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와 시각>한국당의 위험한 기억상실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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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남석 정치부 차장

우려가 현실이 됐다. 후보들의 메시지부터 지지자들의 행태까지 보는 이의 우려를 자아내 온 자유한국당 2·27 전당대회가 급기야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을 부정하는 역주행에까지 이르렀다. 핵심 지지층의 표심을 잡는 데만 혈안이 된 선명성 경쟁 속에 ‘넘지 말아야 할 선’은 실종됐다. 지난해 6·13 지방선거 참패 후 8개월여 이어온 비상대책위원회 체제를 끝내고 한국당의 부활을 선포하는 장이 돼야 할 전당대회가 ‘컨벤션 효과’는 고사하고 두고두고 당의 전진을 가로막는 후환으로 남을 것이라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린다.

공식 선거운동 개시 전부터 터진 ‘박심(朴心·박근혜 전 대통령의 마음) 논란’과 5·18 광주민주화운동 폄훼 파문도 한국당의 상승세에 찬물을 끼얹었지만, 탄핵 부정은 한국당에 더 큰 부담으로 남을 것으로 보인다. ‘판도라의 상자’가 열렸다는 해석이 결코 과하지 않다. 첫째, 군소후보뿐 아니라 대세론의 주인공인 황교안 전 국무총리가 탄핵 부정 대열에 뛰어들었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가장 유력한 당대표 후보이자 가장 경쟁력 있는 보수 진영 대권주자로 꼽히는 인물이 19일 공개리에 “탄핵이 타당했던 것인지에 동의할 수 없다”고 했다. 나아갈 수도, 물러설 수도 없는 늪 속으로 제 발로 걸어 들어간 격이다. 이제 같은 주장을 되풀이해도 논란, 뒤집어도 논란뿐이다.

둘째, 당권주자들이 탄핵 부정을 입에 올림으로써 보수를 대표한다는 한국당이 헌정 질서를 무시하는 집단으로 비치게 됐다. 나쁜 기억이라 벌써 지워버렸는지 모르겠지만, 박 전 대통령은 촛불 시위대의 위력에 놀라 스스로 물러난 게 아니다. 국회의 탄핵과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이라는 민주적·법적 절차에 따라 파면됐다. 한국당이 이를 부정하면서 문재인 정부의 반헌법적 행태를 비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셋째, 탄핵 부정은 탄핵을 지지한 국민 대다수에게 자기부정을 강요하는 행위다. 당시 발표된 각종 여론조사에서 탄핵 찬성 여론은 80%를 넘나들었다. 이른바 ‘촛불 정부’에 대한 실망이 ‘촛불’의 정당성까지 흔들 수는 없다. 당시 반성하고 거듭나겠다던 한국당의 약속을 기억하는 국민에게 작금의 행태는 오만의 극치로 비칠 수밖에 없다. 넷째, 탄핵 부정은 한국당의 미래도 제약한다. 가뜩이나 당이 친박(친박근혜)·비박(비박근혜)계로 갈린 터에 이제 탄핵이 옳았냐를 놓고 집안싸움을 벌이게 됐다. 19일 이후 당 안팎의 움직임에서 이게 기우가 아님이 확인되고 있다. 바른미래당 등 보수 정치권 통합, 나아가 문재인 정부에 실망한 중도층 규합에도 큰 걸림돌이 생겼다.

2020년 국회의원 총선거, 2022년 대통령선거를 향해야 할 한국당 전당대회에서 철 지난 탄핵 논란이 벌어진 것은 벌써 샴페인에 취한 듯한 한국당 사람들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뭔가를 반드시 이루고야 말겠다는 간절함이 안 보인다. 그렇다 보니 리더십도, 기강도, 비전도, 전략도 없이 근거 없는 자신감과 과격한 구호만 넘쳐난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하다. 훌리건을 연상케 하는 열성 지지자들의 마음을 잡는다고 샴페인이 허락되는 건 아니다. 민심의 흐름에 마주 달리는 역주행의 결말은 이미 2017년 확인됐다. greente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