 가운데도 증세가 나쁜 전이성 흑색종이라는 악성 암이었어요. 그런데 1년 전에 담석 수술을 했거든요. 1년 후에 담석 수술 부위가 아프다고 해서 다시 왔고 검사했더니 허리뼈가 녹아 있었습니다. 암이 생겨서 뼈를 녹인 것입니다. 그 상황을 장 전 장관과 또 다른 사위인 홍모 전 은행장에게 다 설명해서 이해시켰는데 주위에 이해를 못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허 박사는 “왜 멀쩡한 사람을 시한부 인생으로 만드느냐는 압력도 들어왔다”며 그래서 꾀를 하나 냈다.

“제가 이 환자를 데리고 있다간 야단이 날 것 같아서 미국 뉴욕대학에 전화했습니다. 다음 날 사진을 찍어보니 머리까지 다 퍼져 있었죠. 제가 큰 변을 당할 것 같아서 미국에 보낼 준비를 했습니다. 마침 홍 전 행장이 장모를 모시고 가겠다고 해서 소견을 정확히 적고 사진도 찍어 같이 보냈어요. 당시 뉴욕대 선배 의사들이 환자 관련 회의를 해서 진단도 틀림없고 3~4개월밖에 못 사는데 미국에서 BCG를 가지고 치료하니 효과가 있는데 쓰면 어떻겠냐고 권유했습니다. BCG가 사람 몸에 면역이 있는지를 검사하는 시약을 줄 테니 가지고 가서 검사한 후 환자 몸에 면역이 있으면 BCG를 쓰라는 의견과 함께 시약이 한국으로 왔습니다. 그래서 환자에게 주사하니까 아픈 게 없어지고 그 부인이 1년 반에서 2년을 더 살았습니다. 원래대로였으면 3~4개월밖에 못 사는 것이었는데 그 정도 산 것입니다. 육 여사를 잘 치료해 줬다고 육 여사 어머니이신 이경령 여사가 절에서 구해온 염주나무를 주시기도 했죠. 4그루를 구해 3그루는 청와대에 주고 1그루를 저에게 주셨습니다.”

하지만 허 박사가 사용한 BCG 요법은 논란도 있었다. 1972년 2월 8일 ‘암에 BCG 새 요법’이라는 신문기사가 나가자 이를 비난하는 신문보도가 많이 나 시끄러웠다. 의료계에서 ‘왜 결핵 예방 주사약인 BCG를 암 환자에게 쓰느냐’는 것이었다. 허 박사는 “1971년 6월부터 BCG를 써보니 암 환자가 좋아졌다. 의사로서 욕심이 생겨 다른 암 환자에게도 써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제가 수술했다가 재발한 환자들을 검사해서 포지티브 반응이 나오는 사람에게 BCG를 썼다. 그랬더니 통증이 줄어들었다. 충북 청주 개인 병원에 있던 황달 환자한테 BCG를 썼더니 황달과 통증이 다 없어졌다고 했다. 그러니 의사로서 흥분을 안 할 수가 없었다. 새로운 방법이고 효과가 있었다”고 말했다.

▲  이당 김은호 화백이 딸을 잘 치료해줘서 감사의 뜻으로 선물한 도화봉작도.

―그런데 왜 논란이 됐습니까.

“이 소식을 청와대에서 듣고 신문기자들이 특종을 잡았다면서 취재하고 싶다고 찾아왔는데 거절했어요. 잘못하면 욕먹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때 한 기자가 ‘다른 의사들도 이 사실에 대해 잘 모르고 있어 우리 사회에 계몽할 필요성이 있으니 신문에 내자’고 하더라고요. 응하는 대신 미국의 학설을 인용했고 제가 모든 암에 다 효과가 있다거나 완치된다 등의 사실은 아직 모른다고 쓸 것 등의 조건을 달아 신문에 나왔습니다. 그다음에 보도가 이어지면서 신문에서 오보가 나고 의사들이 나한테 욕을 하기 시작했어요. 그러다 1972년 5월 22일 미국 타임지에서 여성의 유방암 치료에 BCG가 좋다는 내용이 나왔고 그 이후부터 의사들이 책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BCG가 암에 효과를 볼 수 있다는 논문 파일을 하나로 모았습니다. 지금은 면역요법이라는 게 제4의 암 치료법으로 정립돼 있습니다.”

