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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김병종의 시화기행 게재 일자 : 2020년 01월 09일(木)
시간의 더께마저 그곳선 우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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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필모그래피, 도시는 우아하게 늙어간다

어두운 쾌락과 수군거림과 떠들썩함과
야만과 포식과 위험의 도시들을 돌아서
이윽고 파리.
오래된 성당과 미술관 사이로
흘러가는 세월.
도시의 우아한 늙어감이 만져지는 곳.
육체에서 정신까지, 감성에서 이성까지
그 성가시게 먼 길도
오래된 모퉁이의 카페에서
옛 친구처럼 만나게 되는 곳
살강 부딪치는 핏빛 포도주에는
에펠탑의 달그림자가 비치고
그 위로 맑은 피아노 소리.
철학과 예술, 문학과 인생은
늙은 파리와 젊은 파리가 뒤섞이듯
그렇게 센 강 물결 따라 뒤섞여 흘러가는데
반 고흐의 밤풍경 속 별빛들은 우수수, 그 위로 떨어지누나.
우리들의 옛사랑과
웃음소리가, 증발해버리지 않고
꽃잎처럼 화사하게 떠가는 것을 볼 수 있는,
단 하나 지상의 도시
아침에 열어놓은 이층집 창문으로는
바게트 빵 굽는 냄새
오래된 침향(沈香)처럼 스며들어오는데
독약처럼 검은 에스프레소와
다디단 마카롱 한 조각에서도
쓰고 단 인생의 의미를
혀끝으로 녹여내 터득해보라는 듯.
정갈한 소식(素食)으로 이 도시의
옛 전통 오네톰(교양인)을
음미해보는데
저 멀리 아침의 대로에는
또각또각 희고 검은 말 위의 기마 순찰대
이제는 바쁘고 빠른 시간일랑
설렁설렁 바짓가랑이 속으로 흘러가도록
그렇게 내버려두고
서서히 깨어나는 도시 속으로
걸어가야 하는 시간
아주 느리고 한가하게
기마병의 말발굽 소리처럼 또각또각.
그러면서도 화사하고 우아하게.
저 시(詩)와 그림의 도시 속으로



■ (17) 파리

문학·예술·철학 공존 ‘문화중심지’
과거·현재의 매력 모두 가진 도시
우디 앨런 영화 시점따라 여행가면
골목골목 숨겨진 ‘시간의 멋’ 발견


한 도시에 ‘러블리(Lovely)’하다는 표현을 쓸 수 있다면, 밤의 아름다움이 낮의 눈부심과 겨룰만한 곳이 있다면, 미술이 문학과 철학에 기죽지 않는 곳이 있다면, 기가 죽기는커녕 달려오는 군마(群馬)처럼 지축을 흔드는 곳이 있다면, 시간의 더께가 내려앉아 있지만 이마저 세월의 우아한 입김처럼 느껴지는 곳이 있다면, 그곳은 파리다. 인문과 예술의 벨에포크 시대에 허다한 철학적 담론과 함께 몽마르트르와 물랭루즈와 인상주의의 신화를 만들어낸 도시. 과거면서 현재인 도시.

그 파리를 가장 잘 열고 들어가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냥 뻔한 관광코스 말고 예술과 문학, 현실과 과거를 퍼즐처럼 엮어 놓은 우디 앨런식의 ‘미드나잇 인 파리’의 동선을 따라 걸어보는 것은 어떨까. 파리에 사는 사람들은 파리에 대해 쓰거나 말하지 못한다고들 한다. 그 아름다움이라는 것도 살다 보면 둔감해질뿐더러 도시의 명암을 극명하게 알기 때문이라는 것. 그래서 파리에 매혹돼 파리 오마주를 쓰는 사람들은 대부분 여행자란다. 왜 아니겠는가. 여행자는 보고 싶은 것만 볼 특권이 있다. 낭만의 안경을 끼고 과다하게 부풀려 본다 한들 죄 될 것도 없다. 무엇보다 그에게는 돌아갈 집이 있다. 그래서 잠시 머물다 갈 이 매혹적인 도시에 대해 자기만의 색채를 입히는 것이다.

