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원된 광화문 월대와 光化의 꿈[문화논단]

  • 문화일보
  • 입력 2023-10-13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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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식 단국대 사학과 교수

경복궁 광화문의 월대(月臺·궁궐의 정전 등 주요 건물의 품격을 높이기 위해 터보다 높게 쌓은 단)가 복원돼 오는 15일 공개된다. 2006년 광화문의 원형을 복원하기 위해 시작한 공사가 마무리됨으로써 월대에서 광화문-흥례문-근정문을 거쳐 근정전에 이르는 경복궁의 중심축이 완성된 것이다. 월대의 크기는 동서 29.7m, 남북 48.7m이며, 중앙에 폭 7m의 어도(국왕이 다니던 길)가 있다. 광화문 월대는 고종 대에 경복궁을 중건할 때 건설한 월대를 원형으로 삼았다. 현장에서 발굴된 석재를 최대한 활용했고, 동구릉과 호암미술관에 있던 서수상(상상 속의 상서로운 동물상)을 새긴 석재를 원래 자리로 돌려놓았다. 이에 따라 복원의 진정성도 많이 강화됐다.

조선 시대에 광화문 월대는 왕실 가족들이 많이 사용했다. 국왕이 궁궐을 나와 행차하거나 궁궐로 돌아올 때 광화문을 이용했고, 왕비나 세자빈을 정해 궁궐로 모실 때도 이 문으로 들어갔다. 외국 사신이 국왕을 만날 때도 광화문을 통해 들어갔으며, 특히 중국 사신이 방문할 때는 손님으로 극진히 대우했다. 국가적 행사가 있으면 광화문 일대는 꽃으로 장식됐고, 구경꾼들은 월대 앞에서 성대한 행사를 구경했다.

광화문 월대는 국왕과 신하가 만나는 장소였다. 과거의 마지막 절차에 국왕 앞에서 시험을 보는 전시(殿試)가 있었다. 문과 응시자는 궁궐 안 공터에서 답안지를 작성했으나, 무과 응시자는 말을 타고 달리거나 활을 쏴야 했으므로 넓은 공간이 필요했다. 이 때문에 무과 전시는 광화문 앞에서 치를 때가 많았다. 국왕이 신하들과 함께 활을 쏘거나 신하들이 활 쏘는 것을 관람하는 곳도 월대였다. 광화문 앞길에서 화포 발사 시험도 했다. 세조는 왕비와 함께 광화문 앞으로 나가 새로 만든 화포의 위력을 확인했다.

또한, 광화문 월대는 민원을 접수해 해결해 주는 소통의 장소이기도 했다. 세종 때 고령 출신의 석호라는 사람이 광화문에 와서 국왕에게 건의할 내용을 적은 종이를 땅바닥에 펼쳐 놨는데, 그 종이는 광화문에서 중추원 앞길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세조는 역사를 기록하는 주서나 사관들을 교대로 광화문으로 보내 민원을 접수케 했다. 민원을 알리려는 사람이 많아지자 제비를 뽑게 했고, 뽑힌 사람이 말하는 내용을 기록했다가 국왕에게 보고해 해결했다.

영조는 현재 서울 종로1가 교보빌딩 자리에 있던 기로소(70세 이상으로 관직에서 물러난 문신들을 예우하기 위해 만든 기구)를 방문하고 돌아오는 길에 광화문에서 경희궁 흥화문까지 구간에서 민원을 접수했고, 경복궁을 방문했을 때는 광화문 앞에서 유생들에게 직언 상소를 올리게 했다.

일제강점기 광화문 앞에 전차선로가 놓이면서 월대는 훼손됐고, 1960년대에 도로 공사를 하면서 남아 있던 월대의 석재는 땅속에 묻혔다. 이번에 광화문 월대가 복원되면서 경복궁의 중심축이 회복됨과 동시에 동쪽에 있는 의정부(議政府) 터와 서쪽에 있는 삼군부(三軍府) 터가 더욱 가깝게 연결됐다.

외국인들은 오랜 역사를 가진 궁궐 건물이 현대식 고층 건물과 어울려 굳건하게 서 있는 모습을 보면 신기해한다. 실제로 월대를 지나 광화문을 들어가면 우리나라의 전통 건축물을 만나고, 월대 앞으로 나오면 곧게 뻗은 세종로와 함께 발전하는 대한민국의 현재를 만나게 된다. 세종 대에 집현전 학자들은 훌륭한 정치의 빛이 널리 비치기를 바란다는 뜻에서 광화문(光化門)이라고 이름 지었다. 광화문 월대의 복원을 계기로 시민과 소통하는 정치가 더욱 발전하고 우리 문화의 빛이 더 밝아지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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