男의 시선 벗고… 자신의 벗은 몸 직접 그린 최초의 女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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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있어 황홀하다 | 마리 다리외세크 지음, 임명주 옮김 | 에포크

‘내가 한 번도 보지 못한 유형의 그림이었다. 1906년에 자신의 몸을 이렇게 내보인 여자가 있었을까? 파울라 모더존 베커라는 화가는 어떤 사람일까? 이 여성 화가에 대해 지금까지 왜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을까? 그녀에 대한 글을 읽을수록, 그녀의 그림을 볼수록(수유하는 그림이 여럿 있다. 엄마가 젖을 들고 아이에게 젖을 빨리는 그림은 여성 화가만이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 이 화가에 대해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커졌다.’

프랑스 작가 마리 다리외세크는 독일 화가 파울라의 생애에 대한 책을 쓰게 된 동기를 이렇게 밝혔다. 다리외세크는 책에서 여성 예술가로서의 자의식을 드러내며 파울라와의 연대감을 표현한다.

그는 파울라의 자화상이 있는 폴크방 미술관에 갔다가 목도한 장면을 세세히 전한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술관으로 꼽히는 그곳 상층 밝은 곳에는 남성 작가들의 작품이 전시돼 있는 반면 지하 어두운 방엔 파울라를 비롯한 여성 작가들의 작품이 걸려 있었다. 다리외세크는 여성 화가들이 아직도 이렇게 부당한 대접을 받고 있다는 것을 전함으로써 파울라가 세계 화단에서 정당한 인정을 받지 못했음을 시사한다.

파울라는 31세에 요절했으나, 미술사적으로 중요한 족적을 남겼다. 남성의 시선에서 벗어나 여성이 주체가 돼 여성의 신체를 표현한 최초의 화가였다. 다리외세크는 자신이 처음에 매혹된 ‘누워 있는 엄마와 아기’는 나체로 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엄마의 모습을 성스럽지도, 에로틱하지도 않게 ‘진짜 여자’로 그렸다고 해석한다. 자신의 벗은 몸과 임신한 모습을 자화상으로 그린 파울라는 미술 양식에서 자연주의를 선호했던 동시대 독일 화가들과 달리 큐비즘에 가까운 표현주의를 시도했다. 피카소류의 현대적 회화를 일찍 시작한 것이다.

프랑스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 구절을 제목으로 삼은 책은 파울라가 릴케와 나눴던 우정을 비중 있게 다룬다. 파울라의 가장 친한 친구인 클라라 베스트호프는 로댕에게 조각을 배운 미술가로, 릴케의 아내가 된다. 릴케와 클라라 그리고 파울라의 삼각관계는 우정과 사랑 사이를 넘나드는데, 다리외세크는 그 아슬아슬하고 아름다운 경계를 섬세하게 묘사한다.

이 책은 마리 바시키르체프, 캐슬린 케네트 등 잘 알려지지 않은 중요한 여성 화가를 많이 만날 수 있는 즐거움을 준다. 한국어판에는 원서에는 없던 파울라의 그림 17점을 수록했다. 192쪽, 1만4000원.

장재선 선임기자 jeijei@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