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을 사랑한 이방인… 100년 수성못에 ‘화해의 꿈’ 담다[박경일기자의 여행]

  • 문화일보
  • 입력 2023-04-20 09:09
  • 업데이트 2023-04-20 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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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대구의 상징과도 같은 수성못. 수변을 끼고 버드나무의 신록이 한창이다. 농업용수 공급을 위해 축조됐지만 지금은 시민들의 휴식공간과 관광지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팔공산, 서문시장 등과 함께 ‘대구 12경(景)’ 중의 하나다.



■박경일기자의 여행 - ‘역사의 기억’ 간직한 대구

1927년 日미즈사키 주도로 만든 ‘수성못’ … 분쟁 없이 운영
인근에 묫자리 유언… 한일친선교류협 주관 추도식 가져와

“인의의 나라 공격 못해”… 왜장 사야가 뿌리 내린 우록동
임란때 투항해 왜군에 맞서… 조선 조정 ‘김해 김씨’ 하사

明원병 왔다 정착 두사충… 거처한 대명동 現 ‘지역 최대 洞’
풍수지리 안목 눈길… 교분 나눈 이순신 장군, 시 지어 줘


대구 = 글·사진 박경일 전임기자 parking@munhwa.com

대구의 상징과도 같은 수성못. 수변을 끼고 버드나무의 신록이 한창이다. 농업용수 공급을 위해 축조됐지만 지금은 시민들의 휴식공간과 관광지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팔공산, 서문시장 등과 함께 ‘대구 12경(景)’ 중의 하나다.

여행은 때로 ‘뒤돌아보는 일’입니다. 여행자의 시선은 미래나 현재보다는 과거를 향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연은 물론이고, 건축과 공간을 더 깊고 특별하게 만드는 건 다름 아닌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현실감이 느껴지는 가장 먼 과거는 ‘근대’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근대로 떠나는 여행은 다소 불편합니다. 근대의 시간과 공간에 식민지 참상이나 수탈의 현장이 겹쳐져서 그렇습니다.

빛바랜 그 시절 흑백사진이 증거 하는 건 얼마나 많은 쌀을 공출로 실어내 갔는지, 일제의 폭정과 탄압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그런 세상에서 목숨 부지하고 살기가 얼마나 어려웠는지 같은 것들입니다. 그런데 여기 대구만큼은 다릅니다. 대구에는 ‘자랑스러운 근대’가 있습니다. 그 이유의 팔 할은 관련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된 국채보상운동, 그리고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이상화 시인에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서릿발 같은 정신과 결기가 있었습니다만, 그렇다고 대구에 늘 저항과 투쟁만 있었던 건 아닙니다. 대구 땅에 잠들어 있는 두 명의 일본인이 그걸 보여줍니다. 한 명은 일제 강점기에 건너왔고, 다른 한 명은 시간을 거슬러 왜란의 시대를 살았던 일본인입니다. 정유재란 때 출병했다가 눌러앉아 조선사람이 된 명나라 병사 이야기도 슬쩍 끼워 넣었습니다. 기꺼이 조선 땅으로 건너와 목숨을 묻은 그 셋을 따라가는 여정입니다. 따라가는 건 이야기이지만, 지루하지는 않습니다. 그들의 자취가 남겨진 곳들이 이미 명소이거나, 명소가 되고도 남을 만한 곳이어서 여행의 길잡이로도 훌륭한 까닭입니다.

새삼 이 얘기를 꺼내 보기로 했던 건, 이웃 나라와의 관계가 이미 위태로운 정치적 발화점이 돼버린 작금의 상황 때문입니다. 결론은 저마다 달라도 좋습니다만, 그래도 고민은 같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photo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수성못에 세워진 시인 이상화의 흉상과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시비.



# 봄의 정취가 가득한 곳…대구 수성못

신록이 시작되는 이즈음, 대구에서 만춘의 정취를 흠뻑 느낄 수 있는 곳이 ‘수성못’이다. 벚꽃은 일찌감치 졌지만, 못 주변에는 버드나무의 신록이 한창이다. 푸른 물빛과 어우러진 연두색 신록이 곱다. 해질 무렵의 수변 정취와 봄밤의 야경은 또 얼마나 근사한지. 수성못이 가장 아름다운 때는 바로 지금이다.

