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대가리에 쌓인 50m 높이 모래언덕… 유배·표류의 아픔까지 보듬어준 섬[박경일기자의 여행]

  • 문화일보
  • 입력 2023-06-01 09:03
  • 업데이트 2023-06-01 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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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전남 신안군 먼바다의 섬 우이도의 거대한 모래언덕은 파도와 바람의 합작품이다. 파도가 밀고 온 모래를 바람이 옮겨다 놓았다. 모래언덕 너머로 보이는 마을이 우이도 돈목마을이다.



■ 박경일기자의 여행 - 전남 신안군 우이도 기행

파도 · 바람의 합작품 ‘우이사구’
훼손 우려 때문에 출입금지 조치
20년 세월 지나 현재모습 복원
먼 뱃길 감수할 독창적 아름다움

사람과 이야기가 있는 진리마을
정약용의 형 정약전이 유배 생활
홍어장수 문순득 표류기 등 저술
진리항에는 문순득 동상이 반겨

구름같은 바다 펼쳐진 상산봉
우이 1 · 2구 사이 진리고갯길
최정상인 상산봉까지 이어져
신안 앞바다 섬들 한눈에 조망

‘관계맺음’이 매력인 우이도
여관 · 식당 없이 민박집만 있어
잠자리 얻고 삼시세끼도 해결
민박집 주인과 허물없이 교유


photo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우이도 상산봉에 ‘섬앤산’ 여행 인증에 도전하고 있는 주기동(79) 씨가 섰다. ‘섬앤산’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섬을 여행하는 인증 프로젝트다.



우이도(신안) = 글 · 사진 박경일 전임기자 parking@munhwa.com

# 돈목마을 이장은 시비를 바꿀까

섬사람들은 ‘없다’는 말에 민감하다. 섬에는 진짜 없는 것이 많아서다. 우이도 성촌(星村)마을 사람들은, 그래서 마을 선착장 앞의 시비(詩碑)가 못마땅하다. 시비 앞에서 한 주민(주민이래 봐야 여섯 가구에 주민 열둘이 고작이지만)은 ‘대놓고 무시하는 수작이 아니면 뭐냐’고까지 했다. 시비에 새겨진 시 제목은 ‘우이도 성촌마을’. 평생 바다와 섬을 떠돌며 시를 써서 ‘섬 시인’이라고 불리는 이생진 시인의 시다.

“성촌마을은/ 돈목마을보다 더 야위었다./ 교회도 없고 폐교도 없다/ 나는 불쑥 외로움을 자랑한다/ 성촌 백사장은 그만큼 혼자/ 외치는 소리가 많다/ 떠내려온 수심(愁心)도 많다/ …(중략)…/ 막걸리 생각이 나는데/ 이 마을엔 막걸리가 없다/ 오 그렇지/ 바다 막걸리/ 바다 막걸리 한 잔/ 나는 그것을 마시고 비틀거린다” - 이생진 ‘성촌마을’ 중에서.

시는 여위고 작은 섬의 모습을 쓸쓸하게 그렸다. 그런데 시에서 성촌마을에 자꾸 뭐가 ‘없다’고 하니 주민들이 뿔이 났다. “작고 소박한 것이 귀하다는 칭찬의 말”이라고 했더니 뒷짐 지고선 헛기침을 하던 주민 몇몇의 말씀. “칭찬이라면 다 존(좋은) 말로 하는 것이제….” “고렇게 막걸리 자시고(드시고) 싶었으믄 달라 하시든가.”

성촌마을 주민이 언짢든 말든 사실은 사실이다. 성촌마을은 마주 보고 있는 돈목마을보다 야위었고 쓸쓸하다. 돈목마을 주민 수가 성촌마을의 두 배가 넘는다. 그렇다고 해도 고작 ‘열세 가구에 주민 스물세 명’이 전부이긴 하지만 말이다.