우디 앨런의 경우도 다르지 않았을 것. 그는 왕년의 문청(문학청년)으로 알려져 있지만 문학에의 로망은 노년에 이르기까지 그를 사로잡고 놓아 주지 않는다. 그래서일 것이다. 그의 영화는 대부분 필름 위에 쓴 원고처럼 흘러간다. 장면이 바뀌는 일이 책장을 넘기는 듯한 느낌으로 온다. ‘미드나잇 인 파리’가 특히 그렇다. 영화는 1920년대 문학과 예술의 영상지도다. 다만 그 지도는 공간여행이면서 동시에 시간여행의 지도라는 점이 특징. 그 시절의 밤공기가 투명한 알갱이처럼 만져질 정도다.

물론 비슷한 파리 필모그래피의 영화는 수도 없이 많다. 안타까운 사랑의 여로를 따라가는 ‘비포 선셋’은 낡고 오래된 서점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에서 시작되고, ‘로스트 인 파리’는 에펠탑을, ‘아멜리에’는 카페 레 뒤물랭(les du Moulins)과 생마르탱 운하(canal Saint Martin)를, ‘쁘띠 아만다’는 뱅센 공원(Bois de Vincennes)을, ‘퐁네프의 연인들’은 물론 퐁네프 다리를, ‘물랑루즈’는 화려함을 극한 물랭루즈 주장의 한 시절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미드나잇 인 파리’는 파리의 어느 한 정지된 배경이 아닌 전체 파리의 구석구석 골목골목을 향해 카메라가 돌고 있다. 파리 시간여행이라는 점이 특징이다. 전반적으로 1920년대를 향한 우디 앨런의 파리 헌정 영화라고 할 수 있다. 파리 근교 모네의 지베르니 정원이 나오고 베르사유 궁전과 로댕 박물관이 나오는가 하면, 브리스톨 호텔과 생에티엔 뒤몽 성당과 생투앙 벼룩시장, 알렉산더 3세 다리, 물론 물랭루즈와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 서점이 나온다.

파리의 경쾌함과 우울, 소란과 고요, 과거와 현재가 뒤섞이며 돌아간다. 그리고 파블로 피카소, 살바도르 달리, 어니스트 헤밍웨이, 스콧 피츠제럴드 같은 문인과 예술가들이 줄줄이 소환된다. 그러고 보니 맞는다. 그 도시를 그토록 풍요롭게 한 것은 그 밤하늘의 별 같은 이름들이 있어서일 것이다. 사람이 없는 건물만의 도시는 화려할수록 공허한 것. 우디 앨런은 바로 그러함에 착안했다. 이 아름다운 도시에는 뛰어난 예술가와 문학가들이 있어서 더 아름다운 것이라고. 그러니 떠나간 그 사람들을 불러들여 보자고.

파리를 밤의 도시라고 한 글을 본 적이 있다. 그 밤하늘의 보석 알갱이 같은 문인과 예술가들이 사라져버린 대신 인공조명만이 밝히고 있다는 뜻에서였을 것이다. 그러니 이 아름다운 도시의 문을 열고 들어가 천천히 걷기에는 우디 앨런식 시공(時空)지도 속으로 가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도시뿐 아니라 사람을 보고 만나는 안복(眼福)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환상이면서 현실인 파리, 과거면서 현재인 파리, 파리 필모그래피는 그렇게 도시로 시작돼 사람으로 완성된다.

화가·서울대 명예교수



■ 나폴레옹 이후 건물 재배치… 1967년 첫 공개

파리, 근대 도시의 시작

세계 문화예술의 수도라 함 직한 파리가 도시로서의 근대성을 획득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보나파르트 루이 집권 이후라는 것이 정설이다. 그는 오스낭 남작을 총괄지휘자로 해 일종의 파리 재생 사업과 개조 사업을 벌였다. 도시 전체를 광장을 중심으로 해 방사형 직선과 대칭으로 구성하도록 했고 지역적 특성에 따라 건물을 재배치했다.

상하수도시설과 가스 등 설치, 전신과 철도 등 근대적 기술과 문물을 신속하게 도입, 배치함으로써 도시가 유기적으로 연결되며 일사불란한 전체성을 갖추도록 했다. 1967년 만국 박람회를 통해 새롭게 단장된 파리의 모습이 공개됐고 파리는 이후 많은 유럽 국가의 근대형 도시 형성에 영향을 줬다. 일례로 건축과 미술에 조예가 깊었던, 아돌프 히틀러만 하더라도 파리 여행 때에는 늘 젊은 건축가 슈페어를 동행시켰으며, 그를 통해 제국의 수도로 일컬어지던 정치와 역사 도시 베를린을 파리를 능가하는 새로운 예술과 인문의 문화중심 도시로 재생시키려는 꿈과 집착을 가질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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