일제강점기에 농업용 저수지로 만들어진 수성못은 도시화로 쓸모를 잃었다가 50년 전쯤 유원지로 탈바꿈했다. 도시 개발 광풍에 쓸모 없는 못은 메워져 택지가 됐지만 일찌감치 유원지로 지정된 덕에 수성못은 용케 살아남았다.

그 시절 대구에서 여가를 즐길 만한 곳이라고는 수성못과 동촌유원지, 달성공원 정도였다. 유원지래 봐야 작고 낡은 유람선 몇 척과 오리배, 그리고 누추한 시설의 놀이공원이 고작이었다. 겨울에는 스케이트를 탔다. 그 시절을 추억하는 이들이 수성못과 함께 떠올리는 건 말표 사이다, 파란풍차표 카스텔라, 삼립표 단팥빵 같은 것들이다.

밤이면 수성못 둑을 따라 전국 최대 규모의 포장마차촌이 들어서 흥청거렸다. 주변에도 막걸리집 등 허름한 음식점들이 들어섰다. 너나없이 고단했던 시절, 수성못은 대구 사람들의 휴식과 주머니 가벼운 이들의 유흥 공간이었다.

수성못은 지금 대구 시민들의 평화로운 휴식처이자 근사한 자연공원이면서 대구를 대표하는 관광지다. 못 주변에 둘레길이 놓이고 잔디광장과 맨발 산책로, 조망 덱과 전망대, 수변 무대, 음악 분수를 들여놓았다. 못 한쪽에는 시문학거리를 조성했고 둘레길 곳곳의 작은 무대에서는 밤바다 버스킹이나 비보이 공연을 연다.

말끔히 단장한 새로운 공간도 훌륭하지만, 가장 근사한 건 역시 ‘시간’이 만든 풍경이다. 수성못 북서쪽 끝에 수령 100년을 헤아리는 아름드리 버드나무 두 그루가 있다. 수성못을 축조할 때 심었던 나무 가운데 살아남은 두 그루다. 둥치를 뒤틀고 서 있는 버드나무 가지에는 새로 돋은 연초록 이파리들이 달렸다.

photo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헐린 대구읍성의 남문을 복원한 영남제일문.



# 못이 보이는 자리에 묻어달라는 유언

번듯한 음식점이며 분위기 있는 카페들이 몰려 있는 수성못 남쪽 야트막한 산자락 아래에는 한 일본인의 묘가 있다. 미즈사키 린타로(水崎林太郞). 일제강점기 당시 수성못 축조에 앞장섰던 일본인이다. 일본 기후(岐阜)현의 말단 공무원 출신으로 중의원 선거에 출마했다가 낙선하면서 가산을 탕진해 1915년 개척농민 자격으로 대구로 건너왔다.

그는 빈손으로 대구에 와서 자신의 이름을 딴 ‘미즈사키 농원’을 차리고 대규모 화훼농장을 운영했다. 만주까지 꽃을 수출하는 등 승승장구하던 그는, 급작스러운 대구의 인구 증가로 농업용수가 부족해지자 조선인 4명과 함께 수리조합을 결성하고 저수지 축조를 추진했다. 저수지 축조에 든 막대한 비용을 지원받기 위해 총독부를 설득하는 데 일본인인 그의 역할은 클 수밖에 없었다.

현대적인 관개시설을 갖춘 수성못은 착공 10년 만인 1927년 완공됐다. 수성못이 만들어지면서 농민은 물 걱정 없이 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 완공 이후에도 줄곧 수성못 관리인으로 일했던 미즈사키는 1939년에 세상을 떴다.

그가 남긴 마지막 유언은 ‘조선식으로 장례를 치르고 수성못이 보이는 자리에 묻어달라’는 것이었다. 수성못이 가까이 내려다보이는 야트막한 언덕 아래 그의 묘가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유다.

해마다 수성못의 벚꽃이 만개할 무렵이면 미즈사키의 묘 앞에서 추도식이 열린다. 한일친선교류협회가 주관하는 추도식은 코로나19로 중단됐다가 지난 7일 3년 만에 열렸다.