허 박사는 김대중 전 대통령과도 인연을 맺었다. 2000년 10월 13일 대구에서 일을 보고 서울로 상경하는 길에 옆좌석의 청년으로부터 김대중 전 대통령의 노벨상 수상 소식을 전해 들었다. 당시 보훈병원장으로 있었던 그는 노벨평화상 수상 기념 수건을 만들어 전 입원환자에게 나눠줬다. 얼마 뒤 김 전 대통령이 보훈병원을 방문해 수상 메달을 복사해 만든 기념품을 전달해 주었다. 그 기념품은 지금도 허 박사의 서재에 자리 잡고 있다.

―4·19 혁명 때 부상당한 학생들을 치료하셨다고요.

“1960년 4월 19일이 화요일이었을 겁니다. 이날 오전 9시부터 당시 이름만 들어도 아는 자유당 최고위급 정치인의 우측 결장 절제술을 했습니다. 오후 1시쯤 수술을 끝내고 나와보니 딴판의 사태가 벌어져 있었어요. 서울역 앞에서 열리는 학생시위에서 총소리가 들려왔어요. 병원 응급실이 갑자기 바빠졌어요.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 30평 정도 응급실이 부상자로 꽉 차 있었습니다. 응급실과 복도 바닥이 온통 피로 범벅이 돼 있었죠. 연세대 부총장을 지낸 김명선 박사가 응급실을 찾아 ‘세브란스병원 응급실 바닥에 흐른 피는 역사의 증명이 될 것이야. 1907년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되었을 때 서소문에서 항전하던 우리나라 군인들이 이 복도로 후송되어 피 흘리고 신음하여 치료받던 곳이야. 공성이불거(功成而不居·공을 세웠지만 목표로 했던 일을 성취한 뒤에는 그 공을 빌미로 이득을 취하지 아니하고 자리에서 물러난다)라는 말처럼 세브란스인은 치료하고도 응분의 보답을 바라지 않았어’라며 치료를 독려했죠. 후에 보니 이날 오후부터 자정까지 병원에서 치료한 환자가 200명에 달했다고 하더라고요.”

허 박사는 “그래도 가장 기억이 남는 환자는 평범한 일반 환자”라고 회고했다. “‘사람 배에 지퍼 다는 연구나 하시오’라고 독설을 퍼붓던 환자”라고 말했다. 그는 “1961년 남대문 세브란스병원에서 경북 영덕군에 사는 서용수 씨를 진료하고 수술을 했는데, 담석이 담낭과 총수담관까지 가득 차 있어 이를 제거했다”며 “그런데 10일 후 방사선 사진을 찍어보니 다시 담석이 가득 차 있어 깜짝 놀라 환자에게 이를 알리고 다시 수술했다. 하지만 10일 후 방사선 사진을 보니 또 담석이 가득 차 있어 적당한 수술 방법을 몰라 미국 은사인 뉴욕대 멀홀랜드 교수에게 문의했다”고 했다. 그는 “2~3일 뒤 미국에서 편지와 논문이 왔는데, 담석을 소장으로 내보내는 통로를 만드는 수밖에 없다고 알려 왔다. 그래서 이를 환자에게 말하니 ‘나를 무슨 실험동물로 아느냐. 내 배에 칼질할 생각 마시고 담석이 생기면 지퍼를 열어 담석을 제거하고 지퍼를 닫는 사람 배에 지퍼 다는 연구나 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고 말했다. 결국 환자의 어머니를 설득해 3차 수술을 받게 됐고 이후 20년 이상 친한 관계를 이어갔는데 만날 때마다 ‘배에 지퍼 다는 연구는 어떻게 됐냐’고 농담을 했다.

허 박사는 대학병원에서 오랜 교수 생활을 한 의사다. 이 때문에 대한민국 의학계가 나아갈 길에 대해서도 명확하게 주문했다.