우이도란 섬 이름은 소(牛·우)의 귀(耳·이)를 닮았다 해서 붙여졌다. 지도를 보고 상상력을 좀 발휘하면 영락없이 소 대가리의 모습이다. 소귀 중 하나가 성촌마을이고, 다른 하나는 돈목마을이다. 마을은 나뉘어 있지만 두 마을은 가운데 백사장을 두고 서로 빤히 마주 보고 있다. 거리만 가까운 게 아니라 마을 이장까지 공유한다. 돈목마을 이장이 성촌마을 살림까지 함께 본다. 두 마을은 늘 비교된다. 섬에서는 큰 마을이 작은 마을의 눈치를 본다. ‘소외의 심경’을 알아서다. 박흥영(59) 이장이 목소리 작은 성촌마을 주민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신안군에다 성촌마을 시비를 바꿔달라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박 이장의 고심이 깊다.

# 우이도 모래사구는 ‘위’에서 보자

우이도의 성촌마을과 돈목마을, 두 마을을 합쳐서 ‘우이2구’라고 부른다. 누군가 ‘우이도에 간다’고 하면 십중팔구 여기 ‘우이2구’다. 우이도의 명물은 단연 바람에 날려온 모래가 산처럼 쌓인 ‘우이 사구(沙丘)’다. 그 모래언덕이 바로 돈목마을과 성촌마을 사이에 있다. 우이도에 간다는 건, 사구를 보러 간다는 것. 그러니 우이도에서는 우이2구, 그중에서도 좀 더 크고 민박이 많은 돈목마을이 목적지가 되는 것이다.

이쯤에서 의문 하나. 왜 거기가 ‘우이1구’가 아니라 ‘우이2구’일까. 두 가지 설명이 있다. 첫 번째는 우이2구가 섬의 서쪽이어서다. 섬에 가면 무조건 육지와 가까운 쪽에다 앞선 순번을 매긴다. 예외는 없다. 섬의 동쪽에 있는 진리마을이 육지와 가까우니 우이1구이고, 섬의 서쪽이 우이2구다. 2구가 소의 귀였다면, 우이1구는 소 입의 자리다. 두 번째 설명은 진리마을이 먼저 생겨나서다. 진리는 본래 파도의 영향을 덜 받는 협만 안쪽에 있어 돈목보다 마을이 먼저 형성됐다. 그래서 순서대로 진리마을이 예리마을과 합쳐 우이1구가 됐고, 뒤늦게 마을이 들어선 돈목마을과 성촌마을이 우이2구가 됐다는 얘기다.

이제 우이도를 둘러보자. 먼저 가는 곳은 우이도의 명물인 사구. 해안가의 거대한 모래언덕을 ‘우이도 사구’라고 불렀는데, 언제부터인가 ‘풍성(風成) 사구’라고 부른다. ‘바람 풍(風)’에 ‘이룰 성(成)’, 그러니까 ‘바람으로 만들어진 모래언덕’이라는 얘기다. 만들어진 연유를 이름에 담았다. 모래언덕은 파도와 바람의 합작품. 파도가 백사장으로 밀어 올린 모래를 바람이 끌고 올라가 사막 같은 언덕이 만들어졌다.

모래언덕은 사실 ‘아래’에서 바라보면 그다지 볼품이 없다. 첫인상은 ‘정수리가 벗겨진 대머리’쯤이다. 터진 모래 포대에서 모래가 쏟아진 것 같은 모습이 이색적이긴 해도 ‘뭐 저런 정도를 가지고 호들갑이냐’ 싶다. 그런데 ‘위’에서 보면 전혀 다르다. 풍성 사구는 모래언덕 위에 올라서 봐야, 그게 얼마나 대단한 풍경인지 알 수 있다.

오랫동안 훼손 우려 때문에 모래언덕을 오를 수 없었는데, 이제 사구 옆 작은 오솔길로 모래언덕에 올라 사구 정상에 설 수 있게 됐다. 거기 서서 마주하게 되는 풍경은 비슷한 곳을 떠올릴 수 없을 만큼 독창적으로 아름답다. 우이도까지 먼 뱃길을 기꺼이 감수할 수 있을 만큼.