이날 추도식에는 한일친선교류협회 회원과 미즈사키의 고향인 일본 기후현에서 온 관계자, 그리고 부산주재 일본 총영사가 참석했다. 대구 수성구는 친일 시비 논란으로 수년 전부터 추도식에 참여하지 않고 있다.

미즈사키 추도식을 문제 삼는 이들도 있다. 수리조합이 수성못 공사비를 17년 만에 다 상환할 수 있을 만큼의 수세(물값)를 농민들로부터 받았다는 걸 지적하기도 하고, 수성못 축조의 이익이‘소수의 친일 지주’에게 돌아갔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수성 수리조합의 전체 조합원 436명 중 조선인은 414명으로 압도적인 다수였다. 일제의 비호를 받은 일본인 대지주의 특혜로 만들어진 다른 수리조합의 경우와는 좀 달랐다는 얘기다.

이에 맞서 수성못에서는 수세 징수 등을 둘러싼 조합원의 분쟁이나 반대운동이 한 번도 없었고, 해방 후에도 그의 묘가 잘 보전되고 있다는 것만 봐도 그에 대한 평판을 짐작할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정치적 견해나 입장, 그리고 시선에 따라 평가는 달라진다. 과연 그의 묘를 어떻게 봐야 할까.



# 투항한 왜군이 왜병의 머리를 베다

“‘나를 이렇게 만든 건 저놈이다. 모든 불행과 모든 악은 저놈 탓이다’하는 식의 자기 자신을 빼버리는 논의는 칼날같이 날카롭고, 또한 100% 옳기도 하나 날카로움과 옳음이 반드시 생산적인 것은 아니다.”

‘일본의 국민작가’라 일컬어지는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가 1971년 한국을 다녀간 뒤에 쓴 기행문 ‘한나라 이야기’의 한 대목이다. 한국인에게 ‘일본에 대한 무한한 불쾌감과 원한’이 사무쳐있을 수밖에 없다는 걸 그는 이해했다.

하지만 흔쾌히 동의할 수 없는 건 그가 이런 원한을 ‘생산성’의 가치로 쟀다는 것이다. 사무친 원한을 푼다면 때로는 ‘소모’가 더 필요하거나 유익할 때도 있는 법 아닌가.

photo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우록동 입구의 사슴 조형물.



책 속의 문장은 그가 대구 달성군 가창면 우록동을 찾아가는 길 위에서의 감상을 말하는 대목에서 나온다.

‘우록(友鹿)’이란 마을 이름은 ‘사슴과 벗한다’는 뜻이다. 그가 우록동을 찾아간 건 정유재란 때 투항한 왜군 선봉장 ‘사야가(沙也可)’의 자취를 찾기 위해서였다.

사야가는 임진왜란 때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휘하의 사무라이 출신 선봉장이었다. 임진왜란의 선봉 부대를 이끌고 부산포에 상륙한 스물한 살의 무사는 불과 사흘 만에 3000명의 부하를 이끌고 조선에 투항했다. 단 한 번의 전투도 치르지 않은 항복이었다. 그러고는 말 머리를 돌려 조선의 편에서 왜군과의 전투에 나서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그는 무기의 열세로 고전하고 있던 조선군에 조총과 화약 제조법을 가르쳤으며 경주에서는 왜군 300여 명을 참살했고, 왜군에 함락된 18개 성을 되찾아오기도 했다. 이괄의 난 때도 이괄의 오른팔 서아지의 목을 베는 공을 세웠다.

예순여섯의 나이에도 칼을 들어 병자호란 중 최대의 패전으로 꼽히는 쌍령전투에 나가 패주 대열의 후열을 끝까지 지키며 청의 군사를 막아내 조선군의 전멸을 막기도 했다.

조선 조정은 이런 사야가를 가상히 여겨 정2품인 자헌대부 벼슬을 제수하고, ‘김해 김씨’ 성(姓)과 충성스럽고 착하다는 뜻의 ‘충선(忠善)’이란 이름을 내렸다.

