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지난 3일 러시아군의 총알이 우크라이나 남부 도시 마리우폴의 한 병원 유리창을 관통한 모습. 마리우폴은 2014년 러시아가 무력으로 흡수한 크름(크림)반도와 친러 분리주의 세력이 독립을 선언한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 지역을 잇는 요충지로, 침공 초반부터 러시아군의 집중포화를 받으면서 최소 2500여 명의 민간인이 희생됐다. AP연합뉴스
■ 글로벌 포커스 - 러, 우크라 침공 22일째… 끈끈해진 EU
민주주의 위협 ‘유럽판 9·11’
러시아산 가스에 의존하는 獨
우크라에 미사일 등 무기지원
EU 자체 집단안보체제도 논의
스웨덴·핀란드, 나토 가입 고심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모든 것을 바꿔 놓았다. 침공 22일째인 17일 현재 우크라이나의 거의 모든 주요 시설은 파괴됐고, 우크라이나 국민의 정상적인 삶은 무너졌다. 혼란 속에 기름값과 곡물 가격은 잇따라 치솟고 있다. 냉전이 종식된 이후 유럽 안보 질서에 가장 큰 파열을 일으킨 이번 사태를 두고 ‘유럽의 9·11 테러’라는 말도 나온다. 침공이 시작된 2월 24일, 모두가 놀랐지만 바로 옆 국가에 포탄이 연이어 떨어지는 것을 목격한 유럽 국가들은 특히 큰 충격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전문가들은 이번 일이 유럽에 일종의 ‘각성제’가 됐다고 분석한다. 이번 사태로 유럽은 어떻게 변화했으며 향후 어떻게 움직일까.
◇“유럽이 깨어났다”…독일의 ‘유턴’ 눈길=뉴욕타임스(NYT)는 최근 “유럽이 깨어났다”고 보도했다. 유럽연합(EU)은 사실 굉장히 분열된 조직이다. 수세기 동안 서로 싸웠고, 경쟁적인 이해와 가치를 가지고 있는 국가들로 구성돼 있다. 2016년 브렉시트(영국의 EU 탈퇴)는 그 분열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보여 줬다.
그러나 EU는 이번 일 앞에서 단합했다. 유럽에서의 전쟁을 막는다는 자신들의 기본적 목표 중 하나를 실패했다는 사실에 직면한 유럽 지도자들이 이번 사태 앞에서 단합된 모습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전 세계 민주주의 상황을 추적하는 프리덤하우스의 마이클 어브래머위츠 대표는 “민주 국가들과 지도자들은 민주주의의 중요성과 강력함에 대한 단합된 메시지를 러시아에 보내고 있다”고 말했다.
독일의 변신은 특히 놀랍다. 러시아산 가스에 크게 의존하는 독일은 그동안 우크라이나 사태에서의 소극적인 대응으로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 전선의 ‘약한 고리’로 평가받았지만 침공이 현실화하자 대전차 무기 1000정과 지대공 미사일 스팅어 500기를 우크라이나에 공급한다고 밝혔다. 네덜란드와 에스토니아가 독일제 및 구동독산 무기를 우크라이나에 공급하는 것도 승인했다. 앞서 독일은 우크라이나의 무기 공급 요청에 분쟁 지역으로 살상 무기를 보내는 것에는 엄격한 절차가 필요하다며 보류해 왔다. 이와 함께 독일은 군비 증강에도 착수했다.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는 독일군 현대화를 위해 올해 특별 연방군 기금을 설립, 1000억 유로를 투입하며 앞으로 해마다 독일 국방부 지출을 국내총생산(GDP)의 2% 이상 수준으로 늘리겠다고 발표했다.
◇“당연하지 않은 평화” 목격에 유럽 안보 논의 활발=독일이 국방비 지출을 늘리겠다고 발표한 뒤 오스트리아와 덴마크, 스웨덴도 이를 따랐고 더 많은 유럽 국가가 비슷한 메시지를 낼 것으로 전망된다. 바로 옆 국가에서 벌어지는 일에 놀란 유럽 국가들은 더 많은 전쟁을 막기 위해 큰 군사력을 필요로 하게 된 것이다. 유럽의회 외교관계위원회의 수석정책위원인 자나 퍼글리린은 “평화는 당연하게 여겨졌지만 이제 더 이상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주장하는 자체적 집단안보체제에 대한 논의도 시작되는 분위기다. 미국의 싱크탱크 유라시아그룹의 에머 페커 이사는 “EU는 전략적 자율성에 대한 시험 무대에 올랐다”며 “나는 여전히 EU 군대를 예상하지 않지만 논의는 진전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 과정에서 오는 4월 대통령 선거에서 재선에 도전한 마크롱 대통령이 혜택을 볼 가능성도 제기됐다. 무타바 라흐만 유라시아그룹 유럽 전문가는 “우크라이나 전쟁은 프랑스 대선에 강력한 영향을 미칠 것이며 마크롱 대통령의 재선 가능성은 더욱 높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유럽 방위의 중추로서 ‘나토’의 입지가 더욱 확고해질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칼럼니스트 폴 테일러는 미 정치전문 매체 폴리티코에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냉전 종식 이후 유럽 안보 질서의 가장 큰 파열이다. 이 위기는 나토를 유럽 방위의 확고한 중추로 강화시켰다”며 “이 갈등으로 새로운 나라들이 나토의 군사적 우산 아래를 피란처로 삼고 싶어 할 수 있다”고 밝혔다. 실제로 EU 회원국이나 나토에 가입돼 있지 않은 스웨덴과 핀란드는 냉전 종식 후 나토에 가입하지 않기로 했지만,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나토 확대 중단을 요구한 이후 나토 가입 옵션을 계속 열어 두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유럽 안보 전문가 랄루카 체르나토니는 “이전까지의 유럽은 분열되고 약하며 모호한 것으로 묘사됐으나 이번 사태는 EU의 안보와 국방 논쟁을 다시 활성화시켰다”며 “소프트파워에 의해 형성된 안보 질서는 다시 하드파워에 의한 것으로 바뀌고, 이번 일은 그 촉매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강력한 후폭풍 예상…문제는 유럽 시민의 희생=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16일 미국 의회 연설에서 “무고한 시민들이 하늘로부터 공격받던 2001년 9월 11일 끔찍한 하루를 기억하라. 우리나라는 지금 매일 9·11 테러를 겪고 있다”고 말했다. 민주주의를 향한 폭격이라는 점에서 유사해 보이지만 그 후폭풍은 이번 일이 훨씬 클 수 있다. 9·11 테러 이후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을 벌였고 오사마 빈 라덴을 사살했지만, 이번의 적수는 알 카에다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다.
문제는 앞으로의 일이다. 에너지 가격 상승과 인플레이션이 가계를 강타하고 있는 상황에서 푸틴 대통령이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막는 것은 유럽 시민의 더 큰 희생을 의미한다. 러시아산 가스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면 그만큼 비용이 발생하고, 국방비 지출 역시 증가할 것이다. 이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벌써 나오고 있다. 로베르트 하베크 독일 경제기후장관은 13일 독일 공영방송 ARD 인터뷰에서 “러시아 가스와 석유 수입을 갑작스럽게 끊으면 푸틴 대통령보다 독일 국민이 더 다칠 것”이라고 우려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한 분노는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희생을 감수할 준비가 돼 있느냐는 별개의 문제일 수 있다는 얘기다.
박세희 기자 saysay@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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