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경기 파주시 문산읍에 있는 반구정(伴鷗亭). 1449년 87세의 황희가 영의정에서 물러난 후 갈매기를 벗삼아 여생을 보낸 곳이다. 정승을 지내고 돌아온 사람이라고는 아무도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유유자적한 삶을 살아 청렴결백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 역사인물학
박현모의 한국형 소통이야기 - ③ 인사실패 사례: 1865년 고종
김병학, 능력보다 신분 중시한 인사·천주교 탄압…고종 親政 안착시켰지만 ‘쇄국의 길’로
황희, 열린 인재등용·문호개방 제안하고 ‘장차의 일’ 깊이 생각… 세종代 ‘국운상승’ 밑바탕
“방략(方略)을 품고 있지 않은 자가 중책을 맡게 되면, 비방 받고 마침내 화를 초래하게 됩니다.” 세종 재위 10년째인 1428년 황희가 좌의정을 사직하면서 올린 말이다. 자신은 정승 맡을 그릇이 못 된다면서 ‘복속지우(覆之憂)’, 즉 솥의 크기가 작아 음식을 바닥에 쏟게 하는 잘못을 범치 않게 해달라는 요청이었다. 하지만 세종은 즉각 황희의 사직서를 반려했다.
“경이야말로 세상을 경영할 재주와 실제 쓸 수 있는 학문(經世之才 適用之學)을 갖춘 보기 드문 인재”인데, 뜬소문 때문에 일을 그만두게 할 수 없다는 게 반려의 이유였다(세종 10년 6월 25일).
세종이 보기에 정승은 당면한 큰일을 헤쳐 나갈 해법을 가진 사람이어야 했다. 그런데 그에 못지않게, 그리고 그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적용지학(適用之學)이 뒷받침돼야 했다. 일을 성공적으로 잘 해내는 것과 더불어, 정승은 나라에서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백성과 임금에게 무슨 의미를 갖는가를 적절히 설명하고 설득하는 지적 리더십을 가져야 한다는 게 세종의 생각이었다. ‘정치’는 모름지기 ‘행정’의 범위를 넘어서는 의미와 소통의 영역에 잇닿아 있기 때문이다.
정승리더십, 즉 ‘일인지하 만인지상’에 있는 정1품의 영의정과 좌우 정승들의 리더십 사례를 살펴보는 이유는 지금 우리나라 국가경영의 해법이 혹시 여기에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다. 5년 단임의 대통령제 하에서는 어떤 정책도 연속성을 가질 수 없다. 대통령이 바뀌면 모든 게 중단되는 지금의 제도에서 소신을 가진 공직자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방략을 품은 국무총리가 여러 명의 대통령을 거치면서도 국정의 중심을 잡고 장기적 국가사업을 이끌어가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조선왕조의 대표정승은 단연 황희다. 그는 태종과 세종을 섬기며 인사와 외교 등 국정의 핵심 업무를 담당했다. 정승직만 22년 8개월(1426. 5∼1449. 10, 중간 10개월 파직)을 지냈다. 태종과 세종이 그를 중용한 것은 그의 탁월한 사태파악 능력 때문이었다.
황희는 아무리 복잡한 사태도 그 핵심을 파악해 간명하게 정리해내는 재주가 있었다. 국왕 스스로도 가끔 중심을 잃고 헤맬 때가 있었다. 그럴 때 황희를 만나면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 황희는 왕에게 일의 우선순위를 말하고 그 자리에 적합한 인재까지 추천하곤 했다. 이 때문에 왕들은 그를 단 하루 이틀만 보지 못해도 답답해하곤 했다.
황희의 더 큰 장점은 “깊이 계교하고 멀리 생각하는 힘(深謀遠慮)”이었다. 세종의 최장 비서실장인 승지 안숭선에 따르면 나랏일을 의논할 때 황희는 눈앞에 보이는 것을 넘어서서 장차의 일을 헤아려 대비하는 데 뛰어났다(세종 13년 9월 8일). 세종이 압록강을 건너 여진족을 토벌하려 할 때나 많은 신민의 반대를 무릅쓰고 육진을 개척하려 할 때도 황희의 의견을 묻고 “황희 말대로 하라”고 힘을 실어준 것은 그 때문이었다.
황희를 조선 최고의 정승이라 한다면 최악의 정승은 누구일까? 나는 고종 때의 김병학(金炳學, 1821∼1879)을 꼽는다. 김병학은 황희보다 440여 년 뒤에 활동한 정승이다. 두 사람은 겉으로 볼 때 비슷한 점이 많다.
황희와 마찬가지로 김병학은 철종과 고종시대를 거치며 이조와 병조, 그리고 예조의 판서를 지내며 인사와 외교 업무를 도맡았다. 고종 초반부인 1865년부터 7년 7개월 동안 정승직을 수행했다. 이 기간에 그는 조대비(趙大妃)의 수렴청정을 마무리하고 고종의 친정(親政)을 안착시켰으며(1866년), 두 차례의 외국 침입을 막아냈다(1866년 프랑스, 1871년 미국). 황희가 명나라에 보낼 외교문서를 작성할 정도의 문장력을 가졌던 것처럼(세종 12년 11월 13일), 김병학 역시 철종의 묘지문을 짓는 등 당대 최고의 문형(文衡)이었다(고종 1년 4월 7일). 이 때문에 고종은 그를 “문장과 경세제민의 재주를 겸비한(兼之以文章經濟)” 인재이며 “한 세상을 진압해 복종시킨(鎭服一世)” 정승이라 칭찬했다(고종 16년 8월 15일, 6년 10월 24일).