―‘의사 과학자(physician-scientist) 양성’이 꼭 필요하다고 강조하시는 이유가 있나요.

“최근 한 신문에 난 신찬수 서울대 의대 학장의 글입니다. ‘많은 환자를 특정 질병에서 해방시키는 의학기술 개발이 의사 과학자들의 몫이다. 모든 의학 연구는 환자를 진료하다가 발견되는 의문점에서 시작하고 같은 병명(病名)이라도 모든 환자가 똑같지는 않다. 의사 과학자들은 환자들 간의 미세한 차이를 깊이 있게 관찰해 문제를 발견하고 연구를 통해 해결 방안을 찾아낸다. 의사 과학자들은 환자 간 미세한 변화를 잘 관찰해야 한다’고 썼어요. 저는 보훈병원에 있으면서도 의사들은 기술만 가지고 의사 하지 말고 환자에 대한 깊은 동정을 가지고 연구를 해 치료해야 한다고 강조하곤 했습니다.”

허 박사는 후배 의사들에게 “의사는 생명을 구하는 참으로 숭고한 직업이지만 올바른 인격과 철학, 사명감을 갖추지 못한 채 사회적인 위상만을 보고 세상에서 인정받는 직업인으로서 의사의 길을 선택한다면 그는 기술자에 지나지 않으며 의사 생활 역시 의미를 찾지 못한다”고 당부했다.

―후배 의사들이 꼭 명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까.

“환자는 병들어 몸이 불편한 사람입니다. 환자는 증상(symptom), 징후(sign), 기능 장해, 조직 손상, 정서 혼란 등이 모여 엉켜 있는 집합체만은 아닙니다. 병든 사람이고 겁에 질려 있고 그러나 희망을 가지고 있으며 위로와 구제를 바라며 도움과 안식처를 찾고 있는 거죠. 이에 의사가 숙달된 기술은 물론 동정심과 이해심을 갖는 것은 당연히 필요한 덕목이죠. 인간미를 지닌 의사에게는 환자가 위화감을 주는 괴물도 아니며 혐오물도 아닙니다. 인간미 없는 염세가는 질병의 진단가가 될 수는 있어도 의사로서 성공할 희망은 없습니다.”

90세의 허 박사에게 가장 궁금한 것은 건강을 어떻게 유지하느냐는 것이었다. 허 박사는 인터뷰 동안 수십 년 전의 일도 정확히 기억해 내며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다리가 불편해 보였지만 90세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건강해 보였다. ‘건강 비결이 있느냐’는 질문에 “규칙적으로 생활하는 것이다. 오후 9시에 잠을 자고 다음 날 오전 4시 반에서 5시 사이에 일어난다. 운동도 많이 한다”고 소개했다.

인터뷰 = 신선종 차장 (전국부) hanuli@munhwa.com
e-mail 신선종 기자 / 전국부 / 차장 신선종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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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news 제이플라, 유튜브 구독자 1천만명…“한국 1인 크..
유튜브 크리에이터 제이플라(본명 김정화·31)의 유튜브 채널 구독자가 1천만 명을 돌파했다.20일 소속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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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3명 사망 ‘형제복지원’ 사건 30여년만에 대법에 ..
‘경찰에 신고못한다’ 약점 악용 술 산뒤 업주에 돈뜯..
아내와 두 딸 살해한 男…장인장모는 사형반대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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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녕, 마흔아홉살의 여우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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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수애 아나운서, 두산家 며느리 된다…박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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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정의 에로틱 시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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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디즘 ‘주인공’ 佛 사드 후작의 집필 향한 광기
[인터넷 유머]
mark돈벌이도 가지가지 mark과학적인 변비 치료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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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umber ‘축포 4방’ 벤투호, 우즈베크 꺾고 6경기 연속..
100억원대 ‘더 매치’ 베팅업체 “상승세 우즈..
“가짜 정신과 의사가 22년간 진료?”…영국 ..
귀국 류현진 “모든 면에 자신 있어서 1년 계..
자택서 숨진 현직 고등법원 판사 사인은 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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