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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그립습니다 게재 일자 : 2020년 05월 27일(水)
코흘리개들에게 곶감·유과 슬며시 건네줬던 훈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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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대희(1894~1984)

지난달 큰형님 칠순을 맞아 고향을 찾았다. 오랜만에 찾은 고향인지라 여기저기를 산책하던 중, 찾는 이 없어 쇠락해가는 서당이 눈에 들어왔다. 서당 겸 제각이기도 했는데 어릴 적 기억을 따라 건물 구석구석을 살펴보니 한자 현판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정문 현판의 ‘연비어약(鳶飛魚躍·솔개가 날고 물고기가 뛴다)’과 돌비석에 새겨진 ‘광풍제월(光風霽月·맑게 부는 바람과 밝은 달)’ 글자가 코흘리개 때 다녔던 서당 훈장님의 모습과 겹쳐졌다.

1960년대 말 전남 고흥 바닷가마을의 송씨 집성촌 마을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 유치원 대신 집안 할아버지가 훈장으로 계셨던 서당에 다녔다. 서당에서의 세세한 일상은 흐릿한 단편 기억으로만 남아 있지만, 훈장님의 모습은 아직도 사진을 보듯 뚜렷하게 머릿속에 남아 있다. 서글서글한 눈매에 약주를 즐겨 하셔서 볼과 입술은 늘 붉은 기운이 감돌았다. 늘 한복 차림에 탕건을 두르고 버선을 신고, 허연 수염을 길게 쓰다듬으며 장죽을 습관처럼 입에 물고 계셨다. 언뜻 헤아려봐도 족히 80세는 넘으셨던 듯하다.

서당은 사시사철 들판에서 허리 한번 필 새 없이 땀에 절어 살던 부모를 대신해 애들을 돌봐주는 탁아소 역할도 겸했다. 당시에도 한자와 한문은 이미 인기 없는 공부여서 배우려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학생들뿐만 아니라 마을 어른들 사이에서도 한학은 시대에 뒤떨어지는 공부로 치부됐다. 서당은 취학연령 미만의 어린아이들이나 다니는 곳이 돼버렸지만, 부모 입장에서는 돌볼 시간이 없는 어린 자식들에게 주어진 여건에서 뭐든 한 가지라도 가르치는 것이 결코 손해가 아니었을 것이다. 어린아이들은 서당을 다니거나 그냥 산천, 바닷가에서 뛰어놀면 그만이었다.

훈장님은 날씨가 차면 안방에서, 선선하면 넓은 마루에서 한자나 한문을 가르치셨는데 머리가 굵은 학생들도 긴장을 늦출 수 없을 정도로 큰 목소리로 선창하셨다. 건너편 산골짜기까지 쩌렁쩌렁하게 울릴 정도였으며 ‘연비어약’ ‘광풍제월’처럼 자연을 벗 삼아 넓고, 크고, 올바른 기운을 드높일 말을 많이 들려주셨다. 그래도 막둥이인 나같이 어린애들에게는 가끔 곶감이나 유과, 튀밥을 따로 주시는 다정다감함도 있었다. 어머니가 쌀이나 곡식 자루를 들고 훈장 어른댁을 방문한 것은 아마도 수업료였을 듯하다.

부모에게 등 떠밀려 서당 개 풍월 읊듯 배웠던 한자가 40여 년 세월을 훌쩍 지나 지금의 업무에서 요긴하게 쓰이는 걸 보면 배움엔 시기나 경중을 따지는 게 의미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현재 조달청에서 일제강점기 일본인 명의 재산을 국유화하고 환수하는 업무를 하고 있다. 과거 공문서나 토지대장을 수없이 들춰봐야 한다. 소유자를 추적하느라 때론 당시 족보까지 살펴봐야 하는데 이런 서류를 해석하는 데 한문 실력은 필수적이다. 한글 교육만 받은 우리 세대에게는 귀중한 자산을 물려주신 셈이다.

훈장님은 일제 침탈기를 온전히 겪은 분이었다. 지금 그분의 가르침으로 현재까지 남아 있는 일본인 명의 재산을 국유화하는 일에 사용하고 있으니 일하는 중에도 가끔 감개무량해 울컥할 때가 있다. 한자성어를 평소에 자주 언급해 때론 지인들에게 고리타분하다고 핀잔을 듣지만, 훈장님께 배웠던 풍월 덕분에 제각이나 서원에 달린 주련(柱聯)이나 현판을 읽고 선조들의 자연관이나 가치관을 엿보는 즐거움도 느낄 수 있다. 채근담, 명심보감 등 고전에서 주옥같은 글귀를 발견하는 기쁨도 누릴 수 있어서 훈장 선생님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더욱 그립다. 올 시제(時祭)에는 훈장님께 좋아하시던 술 한잔 더 정성스럽게 올려야겠다. 코흘리개들에게 슬며시 건네주시던, 꿈에서도 잊지 못할 그 달달하고 고소한 맛의 유과도 함께.

제자 송명근 (조달청 공공물자국 사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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