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여담>21세기 대장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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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회평 논설위원

해인사 팔만대장경이 온전한 형태로 760년 세월을 견딘 힘은 탁월한 기술이다. 8만1258장의 목판에 1500여 종의 경전을 새긴 대장경은 8t 트럭 35대 분량이다. 나무를 바닷물에 3년 담갔다 꺼내 자른 뒤 다시 소금물에 쪄서 그늘에 말리고 옻칠하는 과정을 거쳤다. 지금까지도 새긴 글자가 생생한 비결이다. 목판을 보관한 장경각의 비술은 더 놀랍다. 가야산의 중턱을 택해 계절과 관계없이 적당한 풍속을 유지했다. 바닥은 깊이 판 뒤 숯·소금·횟가루를 모래와 찰흙에 섞어서 다졌다. 적절한 습도 유지 장치다. 건물 앞 벽면엔 아래 창을 위 창보다 훨씬 크게 하고, 뒷면은 반대로 했다. 바람이 들어와 빠져나가도록 고안한 독특한 구조다. 거미줄이 없고, 새도 지붕 위에 앉지 않는다고 한다. 대장경·장경각 각각 국보이면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이다.

네이버가 최근 공개한 데이터센터 ‘각’은 장경각에서 딴 이름이다. 이곳 서버는 국립중앙도서관이 소장한 책의 2만5000배 분량을 저장할 수 있고, 초당 7400개의 검색어를 축적한다. 강원도 춘천을 입지로 선택한 건 다른 지역보다 연평균 기온이 1∼2도 낮고, 공기 질이 좋아서다. 장경각 창살을 닮은 디자인으로 복사열을 막고, 바람이 잘 통하도록 했다. ‘21세기 장경각’이다.

문명이 흥한 곳엔 최고의 도서관이 있었다. 2300년 전 세워진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당시 70만 권을 보유한 문명의 산실이었다. 세계 최대의 영예는 미국 의회도서관이 물려받았다. 세계가 붕괴해도 이곳만 건재하면 복구는 시간문제라는 말까지 있었다. 구글이 2004년 현존하는 모든 책을 디지털화하는 프로젝트에 착수하면서 도서관 개념은 바뀌었다. 한자로 5200만 자가 넘는 팔만대장경도 100메가바이트(MB)면 저장할 수 있다. 이젠 책뿐 아니라 음성·영상·쇼핑 등 모든 일상 기록이 축적된다.

“도서관은 이유 없이 아무것도 주지 않기 때문이다.” 철강왕 앤드루 카네기가 1901년 뉴욕 공공도서관 설립을 위해 거액을 기부한 취지로 남긴 말이지만, 책이 데이터로 바뀐 지금도 유효하다. 4차 산업혁명기 데이터는 산업화 시절의 원유다. 방대한 데이터 속에 숨은 가치를 캐내 혁신 자산으로 활용하는 것이 승부의 관건이다. 팔만대장경과 금속활자를 만든 ‘기록 강국’의 위상을 21세기에도 이어가려면 우선 정비해야 할 게 완고한 데이터 규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