이처럼 황희와 김병학 두 사람은 경륜과 학식이 모두 뛰어난 정승으로 불렸다. 하지만 둘의 생각과 나랏일의 결과를 들여다보면 사뭇 다르다.
우선 황희는 열린 인재 등용을 제안하고 실현한 정승이다. 그는 “그 사람이 어질다면, 비록 사립문과 개구멍(圭竇)에 사는 천인(賤人)이라도 고위 관료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진실로 현능(賢能)하다면 비록 뇌물죄나 횡령죄를 범한 관리의 자손이더라도 등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철저히 능력 위주의 인재 쓰기를 주장했다. 장영실의 파격 승진이 논란이 될 때 그전 시대의 사례를 들어 찬성한 사람도 황희였다(세종 15년 9월 16일).
이에 비해 김병학은 능력보다 신분을 중시하는 인사정책을 고집했다. 고종 9년째인 1872년에 아전 등 중인층에게 청요직(淸要職)이라 불리는 주요 관직까지 진출하게 할 것인가를 의논할 때가 그랬다. 그는 아전들이 청요직을 넘보는 것은 “외람되고 무엄한 일”이라면서 그들을 아예 과거에 응시하지 못하게 차단해야 한다고 주장해 왕의 허락을 받아냈다. 미국의 제임스 팔레 교수가 김병학을 ‘수구적 인물’로 꼽은 것은 그러한 발언에 근거했다(Politics and policy in Traditional Korea, 1975).
대외정책 측면에서 그들은 더욱 대조를 보였다. 황희는 일본인과 여진족을 적극 포용할 것을 주장했다. 1434년에 내이포(乃而浦), 즉 지금의 경남 진해시에 있던 개항장에 거주하는 왜인을 내쫓아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그는 반대했다. 왜인으로 하여금 들어와서 살게 한 지가 오래되었는데, 갑자기 내쫓으면 곤란한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 따라서 그곳에 성을 쌓아서 유사시에 우리 백성들이 대피할 수 있게 하자는 현실적인 방안을 제시했다(세종 16년 8월 5일).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여진족이라 할지라도 뽑아서 벼슬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조선 전기 영의정을 지낸 최고의 문신 황희.
이에 비해 김병학은 철저한 쇄국론자였다. 그는 1866년 병인박해 때 좌의정으로 있으면서 천주교를 방치하면 황건적이나 백련교 무리처럼 될 것이라며 강력한 탄압을 주장했다. 또한 프랑스군의 침입 대책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그는 전군을 동원해 싸울 것을 주장하는 한편, 대표적인 척화론자인 이항로를 천거해 등용시키기도 했다(고종 3년 9월 8일). 영의정에서 물러난 뒤에도 그는 조일수호조약(朝日修好條約·강화도조약)의 체결을 극렬히 반대하는 등 철저한 척화론자의 길을 걸었다. 말하자면 1865년 3월에 김병학을 좌의정에 임명하는 순간 고종정부는 이미 쇄국의 길을 걷기로 작정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세종은 정승의 직책은 매우 중요해서 “훌륭한 정승 한 사람을 얻으면 나랏일의 근심을 사라지게 할 수 있다”고 말했다(세종 14년 6월 9일).
정승은 내우외환 등 큰 근심이 없으면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해 일을 잘하도록 돕는다. 그러다가 변경에 급변이 있으면 병력을 동원해 무위를 빛내야 하는 게 정승의 책무였다. 한마디로, “내외의 권한을 온전히 맡는” 막중한 자리인 그곳에 누구를 임명하는가에 따라 국운이 달라졌다. 따라서 “온 마음을 다해 정승을 찾고 모셔와” 오랫동안 맡기는 게 곧 왕의 사명이라는 게 세종의 생각이었다(세종 15년 5월 16일).
그렇게 볼 때 1426년과 1865년은 세종과 고종에게 결정적인 시기였다. 황희와 김병학을 각각 자신의 정승으로 임명하는 순간 국운 상승의 대로 내지 내리막의 협로를 걷기 시작한 것이기 때문이다. 황희가 실천했던 정승리더십, 즉 경세지재(經世之才)와 적용지학(適用之學)을 갖춰서 산적한 국내외 국정 과제를 해결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다독이고 촉진하는 큰 정치가가 나오기를 바라는 것은 지나친 기대일까.
■ 용어설명
정승리더십 : 정승(政丞)리더십이란 조선왕조의 가장 높은 관직인 삼정승이 발휘하는 지도력을 뜻한다. 재상(宰相)이 종2품 참판부터 정1품 정승까지를 아우르는 데 비해, 정승은 정1품의 영의정과 좌우 정승만을 가리킨다. 재상에게는 정도전의 책에서 보듯이, 주나라의 관제를 모델로 삼았기 때문에 폭넓은 재량권이 부여된다(임금이 할 일은 한 명의 재상을 의논해 정하는 것에 불과하다-‘조선경국전’). 이에 비해 한나라와 당나라 시대의 관제인 정승에게는 왕을 보필하면서 백관을 통솔하게 하는 제한된 권한만이 부여되었다(‘경국대전’ 이전 경관직). 조선왕조에서 삼정승 제도는 1400년(정종 2년) 사병(私兵) 혁파 후 의정부가 만들어지면서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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