# 추억의 흑백사진 같은 섬마을 풍경

풍성 사구 모래언덕의 높이는 50m쯤. 그 정도의 높이만으로도 사구의 느낌은 달라진다. 사구 위에 오르면 거대한 모래 더미의 규모가 비로소 실감 난다. 언덕 위는 사막과 비슷하다. 바람이 지나가면서 모래 표면에 새긴 무늬가 선명하다. 돈목마을 박 이장은 “여름과 겨울, 바람의 방향이 달라서 모래언덕은 여름에는 북쪽이, 겨울에는 남쪽이 급경사를 이룬다”고 했다. 급경사의 모래언덕 아래로 너른 백사장과 바다가, 그리고 그 너머로 돈목마을이 내려다보인다. 언덕에서 나란히 서서 그 풍경을 바라보던 박 이장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 정말 근사하지요.”

돈목마을에서 나고 자란 박 이장은 서울에서 횟집 주방장 일을 했다. 육지에서 학교에 다니다가 군 제대 후 회칼을 잡았다. 친구 따라간 고급 횟집 주방장이 그렇게 멋있어 보이더란다. 서울 강남의 최고급 횟집에서 20년 넘게 회를 떴다. 박 이장은 긴 객지 생활에서 고향 생각이 날 때면 늘 이 모래언덕을 떠올렸다고 했다. 고향 우이도를 떠올리는 추억의 중심에는 모래언덕이 있었다.

“여름이면 종일 백사장에 나가 살았어요. 헤엄도 치고, 조개도 잡고, 축구도 하고…. 모래언덕에 올라가 모래 미끄럼을 타며 놀았지요.”

풍성 사구는 다도해해상국립공원 최우선 보호지역. 지금은 훼손 우려로 모래언덕 옆으로 난 오솔길로만 오를 수 있는데, 그때는 모래언덕을 밟고 곧바로 오를 수 있었다. 그때 모래언덕은 지금보다 30m 이상 높았다. 변변한 운동장 하나 없는 섬의 작은 마을 아이들에게는 이만한 놀이터가 없었다. 어린 시절 추억을 떠올리던 박 이장은 “그때 돈목마을 분교 전교생이 55명이었다”고 했다. 돈목마을 전체가 35가구이던 시절, 초등학생만 55명이라니…. 그때는 한 집에 아이 네댓쯤은 기본이었고, 보통 예닐곱까지 됐다고 했다.

돈목해변에서 해 지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뛰노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백사장을 굴러다녔다던 오래전의 우이도 풍경을 상상했다.

섬에서 나고 자라지 않은 여행자도 돈목의 바다에서 느끼게 되는 건 고향의 정서다. 그렇게 느끼게 되는 건 그때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진 것 없어 보이는 바다와 모래뿐인 작은 섬마을이, 마치 시간을 박제해 놓은 흑백사진 속 풍경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 모래언덕을 보호해야 하는 까닭

섬마을 아이들이 조개를 잡던 우이도의 조용한 해변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20여 년 전쯤의 일이다. 우이도 풍성 사구의 이국적 풍경이 신문과 TV로 알려지면서 관광객이 쏟아져 들어온 것이다. 손바닥만 한 섬마을에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사람들이 들어왔다. 그 무렵 우이도를 찾은 외지인이 한 해 4000명이 넘었다. 지금은 하루 한 번 우이도를 오가는 여객선 ‘섬사랑 6호’가 특별운항편을 운용해 하루 세 번 우이도를 오갔을 정도였다. 그 무렵 돈목마을 주민들은 민박을 치고 밥을 차려주며 적잖은 수입을 올렸다. 귀한 줄 몰랐던 우이도 모래언덕이 가져다준 변화였다.

