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평>북핵 협상 중재자의 3大 요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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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곤 가천대 석좌교수·정책학 前 행정안전부 장관

미국의 중동평화 조정자 역할
치밀하고 다양한 협상안 준비
신뢰와 군사·경제적 誘引 동원

창의적 종합 제안서 다수 마련
‘한국 부담’ 국민 합의 구하고
양측 움직일 리더십 역량 필수

1977년 11월, 이집트의 안와르 사다트는 예루살렘을 방문해 이스라엘 의회에서 평화를 설파했다. 새 제네바 협상 틀을 깰 방문에 미국과 소련은 놀랐다. 사다트는 경제 악화로 새 돌파구를 찾고 있었다. 이스라엘의 메나헴 베긴도 이집트를 답방했다. 사다트는 시나이 반도, 요르단 서안, 시리아 골란 고원, 동예루살렘 반환 등을 평화의 전제로 요구했지만, 시리아·요르단·팔레스타인의 이해관계는 사안마다 달라 불만이 쏟아졌다.

미국은 아랍 국가들의 입장을 민감하게 고려하면서도 은밀히 사다트를 지지했다.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은 헨리 키신저가 애용하던 셔틀 외교의 단계별 협상 방식(step-by-step)을 포기하고, 두 나라의 양자 협상을 활용하면서 중동 평화의 조정자 역할을 모색했다. 1978년 2월, 미국은 사다트를 워싱턴에 초대해 그의 주장을 잘 들어주었다. 다음 달, 베긴이 초청됐는데 ‘이스라엘이 1967년에 점령한 영토의 반환 문제’를 다룬 유엔 결의의 해석 문제로 이견이 드러났다. 사다트는 미국을 협상 과정의 파트너로 생각했을 정도였다. 반면 이스라엘은 미국에 조정자 역할에만 치중하라고 요구했다.

카터는 3자 정상회담이라는 도박을 한다. 9월 5일, 사다트와 베긴을 캠프데이비드로 초청했다. 중동 평화는 미국의 국익에 결정적이며, 미국은 양국의 신뢰를 확보했고, 또 경제나 군사적으로 두 나라를 움직일 수 있는 수단을 가졌다는 판단이 선 것이다. 카터는 당대 전략가들을 불렀다. 브루킹스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하버드대 협상팀이 제시한 복수의 종합 제안서 방식(SNT: single negotiation text)을 활용할 셈이었다.

관련국의 안보, 영토의 경계, 거주민의 이주, 예루살렘 통치, 팔레스타인의 자치권 등 수십 개의 이슈를 총망라해 분석했다. 모든 이슈를 취급하면서 동시에 서로 다른 해결책의 묶음을 25개나 개발했다. 제안서는 각국이 진정으로 어떤 평화안을 수용할 수 있고, 또 어떤 안을 다른 안보다 더 선호하는지를 밝혀줄 수 있는 평화안의 모음집이다. 개별국의 사정을 평화안에 투사하게 되면 각국은 어떤 평화안이 자기에게 더 유리한지를 알 수 있었다. 합의 후에는 단계별로 이행이 보장되는 방법도 강구됐다.

하지만 회담 둘째 날, 베긴과 사다트는 서로 대화도 하지 않으려 했다. 카터는 끈기 있게 이 방에선 사다트와, 저 방에선 베긴과 만났다. 준비된 SNT를 하나씩 꺼내면서 조금이라도 더 만족하는 안을 찾아갈 수 있게 설득했다. 그러나 교착 10일째, 시나이 반도와 서안 문제로 파국을 맞을 뻔했다. 그들의 국내 상황은 복잡했고, 관련국의 불만도 증폭되고 있었다. 카터의 인격이 묻어나는 설득과 미국이 제공할 수 있는 군사·경제적 유인(誘引)에 끌려 그들은 협상 12일 만에 가장 선호하는 SNT를 찾았고, 2개의 평화협정에 합의했다. 둘은 그해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3년 뒤 사다트는 지하드에 피살됐다.

아직도 중동은 한랭평화(cold peace) 상태지만, 이 협상이 중동의 기본질서에 기여한 바는 크다. 북핵 협상에 주는 교훈도 많다. 우리는 당사자면서 조정자다. 어떤 이슈에서는 미국 쪽에 서고, 또 어떤 이슈에서는 북한의 입장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어떤 종합안을 강제하는 중재자 역할은 어렵지만, 더 나은 타결안 쪽으로 가도록 강력한 ‘밀당’도 시도해야 한다.

한국 정부가 이러한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다음 3가지가 강구돼야 한다.

첫째, 창의적인 종합 제안서를 다수 만들어야 한다. 이미 미국은 강력한 첫 제안으로 투묘효과(Anchoring effect)를 높이는 움직임을 보였다. 첫발은 협상에 큰 영향을 미친다. 북한은 영변으로 역제안했지만,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유인 상술 정도로 봤던 것 같다. 최고의 전략가를 모아 창의적 비핵 평화안을 만들어서 운전대에 앉아야 한다.

둘째, 우리가 미국과 북한을 움직여 나감에 있어 필요한 수단과 부담할 자원에 대해 국민적인 합의를 구해 나가야 한다. 안보와 통일 비전을 위해서 상당한 규모의 자원을 유인책으로 동원하지 않고서는 조정자로서의 힘을 발휘하기 어렵다.

끝으로, 리더십이다. 둘을 움직이는 데는 신뢰와 영향력의 저량(貯量)이 결정적이다. 전통 우방으로부터 역량을 인정받는 활동이 아쉽다. 좌와 우로 나누지 말고 연결된 국민의 다리 위에 리더가 서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