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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Fifty+ 게재 일자 : 2019년 05월 24일(金)
느리게 가는 시간의 선물을 즐기는 ‘나무 보헤미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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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민식 내촌목공소 고문은 나무를 척 보면 그 이름부터 재질, 원산지, 나무에 얽힌 스토리까지 줄줄이 나온다. 김 고문이 내촌목공소에서 나무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김민식 내촌목공소 고문

종합상사서 합판 수출 담당
해외시장 바이어들 만나면서
‘문화가 가격 경쟁력’ 깨달아
인문학 공부하는 습관 생겨
공연장 건축 음향까지 연구

목재 납품 사업 IMF때 위기
서울대 출신 목수 이정섭 만나
목공소 세우며 인생 2막 시작
테이블·의자 등 ‘작품’ 즐비

수목 관련 투어가이드로 활약
강연 내용 묶어 책 펴내기도


“나무나 돌을 하는 사람들은 평생 할 수밖에 없다”라는 말이 있다. 조소(彫塑)를 하는 이들이 자기 분야의 격언처럼 사용한다. 다루는 재료 자체가 ‘시간의 작품’인 나무나 돌이어서, 그걸 제대로 알자면 역시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억겁의 세월이 들어있는 돌이야 그렇다 치고, 생명을 가진 나무는 긴 시간 속에서만 재질과 미감(美感)이 완성되고, 죽어서 새로운 가치로 살아난다.

사실 ‘제대로’ 산 사람의 삶도 나무와 같지 않은가. 사람들이 본능적으로 나무에 깊은 친연감을 갖는 이유일 것 같다. 전문직 종사자나 경영자 사이의 근래 ‘목공 붐’도 이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툭 치면 ‘나무 이야기’가 줄줄이 나온다는 김민식(64) 씨야말로 나무와 평생을 함께해온 사람이다. 강원 홍천군 내촌면 도관리의 산자락에 자리 잡은 내촌목공소의 목재 상담 고문이 그의 현재 직함이다.

지난 20일 ‘Fifty+’ 취재를 위해 그를 찾았을 때 “나는 나무하고만 살아 여전히 인생 1막인데, 어쩌지요?”라는 말로 반겼다. 산자락에는 검박하면서도 평범해 보이지 않는 모양새의 목공소와 전시실, 살림집이 늘어서 있고, 그 사이로 흐르는 실개천에는 수령이 50∼60년은 족히 됐을 높다란 귀룽나무가 장관이다 싶게 꽃잎을 달고 있었다. 김 씨는 “실개천에 버들치도 살고, 수달도 왔다 갔다 한 흔적이 있다”고 자랑했다.


소설가 김진명이 ‘나무 보헤미안’으로 부르는 김 씨는 한국의 목재 산업이 활황이던 시절부터 40여 년간 목재 딜러, 목재 컨설턴트로 일했다. 사실 우리의 직장 생활은 몸과 마음을 소진하는 문화여서, 대개 은퇴한 뒤 ‘그쪽을 향해 오줌도 안 싼다’고 하기 십상이다. 김 씨는 직업을 통해 전문성을 넘어서 인문적 소양까지 넓히며, 소진이 아니라 인생 2막의 풍요를 획득한 보기 드문 경우가 아닐까 싶다.

우리의 수출이 물꼬를 트기 시작할 즈음의 ‘합판’은 대통령까지 나서서 매달 수출액을 점검하던 ‘효자종목’이었다. 종합상사에 입사한 김 씨는 ‘상사맨’으로 합판을 팔고 원자재를 사기 위해 미국 등의 해외시장을 들락거렸다. ‘수출 역군’의 자부심도 잠시, 한국산 합판은 가격 경쟁력 이외에는 대접받지 못하는 상황을 접하고 막막함을 느껴야 했다.

“참담했어요. 미국 주방가구 회사 등 합판을 쓰는 곳을 찾아가면 처음부터 품질보다는 가격만 확인했어요. 우리 합판은 10장에 50달러, 영국에서 만든 조립식 주택의 바닥에 까는 같은 면적의 합판은 5만 달러였어요. 절망스럽고 부러웠죠.”