그 무렵 폭증한 관광객들이 모래언덕을 마구 오르내린 탓에 사구가 크게 훼손됐다. 하루가 다르게 낮아져 가는 모래언덕을 두고 볼 수 없었던 다도해 국립공원사무소가 급기야 ‘사구 출입금지’ 조치를 내렸다. 관광객이 격감하자 주민들이 반발했다. 환경보호 조치에 맞서는 관광지의 대표적 논리 ‘사람 먼저 살자’는 얘기까지 나왔지만, 국립공원공단은 요지부동이었다. 오랜 대치가 이어지면서 주민들이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다. 박 이장의 설명. “사실 사구가 훼손돼 가는 걸 주민들이 가장 가까이서 봤거든요. 사람들이 찾아오는 걸 보고 모래언덕이 소중하다는 것도 알았고요. 당장 장사를 할 수 없게 된 이들의 불만이 있었지만, 그런 사람들도 다 ‘사구는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 거죠.”

이런 주민들의 이해와 협조 덕에 풍성 사구는 점차 복원돼 가고 있다. 이만큼 되돌리는 데 20년의 시간이 걸렸다. 지금 새로 놓은 우회로를 따라 풍성 사구에 오를 수 있게 된 건, 모두의 이런 노고와 이해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러니 각별히 유의하자. 금지된 공간에는 절대 발을 들이지 말 것이며, 모래를 무너뜨리거나 지형을 조금도 훼손하지 말아야 한다.

photo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우이도 우이1구 진리마을 선착장 앞의 홍어장수 문순득 동상.



# ‘역대급’ 표류자, 우이도의 홍어 장수

이제 우이1구로 건너가 보자. 우이2구가 자연경관이 빼어나다면, 우이1구의 진리마을에는 ‘사람’과 ‘이야기’가 있다. 우이도의 과거 지명은 ‘소흑산도’였다. 지금의 흑산도는 대흑산도라고 불렸다.

우이도의 대표적인 인물이 정약전이다. 정약용의 형 정약전은 흑산도에서도, 우이도에서도 유배 생활을 하다가 우이도에서 세상을 떴다. 우이도에는 정약전이 살았던 집터와 서당 터가 남아 있다. 그런데 진리마을에서 근래 정약전보다 더 조명받는 인물이 있다. ‘홍어 장수 문순득’이다.

우이도 진리마을은 섬마을인데도 특이하게 상업적 전통이 강하다. 조류와 바람을 이용해 바다를 항해하던 시절 우이도는 일대 섬 교역의 중심이었다. 문순득의 증조부 문일장이 우이도에 정착했던 것도 이런 입지 때문이었다고 했다. 당시 우이도 주민들은 고기잡이나 농사보다는 섬과 섬, 혹은 섬과 육지를 오가며 장사와 교역으로 생계를 이었다.

조선 순조 때 우이도 사람 문순득도 마찬가지였다. 문순득은 홍어를 사러 지금의 흑산도 아래 태사도에 갔다가 풍랑을 만나 표류한다. 1801년 12월의 일이다. 처음 표류한 곳은 일본 오키나와(沖繩). 거기서 우여곡절 끝에 중국 상선 편으로 중국을 거쳐 귀국하려 했는데, 중국행 상선이 또다시 표류하는 바람에 필리핀 루손섬까지 떠내려가고 말았다. 거기서 중국 광저우(廣州)와 마카오(澳門), 베이징(北京)을 거쳐 조선으로 ‘걸어서’ 돌아왔다. 천신만고로 고향 우이도로 돌아온 게 1805년 1월 8일의 일이다. 3년 2개월. 우리 해양 역사상 가장 긴 거리, 긴 시간을 표류한 기록이다.

문순득의 이른바 ‘역대급’ 표류가 조선왕조실록에 실릴 만큼 세상에 알려진 건, 우이도에 유배 중이던 정약전이 문순득의 진술을 바탕으로 쓴 책 ‘표해시말’ 덕분이다. 문순득은 글을 모르는 ‘까막눈’이었지만, 기억력이 비상하고 놀라울 정도로 명민했던 모양이다. 표해시말에는 필리핀에서 목격한 화폐 유통부터 럼주를 마시고, 투계를 구경하는 따위의 얘기가 촘촘하다. 놀라운 건 표해시말 말미에는 112개의 우리말을 한자로 적은 뒤 오키나와 언어와 필리핀어로 적어 놓은 것. 오키나와와 루손섬에서 각각 8개월 남짓 머무는 동안 문순득이 그 나라 말을 배워왔다는 얘기다.

