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념장 찍어도, 물에 말아도… 묵묵히 스며드는 고소함[이우석의 푸드로지]

  • 문화일보
  • 입력 2024-03-07 09:15
  • 업데이트 2024-03-07 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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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서울 관철동 ‘된장예술과술’의 도토리묵무침.



■ 이우석의 푸드로지 - 묵

도토리묵, 푸성귀·간장 무쳐먹고
가늘게 썰어서 묵사발로도 즐겨

향 좋은 메밀묵… 묵밥으로 인기
녹두로 만든 청포묵은 담백한 맛

‘탱탱한 탄력’ 곤약도 묵의 일종
우뭇가사리로는 한천묵 만들어


굽고 삶고 튀기고 조리고. 다양한 조리 방식이 있지만 ‘굳혀’ 먹는 것도 특이한 조리법이다. 녹말을 굳힌 것이 묵이다. 묵은 유독 한국인이 즐겨 먹는 조리 방식이다.

묵은, 삶은 것도 아니고 찐 것도 아니다. 그저 묵일 뿐이다. 서로 닮았지만 두부와는 다르다. 젤리(jelly)와도 다르다. 두부는 단백질(대두단백)에 간수를 넣어 고형화시킨 것이고, 탄수화물인 녹말을 굳히면 묵이 된다. 동물성 지방을 굳힌 것은 젤리라 부른다.

묵을 만드는 재료는 허드레가 많다. 대표적 구황식품이었지만 먹을거리가 많아진 요즘도 특유의 맛과 식감을 즐기기 위해 묵을 쑨다. 메밀과 도토리 등 주로 늦가을과 겨울에 나는 재료로 만들지만, 먹는 건 봄날이 제철이다. 묵을 먹을 때 채소와 푸성귀를 곁들이는 까닭이다. 묵을 썰어 푸성귀와 함께 참기름 간장에 무쳐내면 봄날의 미각을 돋우기에 딱이다. 교외 산채나물 식당에서 늘 묵 메뉴를 갖춰놓는 이유다. 그중에서도 녹두를 갈아 쑤어 만드는 청포묵은, 순백의 담백한 맛이 ‘봄날의 맛’으로 안성맞춤이다.

photo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경북 영주 ‘순흥전통묵집’의 묵밥.



먹을 것이 없어 묵을 쒔다지만 사실상 제대로 묵을 만들 수 있는 식재료는 드물다. 손도 많이 간다. 인력 가치가 식재료보다 비싼 요즘엔 귀한 음식이 됐다. 가끔 SNS상에 ‘한국인만 먹는 음식’이란 눈길 가는 제목을 단 포스팅이 올라오는데, 이때 콩나물·참외·골뱅이 등과 함께 ‘도토리묵’이 등장한다.

도토리는 설치류와 이베리코 흑돼지, 그리고 한국인만 먹는다는 말이 나돌 정도다. 80%쯤 맞는 말이긴 하다. 과거 중국에서 흉년일 때 밀에 도토리 전분을 섞어 먹었다는 기록이 남아있으며, 지금도 일본의 일부 지방에선 도토리를 묵으로 만들어 먹긴 한다(돗토리현은 아니다).

도토리묵은 우리가 가장 많이 먹는다. 막걸리집 안줏거리는 물론, 백반집 반찬으로도 심심찮게 오르내린다. 지금은 다르지만, 아주 옛날에는 세계 곳곳에서 도토리를 먹었다. 온대와 냉대 숲에서 두루 나는 흔한 열매였던 까닭에 농경이 시작되기 전, 도토리는 채집 시대의 선사인에게 매우 중요한 식량이었다. 농업혁명을 통해 쌀과 밀, 옥수수 등을 경작하게 되면서 도토리는 특유의 떫은맛 때문에 멀리하게 됐다. 다만 돼지 사료로 많이 쓰였다. 도토리의 고어도 ‘돝(돼지)’의 ‘(밤)톨’이란 뜻으로 나온 돝톨이다.

photo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경남 밀양 레스토랑 ‘마중’의 곤약비빔밥.