제작 기술도 중요하지만, 목재 제품은 나무에 담긴 시간과 거기에 덧붙여진 역사와 스토리, 즉 문화의 깊이가 가격을 결정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때부터 합판이든 원목이든 목재가 사용된 것을 보면 제조사를 추적하고 나무의 원산지를 살피는 버릇이 생겼어요. 가구는 물론이고 미술관의 바닥부터 계단과 난간, 자동차의 내부에라도 나무가 사용됐으면 살펴보았지요.”

그림이나 소설, 영화를 보아도 등장하는 인물보다 나무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나무에 연관된 역사와 철학, 문학 등 인문학을 공부하는 습관이 생겼다. 젊은 시절부터 인문학을 좋아했던 것일까.

“처음에 내가 개념이나 철학이 있거나 고매했던 건 아닙니다. 비즈니스 잘하려고, 프레젠테이션에서 눈에 띄려고 공부했던 겁니다. 영국에 가면 셰익스피어의 스트랫퍼드 고향집의 유명한 뽕나무 정도는 언급해야 했고, 독일이라면 헤세의 ‘데미안’에서 싱클레어의 방황을 상징하는 포플러나 에바 부인을 만날 때 등장하는 마로니에를 얘기하면 고객의 표정부터 달라졌지요.”

비슷하면서 다른 이유도 있었다.

“외국 바이어들을 만나면서 인문적 소양의 중요성을 알게 됐어요. 그들은 상품을 팔면서도 우아하고 당당했어요. 우리는 해외 바이어가 오면 일단 굽신대고 헐레벌떡 접대를 준비하고 했잖아요. ‘상사맨’은 접대하느라 사생활도 없었어요. 물건을 팔면서 오히려 도도한 저들을 배우고 싶었고, 그 바탕이 품격있는 대화를 가능하게 하는 인문적 소양이라고 보았습니다.”

▲  이정섭 작가의 작품.

김 씨의 나무 순례는 미국과 캐나다 등 북미부터 독일, 스위스 등 유럽과 일본, 이집트, 이스라엘, 파푸아뉴기니, 뉴질랜드에 이르기까지 55개국을 돌게 했고, 비행기 여정만 400만㎞, 지구 100바퀴에 이르렀다. 1980년대 중반 다니던 종합상사가 문을 닫았지만, 그의 나무 공부는 이어졌다. 일본과 유럽에서 좀 더 본격적으로 나무를 공부했고, 나무가 중요한 기능을 하는 세계 공연장의 건축 음향을 연구할 정도로 깊이도 닦았다. 독일의 국제적인 목재회사와 파트너로 일하며 세계 최초의 ‘엔지니어드 자작마루판’을 설계해 목재 딜러로서 사업도 탄탄해졌다. 그런 그에게 인생 2막의 계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국제통화기금(IMF) 금융위기만 없었으면 그런 생활을 이어갔을 겁니다. 목재를 납품했던 건설사들이 줄줄이 무너지자 매출의 절반 이상이 날아갔고 어음으로 받은 납품대를 건질 수 없었어요. 나무를 보기조차 싫게 되더군요.”

김 씨의 인생 2막은 목수 이정섭(48)과의 만남에서 시작됐다. 서울대 미대를 나온 이 목수는 한옥을 배워 현재 내촌목공소 옆에서 그 전통과는 다른 집을 짓고 가구를 만들며 살고 있었다. 김 씨는 2006년 초 이 목수가 소개된 신문기사를 보고 그를 찾아갔다.

“강원도 산골에 이런 목수가 처박혀 있는 걸 이제껏 발견하지 못했을까. 우선 그가 악기에나 쓰는 귀한 목재로 만든 가구에 꽂혔고, 제 서울집의 가구를 아내의 허락도 받지 않고 몽땅 바꾸어버렸어요.”

아예 이듬해에는 그곳에 자신의 집을 지어달라고 부탁해 그 옆에 정착했다.

“내가 다시는 사업을 하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있던 때인데, 이 목수에게는 ‘돈 좀 벌어보자’고 제안했어요. 그때 이 목수가 ‘작가 정신이 어떻고, 미술이 어떻고’ 했다면 쳐다보지 않았을 거예요. 선뜻 하겠다고 하더군요.”

