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기, 포커페이스 뒤 뛰어난 통합능력… 유로·伊경제 해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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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eadership 클래스 - 마리오 드라기 이탈리아 총리

ECB 총재시절 글로벌 회의서
‘무제한 국채매입’ 이끌어내
유로존 금융위기 진화 공헌
슈퍼마리오·빅픽처가이 별명
메르켈도 “유럽살린 인물” 극찬

팬데믹으로 伊 휘청거리자
지난 2월 총리로 다시 등판
EU서 기금 269조원 받아와
伊경제위기 타개 일등공신
국민통합 차기 대통령 거론

“유럽중앙은행(ECB)의 임무 안에서 단일화폐 유로를 수호하기 위해 어떤 조치든(Whatever it takes) 기꺼이 취하겠다. 충분한 조치가 될 것이다. 나를 믿어 달라.”

2012년 7월 26일 마리오 드라기 당시 ECB 총재는 영국 런던에서 개최된 글로벌 투자회의에서 이렇게 말했다.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 경제위기가 한창이던 시기였다. 이 발언 후 ECB는 경기 활성화를 위해 막대한 자금을 시중에 풀었고, 경제가 취약한 일부 유로존 회원국의 국채를 자금시장에서 매입하는 계획을 발표했다.

이 같은 무제한 국채매입은 전례가 없는 것이었다. 강렬한 그의 한마디는 결국 금융시장의 폭풍우를 잠재웠다. 이 발언과 뒤따른 정책 효과를 국제 투자자들은 신뢰했다. 이 정책 시행으로 드라기 총재는 ‘슈퍼 마리오’라는 별명을 얻었다. 2019년 드라기가 ECB 총재직을 떠날 때 앙겔라 메르켈 전 독일 총리는 ‘유럽을 살린 인물’이라며 그를 극찬했다. 그리고 민간인 최고의 영예인 공로훈장을 수여했다. 유로존 경제위기로부터 유럽을 일으켜 세운 드라기 리더십에 대한 찬사였다.

◇유로존 구원투수에서 이탈리아의 구원투수로 = 유럽을 구한 뒤 8년 임기를 마치고 퇴임한 드라기 전 ECB 총재가 지난 2월 이탈리아 구원투수로 다시 등판했다. 이탈리아 총리 지명을 수락한 것이다. 그가 총리 지명을 수락한 건 경제위기에 빠진 조국 이탈리아를 구하기 위해서였다. 특히 팬데믹은 이탈리아 경제에 직격탄이 됐다. 지난해 이탈리아의 경제성장률은 무려 -8.9%를 기록했다. 이미 세계 최고 수준이었던 국가 부채는 국내총생산(GDP)의 전년 134%에서 156%까지 치솟은 상태였다.

총리 취임 10개월째, 드라기 총리 취임 후 이탈리아 경제는 순항 중이다. 기저 효과가 있지만 올해 약 5.7% 경제성장률이 예상된다. 외국인 투자자들도 이탈리아의 경제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기 시작했다. 특히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지난해 9월 1.56%포인트에 달하던 10년 만기 독일 연방정부의 국채 분트(Bund)와의 금리 격차(스프레드)가 최근에는 1.25%포인트까지 줄어들었다. 유럽연합(EU)에서 분트는 다른 국가의 국채와 비교가 되는 기준이다. 격차가 좁을수록 외국인들의 신뢰가 높은 채권이라는 뜻이다.

올해 EU로부터 들어온 경제회복기금 2000억 유로(약 269조800억 원)도 드라기 총리의 든든한 실탄이다. 이탈리아는 EU 경제회복기금의 최대 수혜국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ECB 총재로서의 성공적인 활동에 힘입어 세계적으로 높아진 그의 지위가 이탈리아에 대한 국제적 신뢰를 강화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EU 기금을 유치하는 데 드라기 총리의 공이 컸다는 의미다. 영국 경제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이탈리아 경제 회복을) 슈퍼 마리오가 해내지 못한다면 아무도 해낼 사람이 없다”고 강조했다.

