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생각하며>고독한 戰士로 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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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수 DGIST 석좌교수 커뮤니케이션학

감염병 전쟁 사회적 거리 두기
학교·시장·식당 문 닫는 일상

자유와 권리 스스로 포기하며
고립·이기적인 개인의 재발명

이젠 지구촌 전 知性이 나서서
새로운 공동체 운영 디자인할 때

문득, 정치철학자 래리 시덴톱이 저술한 ‘개인의 발명’(Inventing the Individual·한국어 번역본 ‘개인의 탄생’)이 떠올랐다.

16∼17세기에 일어난 종교개혁을 통해 비로소 인간은 개개인의 평등과 자유의 권리를 인정하기 시작했다. 민주주의의 기본 가치가 태동한 것이다. 이전까지 인류는 태어나기 전부터 신분제에 예속돼 있었고, 대다수 세인(世人)은 자유와 기본권을 박탈당한 노예계급에 속했다. 하지만 절대권력을 누리던 교황·황제·봉건영주와 투쟁하면서, 마침내 인류는 독립과 자존(自尊)을 확보한 새로운 개인을 발명했다.

그런데 지금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과의 전쟁을 체험하면서 인류가 또 다른 ‘개인’을 발명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독립적인 개인이 가족·조직·국가 등의 공동체와 상호 의존관계를 유지하면서 생존하던 존재가 갑자기 무인도에 홀로 버려진, 발가벗은 인간으로 전락한 느낌이다. 어느 곳이든 적(코로나바이러스)이 침입할 수 있으며, 그것도 눈에 보이지 않는 적이라고 상상할 때, 누구나 생존을 위해서는 개인 스스로 방호하고 대처해야만 하는 고독한 전사(戰士)가 됐다고나 할까.

마스크는 고독한 전사의 상징이다. 약국 앞에서 2시간 넘게 추위에 떨면서 기다린 끝에 겨우 마스크 2장을 거머쥐었을 때, 전쟁 때 구호물자를 받아든 피란민을 연상하게 됐다. 얼굴을 맞댄 대화도 끊고, 사회적 거리 두기를 지키며, 공공장소에도 가지 말아야 하는, 바이러스를 대신한 개인 간의 ‘대리’전쟁 상황은 인류에게 믿을 수 있고 의지할 수 있는 건 오직 나 하나뿐임을 깨닫게 한다. 보건복지부 차관이 TV로 “국민 여러분도 일상에서 직접 방역의 개인 주체가 돼야 합니다”라고 설파할 때, 국가를 떠난 고독한 전사로서의 나 개인을 깊이 새기게 됐다.

감염병은 개개인의 생존을 직접적으로 위협할 뿐만 아니라, 전염력(傳染力) 때문에 공동체 전체를 초토화시킬 수 있는 공동체 공통의 문제다. 개인과 공동체를 동시에 파멸로 몰아넣는 국가 간의 전쟁이나 지진 같은 자연재난과 다르지 않다. 특히, 국경을 넘나드는 이동이 쉬운 현대사회에서, 인류가 감염병에 대항한 전대미문의 전쟁을 치를 수 있음을 우리는 이미 사스(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나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등의 유행에서 경험했다.

감염병 전쟁에서 확실한 방호책은 사회적 거리 두기다. 그것을 위해 78억 인류가 개인 간의 격리로 치닫는다면 어떤 결과가 초래될 것인가. 이번 사태로 사람이 많이 모이는 학교, 시장, 공연장, 스포츠센터, 식당, 심지어 직장마저 문을 닫는 게 일상이 돼 버렸다. 그로 인해 전 세계의 사회경제 체제가 무너지고 있으며, 1929년 대공황 때처럼 세기적 도산과 실업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 이런 현실에, 생필품 사재기처럼 자신만의 생존을 위한 보신주의가 눈에 띈다. 인류가 자유와 권리를 스스로 포기하면서 고립무원(孤立無援)의 개인을 재발명하고 있다.

고독한 전사는 또한 고독한 전사자(戰死者)가 되는 형국이다. 홀로 생존하기 어려운 노인이나 영유아, 또는 기저질환을 갖고 있는 사람들부터 방호 능력의 부족으로 가장 먼저 외로운 죽음에 직면한다. 심지어 시신마저 가족으로부터 외면당한 채 한 줌의 재로 사라지는 장면을 연일 목격하고 있다. 이런 감염병 전쟁이 장기화할수록 의료복지 체제의 부족 또는 붕괴로, 고독한 전사자가 대거 발생할 것은 명확하다.

인류는 어째서 일순간에 고립적이고 이기적인 개인의 재발명에 이르게 됐는가? 그것은 개인의 능력으로는 절대로 감당할 수 없는 감염병과 같은 공동체의 문제를 구성원들이 함께 해결할 수 있는 메커니즘을 고안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감염병 전쟁은 어떤 걸출한 영웅이 나타나 혼자서 해결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이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다분야 사이의(interdisciplinary) 공동체 운영 설계도다.

세계보건기구(WHO)는 늑장 경고나 내릴 뿐 어떤 예방적, 문제 해결적 설계도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경제주체 원탁회의에서 “방역과 경제 양면에서 아주 엄중한 상황이다…. 저는 연대와 협력의 힘을 믿는다…. 정부의 힘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말했다. 막연히 연대의 ‘힘’만을 기대하는 데서, 국가가 문제 해결에 필요한 다분야 사이의 어떤 설계도도 준비하지 못했음을 읽을 수 있다. 이런 준비 미비 상태는 패닉으로 빠져드는 미국과 유럽연합(EU), 지구촌 공동체도 마찬가지다.

인류가 삽시간에 고독한 전사, 나아가 고독한 전사자로 전락하는, 이런 개인의 ‘재발명’은 거꾸로 ‘공동체’의 새로운 발명이 시급함을 말해준다. 고독한 전사의 수가 늘어날수록 지구촌의 사회경제 체제는 더 빨리 무너질 것이고, 결과적으로 그 개인들마저 일괄 파멸로 이어질 게 명확하다. 그러므로 다분야의 공동체 구성원들이 유기적으로 함께 대처할 수 있는, 새로운 공동체 운영 설계도에 대한 발명이 절실하다. 개인들 간의 물리적 거리 두기 못지않게, 효과적인 공동 대처를 위한 그들 사이의 상호 의존관계를 살리지 못하면, 감염병 전쟁에서 그 개인들마저 승리(생존)할 수 없음을 깨닫는 게 중요하다.

‘지금 이 순간~’(This is the moment), 지구촌의 전 지성(知性)이 나서서 사회적 백신, 곧 문제 해결에 효과적인 다분야 사이의 팀워크 운영이 가능한, 혁신적인 새로운 공동체 운영 디자인을 개발할 때다. 나 자신 그것을 놓고 씨름하기 시작한 지 오래지만…, 고독한 전사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