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한 시 열세 번째 종소리와 시작되는 마법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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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중 톰의 정원에서 / 필리파 피어스 지음, 에디트 그림, 김경희 옮김 / 길벗어린이

하나의 정원만 생각난다. 필리파 피어스의 판타지 걸작 ‘한밤중 톰의 정원에서’를 읽은 다음 한동안 그랬다. 이 동화를 읽은 뒤부터는 깊은 밤 골목을 걷다가도 저 다닥다닥 붙은 건물 담벼락 너머에는 어떤 미지의 풀밭이 펼쳐져 있을까 상상한다. 피어스는 어디 한 곳 마음껏 뛰어놀 뜨락이 없는 어린이들에게 최고의 1인용 정원을 선물했다. 그것도 새벽 한 시 넘어 열세 번째 종소리와 함께 시작되는 마법의 시간과 함께 말이다.

1920년생인 피어스는 이 작품으로 1959년 카네기상을 수상했다. 문학에도 나이가 있다면 이 이야기는 환갑을 넘긴 셈이다. 수많은 독자가 머릿속으로만 떠올려야 했던 장면들이 장르를 넘나들며 실험적 작업에 매달려온 프랑스 작가 에디트의 손을 거쳐 그래픽 노블로 다시 태어났다. 글로만 쓰인 판타지가 그림을 입었을 때 오히려 실망하는 경우도 적지 않기에 독자 입장에서도 긴장된 마음으로 책을 대했다. 그런데 에디트의 그림은 지나온 과거의 시간을 오가며 달려가는 책 속 마법을 현실에서 마주친 것처럼 강력했다.

주인공 톰이 해티의 정원에서 겪은 일 속에는 빛나는 찰나도 있고 쓸쓸하고 허전한 긴 여운도 있다. 그래픽 노블로 재창작되면서 이 거침없는 환상의 오르내림을 즐길 수 있는 독자의 반경이 크게 넓어졌다. 두꺼운 책을 힘겨워하는 어린이 독자들도 피어스의 세계에 진입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무엇보다 기쁜 것은 원작의 아득하고 몽환적인 감성이 거의 흐트러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히려 톰이 해티의 정원을 오가며 느끼는 간절함은 더 열렬해졌다. “벌써 밤이면 좋겠다”고 읊조리며 해티와의 만남을 기다리던 톰의 마음이 느껴진다.

그래픽 노블만이 구사할 수 있는 매력 중에는 침묵이 있다. 글은 아무리 고요히 말하려고 해도 완전한 침묵과 암전이 불가능하다. 작가 에디트는 침묵과 암전의 경험을 극대화하는 절제된 이미지로 ‘톰과 해티의 한밤중’에 접근하는 데 성공했다.

그의 그림 속에서는 아주 작은 발소리도 크게 들린다. 톰과 함께 아무도 본 적이 없는 것을 같이 목격하는 느낌이다. 잠시라도 원 없이 후련한 공간을 누리고 싶다면 이 책을 권한다. 99쪽, 1만6000원.

김지은 서울예대 문예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