임금이 내린 약이 ‘사약(賜藥)’이고 임금이 내린 편액이 ‘사액(賜額)’이듯, 임금이 내린 성은 ‘사성(賜姓)’이다. 그래서 김충선의 본관은 ‘사성 김해 김씨’가 됐다. 그렇게 조선 땅에 뿌리를 내린 사야가, 아니 김충선은 대구 달성의 우록동에 터를 잡고 대를 이었다. 우록동에는 여전히 사성 김해 김씨의 집성촌이 자리잡고 있으며, 그 후손들이 18대까지 이어져 전국에 2500가구·7500여 명에 이른다.

photo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대구 달성의 녹동서원.



# 천하의 매국노, 평화주의자가 되다

일본은 오랫동안 사야가의 존재를 부인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일본 입장에서는 조국을 배반하고 적의 편에서 전쟁의 선봉에 섰던 셈이니 왜 안 그랬을까.

조선왕조실록에 기록이 있고 사야가의 문집이 있는데도 일본 학자들은 ‘매국노가 동포 중에 있다는 사실을 믿는 이가 있는 것은 유감 중의 유감’이라고 했을 정도로 증오했다. 심지어 ‘조선이 꾸민 자작극’이란 얘기까지 나왔다.

이런 분위기를 확 바꿔놓은 것이 앞서 말한 일본 작가 시바 료타로가 쓴 책 ‘한나라 기행’이었다. 시바 료타로, 그는 기록을 뒤져가며 사야가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사야가가 죽은 지 150여 년이 지난 뒤 후손이 정리해 펴낸 문집이어서 곧이곧대로 다 믿을 수는 없는 일이지만 ‘모하당 문집’에는 사야가가 조선에 투항한 이유가 명확하게 나와 있다.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벌인 임진왜란이 ‘명분 없는 전쟁’이라는 것. 그리고 조선의 의관 문물이 예의가 있고, 조선은 인의(仁義)의 나라여서 감히 해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문명에 대한 동경’으로 일본을 버리고 조선에 종군하게 됐다는 얘기였다. 사야가가 스스로 지은 ‘모하당(慕夏堂)’이란 호도 ‘중국 문헌의 최초 세습왕조 나라인 하(夏)나라를 사모한다’는 뜻으로 붙인 것이다.

시바 료타로가 책에서 우록동을 소개한 뒤에 사야가는 재조명됐다. 일본에서 사야가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이 나왔고, 일본 NHK방송은 ‘출병에 대의 없다-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배반한 사나이 사야가’란 TV 다큐멘터리를 제작해 방영했다. 줄곧 ‘천하의 매국노’로 치부됐던 사야가가 국적을 초월해 명분 없는 전쟁을 거부했던 행적을 통해 ‘위대한 평화주의자’로 새롭게 조명을 받게 된 것이었다.

사야가에게 조명이 쏟아지면서 그가 누구인지에 대해 관심이 쏠렸다. 그런데 그의 일본에서의 행적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사야가라는 이름부터 일본인의 이름이 아니었으니 이름은 단서가 될 수 없었다. 그는 죽을 때까지 본명이나 출신지에 대해 단 한마디도 말하지 않았다. 일본 땅에 남겨놓고 온 가족을 생각했다면 그럴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는 누구였을까. 임진왜란 와중에 일본의 진중에서 갑자기 사라진 여러 인물이 물망에 올랐지만 아직도 결론은 내려지지 않았다.

우록동은 ‘사야가를 빼놓고도 가볼 만하다’고 쓸 수 있을 정도는 아니지만, 아늑하고 평안한 느낌이 인상적이다. 공간은 느슨하고 마을은 조용해서 살고 싶은 느낌이 절로 들었다. 우록마을에는 사야가, 아니 김충선을 배향한 녹동서원이 있고, 서원 옆에는 2012년 문을 연 한일우호관이 있다. 뜻밖에 전시품이나 구성이 제법 짜임새 있는데 문화해설사로부터 자세한 해설도 들을 수 있다.

우록동 주변에는 함께 돌아볼 수 있는 곳들이 제법 있다. 남지장사와 청련암, 백련암, 한천서원, 포레스트 스파밸리 같은 곳들이다.