상수리나무와 떡갈나무가 많은 우리 산에 가을이면 어김없이 도토리가 나니, 선조들은 이를 놓치지 않고 묵을 쑤어 먹었다. 묵을 만드는 법은 거개 다 비슷하지만 도토리묵을 만들기가 가장 까다롭다. 먼저 알찬 도토리를 잘 말렸다가 알맹이만 빼내고 맷돌로 간다. 물에 도토리 가루를 가라앉히고 다시 윗물을 갈아주길 몇 번 이상 반복한 다음, 소금 간을 하고 약불로 끓이는데 곰탕이나 한약 달이는 것 이상의 정성과 시간이 든다. 죽처럼 농축될 때까지 타지 않게 계속 저어줘야 한다. 그다음에 그릇이나 판에 넣고 식혀서 굳힌다.

산이 많은 한국은 특히 떡갈나무가 많은 지역에서 가을에 도토리가 많이 나와 이걸 이용해 만들어 먹었다. 그때도 두부를 잘 만든다고 소문난 선조들이었니 묵쯤이야 일도 아니었다. 다른 재료의 묵에 비해 도토리묵은 탱글탱글하고 부드럽다. 접시를 기울이면 푸딩처럼 흔들흔들하지만 씹는 느낌은 물컹하지 않고 한결 탱탱하다. 맛은 쌉쌀하고 약간 떫은맛도 난다.

다른 음식과 달리 묵은 양념장을 잘 써야 오히려 도토리의 고유한 고소한 맛을 느낄 수 있다. 떫은맛은 코르크의 타닌맛과 비슷해 어릴 때보다 어른이 되면 더욱 좋아진다. 어떻게 쑤어도 묵 자체의 맛은 강하지 않다. 묵을 울퉁불퉁하게 써는 이유는 표면적을 늘려 양념장이 더 잘 묻도록 하기 위해서다. 그렇게 썰어 양념장을 찍어 먹거나 채소와 버무려 먹는 게 일반적인데 그냥 물에 말아 먹기도 한다.

가늘게 썬 묵을 김가루와 채소, 양념장과 섞은 것을 ‘묵사발’이라 부른다. 어딘가에 얻어맞고 깨졌을 때 ‘묵사발’이 되었다는 것은 묵의 부서지기 쉬운 특성을 비유한 것이다. 물에 말아 낸 묵사발을 먹다가 보면 그 상황이 충분히 이해가 간다.

겨울철 장사치들이 골목을 돌아다니며 “메밀묵 사려∼ 찹쌀떡!”을 외치는 기믹으로 유명한 메밀묵은 메밀을 갈아 만들어 향이 좋다. 조직이 푸석해 젓가락으로 집자면 툭툭 잘리고 만다. 청포묵보다는 집기 쉽지만 탄성 좋은 도토리묵보다 까다롭다.

photo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대구 불로동 ‘불로묵가’의 묵국수.



요즘은 냉면과 막국수처럼 메밀 특유의 거친 식감과 향을 즐기는 이들이 많다. 메밀이 비싼 터라 도토리묵보다 값어치가 더 나간다. 묵국에 밥을 말아 먹는 메밀묵밥이 지역 별미로 인기를 끌고 있는데, 영주시와 예천군 등 경북 지방이 유명하다. 김치와 돼지고기, 묵을 넣고 볶다가 끓이는 경북 예천식 향토음식 ‘태평추’도 있다. 시인 안도현은 태평추는 궁중음식 탕평채가 서민들에게 전해지며 이름과 형식이 와전됐다 설명한다.

청포묵은 녹두로 만든다. 콩인데 두부가 되지 않고 묵이 되는 이유는 녹두는 대두콩보다 녹말이 많기 때문이다. 구전민요 ‘새야 새야 파랑새야’에는 녹두꽃과 청포 장수가 나오는데 청포가 바로 녹두를 이른다. 키가 작았던 전봉준 장군이 ‘청포 장수’로 불렸던 터라 이를 비유한 노래가 나왔다.

청포묵은 새하얀 반투명 묵으로 묵 중에서 가장 고급 식재료로 쓰인다. 자체로도 먹지만 탕평채로 더 유명하다. 탕평채(蕩平菜)는 청포묵에 오방색 양념을 고명으로 올린 궁중요리다.