서로를 알아본 ‘작가’인 이 목수와 ‘나무 전문가’이자 사업가인 김 씨의 ‘케미’는 짝 들러붙었다. 내촌목공소가 법인으로 출범한 것이다. 이 목수 혼자는 엄두를 못 내던 가구 전시회를 서울 코엑스에서 열었는데, “한마디로 뻥 터졌다”고 김 씨는 전했다. 이후 내촌목공소 건물과 전시장을 짓고, 이 목수는 가구와 다른 조형 작품의 작업을, 김 씨는 작업에 필요한 나무를 고르고 찾아주며 이 목수 작품과 관련된 전반적인 기획 등 매니지먼트까지 하고 있다. 고인이 된 김서령 작가는 어느 잡지에서 “이정섭 목수는 불국사의 김대성 이후 목수”라고 평가한 적이 있는데, 김 씨는 몇 술 더 떠서 “요새는 ‘미켈란젤로’급”이라며 이 목수가 듣기에 부담스럽게(?) 추어올린다. 김 씨는 “내가 아니어도 벌써 우뚝 섰을 친구”라고 말한다.

내촌목공소에 전시된 가구는 다양한데, 그중엔 5000만 원의 가격표가 붙은 콘솔(제단)도 있다. 큰 성당이나 교회의 제단으로 어울릴만한 품격을 갖춘 ‘작품’이다. 수천만 원대의 테이블, 수백만 원대의 의자 등은 즐비하다. 김 씨는 “나뭇값 얼마나 들어갔느냐고 먼저 묻는 사람들이 있어요. 허허. 디자인과 시간의 값입니다”라고 말한다. 그는 “재료도 각별하게 골라 쓴 것이지만, 사실은 내촌목공소의 가구와 집들은 시간의 값이 더 큽니다. 자그마한 문고리 하나 만드는 데, 의자 하나 만드는 데 얼마나 시간이 들어갔고 고심했는지 저는 압니다. 피를 철철 흘려 가며 한 디자인은 돈으로 환산하기 쉽지 않지요.”

두 사람은 내촌의 큰골 마을에 20여 채의 ‘민가(民家)’도 지어 분양했다. 이들은 ‘한옥’이란 말 자체에 불편함을 느낀다. 김 씨는 “예전에 한옥이라 했던가요? 기와집, 초가집, 함석집, 대문 큰집 등으로 불렀지요. ‘아메리칸 하우스’나 ‘일본집’이라고 그들이 부르던가요? ‘한옥’이란 용어가 사전에 등재된 지 얼마 안 돼요. 아마도 예전 선교사들의 양옥에 대비해서 한옥이란 이름이 생겨났을 겁니다”라고 말한다. 천편일률적인 한옥의 생김새와 소나무에 집착하는 것도 김 씨는 불만이다. 그는 ‘민가’라는 용어를 택했다.

김 씨는 이제 지역 명소가 된 ‘내촌목공소’에서 건축가나 디자이너를 대상으로 한 목재 컨설팅과 강연을 한다. 방문객이 늘어나면서 마을 주민들의 일상을 보호하고자 ‘투어 프로그램’을 만들었는데, 김 씨는 투어가이드 겸 해설사로도 활약한다. 외부강연도 적지 않다. 박사학위자가 즐비한 수목(樹木) 연구기관에서 나무에 관한 ‘실전과 실용’ 강의를 듣고자 김 씨를 초청하기도 한다. 최근에는 그가 강연했던 내용을 담은 나무와 인문학이 결합한 책 ‘나무의 시간’(브.레드)을 펴내기도 했다.

“서울에 사는 은퇴한 친구들은 나보고 인생 후반에 산골에서 어떻게 사냐고 걱정해요. 그 친구들은 기껏 골프나 등산, 폭탄주 등 이전에 하던 것을 못하게 되면 삶이 없는 줄 알아요. 뉴욕이나 런던에 사는 여유 있는 사람들은 전부 교외에 집을 두고 있는데 말이지요. 콘크리트 문화, 속도의 문화에만 길들어 나무의 문화, 느리게 가는 시간의 선물을 즐기는 법을 못 배운 겁니다. 안타깝지요.”

김 씨는 자신의 인생 2막에 대해 “돌아보면, 내 의도대로, 내 계획대로 살아본 적이 없습니다. 그저 나무만 쳐다보고 살다 보니 세월이 흐르고 내촌까지 오게 됐습니다. 우연 속에서 다른 문이 열리는 게 인생인가 봅니다”라고 말했다.

인제 = 글·사진 엄주엽 선임기자 ejyeob@munhwa.com
e-mail 엄주엽 기자 / 문화부 / 부장 엄주엽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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