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비야, 단풍이 참 곱구나” 하시던 어머니…가을밤엔 더 떠올라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 그립습니다 - 송귀순(1913∼2000)

“애비야, 봄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가을이구나. 잠깐 차를 세우고 뒤 창문을 열어다오.”

어머니 소천하시기 두 달 전인 11월 중순, 화창한 늦가을 오후였다. 오랜만에 바람을 쐬게 해 드리려고 과천 현대미술관으로 가는 오솔길을 드라이브하던 날이었다. 지난 4월에도 휠체어에 어머니를 모시고 하얀 눈송이처럼 내리던 벚꽃 잎을 손에 잡아보았던 그 언덕길이었다.

계절은 어머님의 병세처럼 빠르게 변해 봄에서 금방 건너뛰어 깊은 가을이 되었다. 무성하던 나무들은 겨울비처럼 우수수 잎을 떨구고 있었다. 언덕길은 이미 샛노란 단풍잎으로 고급 카펫이 깔린 듯했다. 휠체어에 어머니를 모시고 낙엽 지는 숲속 길을 걸었다. 어머니는 정성스레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듯이 무언가 중얼거리셨다. 몇 달 후 이승을 영원히 떠날 것을 예견하셨던가.

어머니의 치매 병세도 하루가 다르게 깊어갔다. 말씀도 잘 못 하시고 내가 누구냐고 물어보면 초점 잃은 눈빛으로 “오빠”라고 대답해 지켜보는 가족들을 더욱 애타게 했다. 드라이브 나왔던 날 오전까지도 의식은 혼미 그 자체였다. 그랬던 어머니가 낙엽 지는 오솔길에서 갑자기 말문이 트여 또렷한 어조로 “오메, 단풍이 참 곱다” 하시며 차를 세우라 하셨다. 오랜만에 정확한 어머니의 표현에 내 귀를 의심하였다. 환청을 들은 것은 아닐까 하며 자동차 문을 열어드리니 손을 내밀어 낙엽을 받아보려고 애쓰셨다. 마침내 노란 단풍잎 두세 개가 차창 안으로 날아와 어머니 무릎에 내려앉았다. 어머니는 무심코 단풍잎을 손에 쥐고 다시 긴 침묵에 들어갔다.

야외 미술관 잔디 옆 호젓한 벤치에서 11월 양광을 즐기며 손이며 어깨를 주물러드리니 어린아이처럼 좋아하셨다. 어머니는 가끔 정상인 못지않게 정확하게 표현해 나를 깜짝 놀라게 하곤 했다. “애비야, 해가 참 좋구나. 이런 날 김장 고추가 참 잘 마르겠다.” 동문서답 같은 말씀과 함께 아무 말 없이 내 손을 꼭 잡으며 가을 하늘을 올려 보았다. 어머니의 손등은 핏줄이 선명하게 드러날 정도로 앙상하게 마르고 손가락은 힘이 없었다. 그러나 그 손에서 느끼는 따스함은 어렸을 적 어머니 품속 그대로였다.

이젠 뇌경색에 치매 증세까지 겹쳐 매일 힘든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큰형님 집에 갈 때면 나는 손수 목욕을 시켜드렸다. 목욕 후 정성스레 유아용 파우더를 바른 후 손발톱을 깎아드리고 욕창 부위도 정성스레 치료해드리면 이내 아기처럼 환한 표정이었다.

어렸을 적에는 나를 품 안에 기르며 목욕을 해 주었듯이 이젠 내가 어머니를 내 품에 안아 드린다. 무릎 위에 안고 조용히 가슴을 도닥거리면 어머니는 아기같이 스르르 잠에 빠져든다. 내 무릎 위에서 잠든 어머니 모습을 볼 때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슬픔에 눈물이 흐른다. 불가의 윤회, 생로병사라는 말이 허무하게 내 가슴을 파고든다.

병석에 눕기 전에는 어머니의 넉넉한 품은 우주보다 넓고 그 어떤 중력보다 무거운 절대적인 존재였다. 그러나 이제 앙상한 육신이 되어 새털보다 더 가벼운 무게로 내 가슴 안에 안겨 있다. 볼에 입을 맞추고 귓가에 조용히 어머니를 불러본다. 이내 지그시 눈을 뜨고 막내아들의 체온을 느끼며 인자한 눈빛으로 나를 응시한다.

올해도 그 미술관 오솔길은 어김없이 진노란 카펫 길이 될 것이다. 지난주에는 과천에 사는 딸 집에서 돌아오는 길에 일부러 미술관 쪽으로 차를 돌려 그 길을 둘러보았다. 차를 세우고 무심코 뒷좌석을 돌아보았다. 휑하니 자동차 뒷좌석은 비어있고 어머니 목소리만 환청처럼 들릴 뿐이다. “애비야, 단풍이 참 곱구나.”

어머니 가신 지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23년이 지났다. 오늘 밤은 유난히 풀벌레 소리가 요란하다. 문득 단풍으로 뒤덮인 과천 미술관 오솔길을 떠올리니 오늘 밤엔 유난히 어머니가 무척 그립다.

윤여경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그립습니다·자랑합니다·미안합니다’ 사연 이렇게 보내주세요

△ 이메일 : phs2000@munhwa.com　
△ 카카오톡 : 채팅창에서 ‘돋보기’ 클릭 후 ‘문화일보’를 검색. 이후 ‘채팅하기’를 눌러 사연 전송　
△ QR코드 : 독자면 QR코드를 찍으면 문화일보 카카오톡 창으로 자동 연결　
△ 전화 : 02-3701-5261

▨ 사연 채택 시 사은품 드립니다.
채택된 사연에 대해서는 소정(원고지 1장당 5000원 상당)의 사은품(스타벅스 기프티콘)을 휴대전화로 전송해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