# 종전 후 이 땅에 남다…두사충

사야가가 정착한 지 몇 년 뒤에 대구에 뿌리를 내리고 살다 죽은 명나라 사람이 있었다. 풍수지리 전문가 두사충(杜師忠)이다. 임진왜란 때 조선은 명나라에 원병을 요청했는데, 그는 그때 이여송 장군과 함께 처음 조선 땅에 발을 디뎠다. 그가 전쟁에서 맡았던 건 지세에 맞게 병영과 진을 구축하는 임무였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고향으로 돌아갔던 그는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다시 조선에 왔다. 이번에는 두 아들까지 대동한 채였다.

이순신 장군의 파트너였던 명나라 진린(陳璘)의 처남인 두사충은 이순신과 교분을 나눴다. 한산도에서 이순신을 처음 만났고, 노량해전에 참전해 함께 싸우기도 했다. 이순신이 두사충에게 친히 써 준 시도 있다. 그때 지어준 이순신 장군의 시는 두사충을 기리는 재실 ‘모명재(慕明齋)’의 기둥에 주련으로 걸려 있다. ‘모명(慕明)’이란 ‘명나라를 그리워한다’는 뜻으로 두사충의 호이기도 하다.

주련으로 걸린 이순신 장군의 시를 읽어보자. “북으로 가면 고락을 같이하고 / 동으로 오면 생사를 함께 하네 / 성 남쪽 타향의 달빛 아래서 / 오늘 한 잔 술로 정을 나누네.” 모명재 앞 소공원에는 시에 나오는 이순신과 두사충이 ‘한 잔 술로 정을 나누는’ 장면을 동상으로 재현해 놓았다.

전쟁이 끝난 뒤 두사충은 진린에게 “매부는 황제의 명을 받은 사람이니 돌아가야 마땅하겠지만 나는 이곳에 남겠다”며 진린을 압록강까지 배웅한 뒤 돌아와 대구에 정착했다.

그는 대구 계산동에서 살다가 지금의 대명동으로 거처를 옮겼다. 대명(大明)이란 지명도 명나라를 떠올리며 그가 지은 것이라고 전한다. 대명동에서 그는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명나라를 향해 예를 올렸다. 대명동은 대구에서 가장 큰 동(洞)이다. 자그마치 11동까지 있는 대명동은 대구 남구 면적의 60%를 차지할 정도로 크다. 그걸 두고 평생 풍수를 연구한 두사충의 안목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명나라를 그리워하면서도, 그는 왜 돌아가지 않고 조선에 남았던 것일까. 당시 명나라의 정세는 심상찮았고 국운은 날로 쇠퇴하고 있었다. 그는 명의 멸망을 예측했고 뒤따르는 역사적 격랑을 피하고자 했다. 명은 멸망했지만 그의 예측은 빗나갔다. 명이 무너지고 청나라가 세워진 건 두사충이 세상을 떠나고 50년이나 지난 뒤였던 것이다.

두사충은 수성구 만촌동 형제봉 아래 묻혔다. 두사충은 자신의 본향인 두릉을 본관으로 해서 ‘두릉 두씨’의 대를 이었다. 두사충의 후손은 100여 가구에 500여 명이다.

만촌동에는 두사충의 재실 모명재와 두사충의 묘, 그리고 두사충의 7대손 두한필의 묘와 그의 효행을 기리는 명정각이 있다. 모명재 앞에는 2019년 문을 연 동의보감 음식과 다례 등을 체험할 수 있는 한국전통문화체험관이 있다. 대구 도심과 가까운데도 여간 호젓하지 않아 과거로 돌아간 듯한 느낌을 주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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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의 영남제일문

대구에는 식민지 근대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곳들이 많다. 남아있는 그 시절의 공간도 있지만, 사라진 것을 복원한 곳들도 있다. 대구읍성의 남문이었다가 망우당공원 언덕 위에 복원한 ‘영남제일문’도 그런 곳이다. 대구 군수 겸 경북 관찰사 서리였던 친일파 박중양에 의해 헐린 영남제일문은 사라진 지 73년만인 1980년 망우당공원 언덕에 다시 지어졌다. 본디 있던 자리도 아니고, 건물의 형태와 크기도 달라 복원이라기보다는 상징처럼 지어진 곳인데 여기에 오르면 대구 동구와 수성구 일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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