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초비상>油價 더 폭락해도 증산…세계경제 위협하는 ‘산유국 치킨게임’

WTI 24.59%↓29년만에 최악
사우디-러시아 감산합의 실패
출혈戰 감수 자존심 싸움 돌입

셰일오일업체 몰린 美 타격에
대선 앞둔 트럼프 중재 나설 듯

주요 산유국 간 원유 감산 합의가 불발된 직후 글로벌 에너지 시장 주도권을 둘러싸고 사우디아라비아와 러시아 간 ‘치킨게임’이 본격화할 조짐을 보이면서 국제유가가 29년 만에 대폭락을 기록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에 따른 수요 감소에 주요 산유국 간 원유전쟁이 불붙을 경우 국제유가는 배럴당 20달러대까지 추가 하락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9일 뉴욕상업거래소(NYMEX)에서 4월 인도분 서부 텍사스산 원유(WTI)는 전 거래일보다 배럴당 10.15달러(24.59%) 폭락한 31.13달러에 거래를 마감됐다. 이날 기록한 일일 하락 폭은 1991년 걸프전쟁 이후 29년 만의 최대 수준이다. 앞서 WTI는 직전 거래일인 지난 6일에도 주요 산유국 간 감산합의 불발 소식에 10.1% 급락한 바 있다. 런던 ICE 선물거래소의 5월물 북해산 브렌트유 가격도 전장 대비 배럴당 10.91달러(24.10%) 주저앉은 34.36달러에 거래가 마감됐다. 같은 날 싱가포르 현물시장에서 거래된 두바이유 가격 역시 배럴당 32.87달러로 전 거래일보다 15.71달러(32.34%)나 폭락했다.

국제유가 폭락은 지난 6일 오스트리아 빈에서 석유수출국기구(OPEC)와 러시아 등 주요 산유국들이 감산 합의에 실패하면서 시작됐다. OPEC을 주도하는 사우디는 하루 150만 배럴 추가 감산을 요청했지만, 세계 3위 산유국 러시아는 감산을 거부했다. 러시아의 반대는 시장점유율을 높이는 한편 상대적으로 생산단가가 높은 미국 셰일오일에 타격을 주기 위한 결정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세계 2위 산유국 사우디는 감산을 통해 유가를 배럴당 50∼60달러 선으로 유지하려던 계획이 무산되자 예상 밖의 강공책을 꺼내 들었다. 사우디 국영 석유사 아람코는 지난 7일 오는 4월부터 원유공식판매가격(OSP)을 지역별로 배럴당 6∼8달러 대폭 인하한다고 발표했다. 하루 970만 배럴 수준인 원유생산량을 1100만 배럴까지 증산한다는 소식도 이어졌다. 사우디가 원유 수출가를 내리면 다른 산유국 역시 인하 경쟁에 나설 수밖에 없다. 러·사우디 원유전쟁이 본격화하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이날 “사우디와 러시아가 원유 흐름과 가격을 두고 논쟁하고 있다. 그것과 가짜뉴스가 증시 하락의 이유다”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사우디의 이례적 대응은 일단 러시아를 협상 테이블에 불러내기 위한 충격요법으로 분석됐지만, 양국 갈등이 장기화할 경우 국제유가는 배럴당 20달러대까지 추가 하락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러시아 재무부는 이날 그동안 누적된 국부펀드에 힘입어 국제유가가 배럴당 25∼30달러까지 떨어져도 6∼10년간 재정 운영이 가능하다며 쉽게 물러나지 않을 뜻을 내비쳤다. 사우디 역시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가 연내 왕위 계승을 노리는 데다 배럴당 생산단가가 전 세계에서 가장 낮은 10달러 선이어서 버틸 여력이 있다는 평가다.

저유가 상황이 장기화할 경우 올해 재선을 노리는 트럼프 대통령의 지지기반으로 셰일오일 업체가 몰려 있는 텍사스주 등의 타격이 뻔해 미국의 개입이나 중재에 따른 감산 합의 가능성도 적지 않다는 분석이다. 한편 국제에너지기구(IEA)는 이날 중기 전망보고서를 통해 코로나19 확산으로 올해 국제 석유 수요가 지난해보다 하루 평균 9만 배럴 감소한 9990만 배럴로 감소할 것으로 전망했다. 국제 석유 수요가 감소할 경우 이는 글로벌 금융위기 여파가 지속됐던 2009년 이후 처음이다.

김남석 기자 namdol@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