◇차가운 기술 관료? 설득의 힘 가진 ‘빅픽처 가이’= 드라기 총리는 1947년 9월 3일 로마에서 태어났다. 15세 때 짧은 간격으로 부모를 여의고 일찍 철이 들었다고 한다. 피렌체대와 세계은행(WB)을 거쳐 1990년 이탈리아 재무부 국장에 취임했다. 이후 골드만삭스에 잠시 몸담은 뒤 이탈리아 중앙은행 총재와 ECB 총재를 지내며 냉철한 경제위기 관리자로 경력을 쌓아 나갔다. 그는 유럽에서 대표적인 기술 관료로 받아들여진다. 그를 잘 아는 한 은행가는 독일 주간지 슈피겔에 “그는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는 포커페이스다. 무표정한 얼굴만 봐서는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 수가 없다”고 말했다.

차가운 기술 관료지만 설득과 통합의 리더십도 갖췄다. 그는 유로존 위기 때 양적완화와 같은 급진적 정책 변화의 근거를 마련하는 과정에서 유로존 내 매파들과 치열하게 싸웠다. 특히 자신을 비판하는 독일 중앙은행 분데스방크의 옌스 바이트만 총재와 시종일관 긴장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결국 그는 유로존 내 매파들을 설득해냈다. 2012년 그가 무제한 국채매입을 발표했을 때 독일은 즉각 지지를 발표했고 시장의 패닉을 잠재울 수 있었다. 슈퍼 마리오라 불리는 드라기 총리의 또 다른 별명인 ‘빅픽처 가이(Big Picture Guy·큰 그림을 그리는 사람)’의 진면목이 드러난 순간이었다.

드라기 총리의 리더십은 현재 좌우 동거 내각을 무리 없이 이끌고 있다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드라기 총리가 이끄는 내각에는 ‘오성운동’ 및 ‘민주당’과 같은 중도좌파는 물론이고 반이민, 반이슬람과 반유로를 앞세웠던 포퓰리스트 우파 정당 ‘동맹’도 참여해 있다. 상·하원 의석수로 따지면 전체 90%가 넘는다. 이처럼 의회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는 내각은 공화국 수립 후 이탈리아 정치 역사상 처음으로 평가된다. 최근 드라기 총리는 내년 2월 선출되는 차기 이탈리아 대통령으로도 거론되는데, 그가 대통령직을 맡고자 물러날 경우 좌·우파 정당들이 차기 총리 인선을 놓고 ‘진흙탕 싸움’을 벌일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가 벌써 흘러나온다. 그만큼 그가 이탈리아 총리로서 중심추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는 얘기다.

◇차기 대통령으로도 거론…드라기만 한 인물이 없다’= 그럼에도 정치권에서는 드라기 총리를 현 세르조 마타렐라 대통령의 후임으로 가장 많이 거론하고 있다. 경륜과 국가기여도 등 여러 측면에서 국민통합의 상징인 대통령직에 적임자라는 평이다. 특히 또 다른 대통령 후보로 물망에 오른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전 총리와 비교하면 더욱 그렇다. 베를루스코니 전 총리는 ‘이탈리아 정계의 추문제조기’라는 별명에서 드러나듯 여러 비리와 성추문에 연루됐다. 현재도 관련 재판을 받고자 법정을 드나드는 처지다.

1948년 이탈리아 공화국 수립 이래 전직 총리가 대통령 후보로 추천된 경우는 종종 있었으나 현직 총리로는 전례가 없는 일이다. 이 때문에 그가 어떤 선택을 할지 정치권 안팎의 관심이 크다. 사실 국민 여론은 드라기 총리가 임기인 2023년까지 총리직을 수행하기를 원하는 목소리가 더 높다. 국민이 그를 이탈리아 경제를 살려낼 적임자로 평가하기 때문이다. 대통령직에 대한 드라기 총리의 의중은 명확히 드러나지 않았다. 언론의 관련 질의에 드라기 총리는 “현재 역할에 충실할 것”이라는 답변을 반복하고 있다.

임정환 기자 yom724@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