진리마을에서는 당대의 유배객보다 파란만장한 표류를 경험한 홍어 장수가 더 대접받고 있는 듯하다. 우이도에 도착하면 먼저 발을 딛는 진리선착장에 문순득 동상이 있고, 그 뒤 포구 안쪽에 정약전 동상이 있으며, 문순득 생가는 말끔하게 복원돼 있는데, 정약전 유배지는 마늘밭을 일구느라 허물어버린 자리에 말뚝 하나만 세워져 있다.

# 섬마을 언덕의 순정한 풍경

진리마을에도 근사한 경관이 있다. 우이도에는 큰 모래해변이 세 개 있는데, 그중 두 개가 우이2구인 돈목마을과 성촌마을에, 나머지 하나가 진리마을 쪽에 있다. 진리마을 해변이 띠밭너머해변이다. 마을 뒤쪽에 띠밭너머해변으로 이어지는 작은 초지 언덕이 있는데, 언덕 위에는 빨간색 벤치를 놓아두었다. 벤치에 앉으면 접시 모양 지형의 푸른 초지 아래로 백사장과 바다가 시야 가득 펼쳐진다. 어찌 보면 좀 밋밋해 보이는 풍경이지만 보면 볼수록 더 마음이 끌린다. ‘저자극의 순정한 풍경’이라고나 할까. 굳이 치장하지 않은 담박한 아름다움이 그곳에 있다.

우이1구와 우이2구 마을은 섬의 동서 양쪽 끝단에 있다. 우이도에는 선착장 주변 말고는 차도가 없다. 1구와 2구의 마을을 모두 다 보겠다면 순전히 도보로 이동해야 한다는 얘기다. 섬 한복판에 1구와 2구를 잇는 길이 있다. 거리는 2㎞ 남짓. 원시림을 방불케 하는 짙은 숲이 초록의 터널을 이루는 길이다. 서어나무와 동백나무를 비롯한 난대림, 그리고 울창한 대나무까지 길 위의 숲이 수시로 모습을 바꾼다.

우이1구에서 2구 사이에는 진리고개와 대초리고개 두 개의 고개가 있다. 적당한 오르막의 긴장이 곁들여져 트레킹 코스로는 더할 나위 없다. 진리에서 가자면 두 번째 고개인 대초리고개 아래에는 대숲 속에 파묻힌 대초리마을이 있다. 우이도에서 가장 먼저 사람이 살았다는 마을인데, 대나무 뿌리가 슬금슬금 집 안까지 들어와서 아예 집을 다 허물어버린 곳이다. 그 길에서는 하늘을 찌를 듯 자란 대나무가, 돌담만 남기고 마을의 집들을 다 먹어치운 모습을 볼 수 있다.

진리고개는 삼거리다. 두 길은 우이1·2구로 가는 길이고 나머지 하나의 길이 우이도에서 가장 높은 상산봉(해발 361m)으로 이어진다. 상산봉은 오름길에서 보면 부드러운 흙산처럼 보이지만, 반대편에서 보면 수직의 암릉이다. 정상의 시야는 거칠 것 없이 사방으로 트였다. 비금도와 도초도, 하의도와 상태도, 하태도까지…. 신안 앞바다 섬들이 죄다 내려다보인다. 내륙의 산에서는 흔히 ‘구름이 바다처럼 보인다’고 말하는데, 여기 상산봉에서는 바다가 마치 구름처럼 보인다.

photo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돈목마을 민박집에서 받은 아침 밥상. 시원한 비단조갯국과 농어구이가 올랐다.



# 작은 섬을 여행하는 재미

이제 좀 개인적인 이야기다. 17년 전에 우이도를 다녀온 적이 있다. 우이도 돈목마을의 어부 박화진(74) 씨 집에서 민박을 했는데 박 씨의 제안으로 함께 선외기 어선을 타고 정치망을 건지러 갔다. 정치망이란 어항처럼 고정 그물을 놔두고 안에 들어온 물고기를 잡는 그물. 배를 타고 나가 건져낸 정치망 안에는 팔뚝만 한 물고기들이 펄떡거렸다. 농어, 도다리, 감성돔…. 모두 다 고급 어종들이었다. 고기 몇 마리를 꺼내고 그물을 다시 바다에 넣었다. 그냥 놓아뒀다가 상고선이 고기를 사러 올 때 꺼내서 판다고 했다. 그걸 보면서 ‘남이 내 통장에 돈을 넣어주는 은행’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날 저녁 민박집 밥상에는 큼지막하게 썰어낸 탱글탱글한 자연산 회와 정성껏 끓인 생선 맑은탕이 올라왔음은 물론이다.

박 씨는 돈목마을에서 여태 고기를 잡고, 민박을 치고 있다. 17년 전의 생활과 달라진 게 별반 없어 보였다. 놀라웠지만 가만 생각해보니 섬에서는 드물지 않은 일이다. 17년 전 이야기를 꺼내자 박 씨 내외는 그때를 기억해냈다. 아침 밥상을 물리고 나서 박 씨가 “그날처럼 그물 보러 다시 한 번 가보지 않겠느냐”고 했다. 이번에는 박 씨의 아내 한영단(64) 씨도 따라나섰다. 풍성 사구 뒤쪽 성촌 앞바다에 쳐놓은 두 개의 정치망을 건져 올렸다. 그물 안에서 노란 빛깔의 황석어와 함께 무쇠 솥뚜껑만 한 대물 광어와 감성돔, 농어, 돌돔, 장어까지 줄줄이 뱃전에 부려졌다.

돈목마을에 머무는 내내 받은 밥상은 끼니마다 황송했다. 자연산 생선회는 찰진 맛이 일품이었고, 비단조개를 잔뜩 넣어 끓여낸 조갯국은 시원하기 이를 데 없었다. 손수 뜯고 말려 참기름을 발라 구운 김의 향은 진했고, 튀겨낸 꽃게는 고소했다. 잘 구운 농어나 말린 생선은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밥상에 올라왔다.

우이도 여행의 매력은 이런 ‘관계 맺음’에 있다. 우이도에는 여관이나 펜션은 물론이고 식당도 하나 없다. 도리 없이 먹고 자는 걸 민박집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데, 우이도처럼 한적한 섬에서의 민박은 그저 ‘잠자리를 얻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마음만 열어놓는다면 민박집 손님은, 자연스럽게 주인집의 생활 속으로 편입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섬에 식당이 없으니 하루 세끼를 다 민박집에서 해결해야 하는데, 누구든 주인집 거실에서 한데 모여 밥상을 받게 되니 왜 안 그럴까. 섬마을의 민박집에서는 손님과 민박집 주인이, 손님과 손님이 교유한다. 섬이 작으면 작을수록 그럴 확률이 높다. 작은 섬을 여행하는 재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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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이도는 멀다

목포에서 배를 타면 우이도까지 4시간이 넘게 걸린다. 목포에서 우이도까지 가는 배는 하루 1번뿐. 배는 오전 11시 45분 목포에서 출항해 딱 중간쯤에 있는 섬 도초도에 들렀다가 우이도까지 간다. 여기다가 도초도∼우이도 구간만 운항하는 배가 1번 더 있으니 우이도까지 가는 배를 하루 2번 운항하는 셈이다. 그렇더라도 배 안에 앉아 있다가 돌아 나온다면 모를까, 우이도는 당일로 들고나는 게 불가능하다. 우이1구에서 2구까지 걷고, 상산봉 산행을 하고, 진리∼예리마을∼돈목마을을 잇는 우이도 둘레길까지 걷는다면 2박 3일로도 빡빡하다.
박경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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