청포묵 말고 황포묵도 있다. 정통 전주비빔밥이라면 당연히 고명으로 올려야 하는 묵으로 알려졌다. 따로 황포묵이 있는 것이 아니라 녹두로 만든 청포묵에 치자물을 들여 노란색을 낸 것이다. 남원과 전주에선 따로 황포묵 요리를 맛볼 수 있다.

다이어트 식품으로 각광받고 있는 곤약도 묵의 일종이다. 칼로리가 거의 없는 대신 막강한 포만감을 주기 때문이다. 원재료인 구약나물 뿌리(구약감자) 가루에 재를 같이 넣고 쑤면 곤약이 된다. 곤약에 거뭇한 가루가 바로 재인데, 식물성 응고제로 넣었기 때문이다. 원리로 보자면 묵이지만 젤리보다 탄력이 탱탱해 젤리처럼 간식으로도 즐긴다.

photo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돼지껍데기를 삶아서 굳힌 묵.



해조류인 우뭇가사리도 한천묵(우무묵)으로 쓴다. 홍조류 우뭇가사리를 말려 추출한 탄수화물을 굳혀 우무묵으로 만드는데 부드러운 푸딩이나 투명한 젤리 느낌이 난다. 곡물 생산량이 적은 제주의 구황식품으로 대대로 민초의 삶을 이어나갈 수 있도록 한 고마운 음식이다.

우무묵은 특별한 맛이 나지 않으면서 칼로리도 거의 없다. 대신 섬유소가 많아 이 역시 다이어트 식품으로 인기가 많다. 화채나 양갱을 만들 때 쓰기도 하고 부산에선 콩국에 넣어 먹는다. 돼지껍데기를 쓸 수 없는 이슬람권에서 판매하는 세계적 젤리에 식물성인 다시마나 한천을 대체재로 많이 넣는다. 신기하게도 내륙인 경남 밀양시에 무려 80년 역사가 넘은 한천 공장(테마파크)이 있는데, 국내 한천 생산량 90% 가까이를 점유하고 있는 이곳에서 젤리와 양갱 체험 및 다양한 한천 요리를 맛볼 수 있다.

photo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엄밀하게 구분하자면 동물성 재료로 만든 것은 묵이 아니다. 하지만 그 형태로 굳힌 것을 묵이라 불러왔기 때문에 여전히 묵이란 이름으로 통하는 것이 몇 있다. 생선껍질에 붙은 젤라틴을 굳혀 만드는 박대묵, 꼼장어묵(먹장어묵), 홍어껍질묵 등이 그것이다. 아, 도루묵은 이 계열이 아니다. 입에 들어서는 순간 혀로도 씹을 수 있을 정도로 부드러우면서도 구수한 맛을 내는 묵이 우리 밥상에 있어 이른 봄날의 푸성귀까지 덩달아 신이 난다. 새로 도래한 계절, 밥상에서부터 부드럽고 탱글탱글하게 시작한다.

놀고먹기연구소장

■ 어디서 맛볼까

◇묵국수 = 불로묵가. 옛날 ‘묵쳐묵고가는집’이 상호를 바꿨다. 대구 불로동 시장 앞에서 도토리묵을 썰어 넣은 국수를 말아주는 집이다. 멸치육수에 묵까지 더하니 담백한 맛의 극치다. 태평추를 비롯해 메밀과 도토리묵을 활용한 다양한 메뉴가 있다. 대구 동구 팔공로26길 15. 묵국수 7000원. 태평추 9000원.

◇메밀묵밥 = 순흥전통묵집. 묵은 경북에서 많이 먹는데, 특히 영주시는 묵에 특화된 도시. 순흥에 묵밥집이 많다. 멸치장국에 메밀묵을 썰어 넣고 밥을 말아 먹는 묵밥, 별것 아닌 것처럼 보여도 맛이 훌륭하다. 9000원.

◇도토리묵 = 금이네집. 서울 종로3가 낙원지하시장에 있는 포장마차. 영화 ‘유열의 음악앨범 촬영장소’로 유명한 이곳은 예전에 종로 술꾼들의 야간 집합소였다. 닭도리탕, 편육, 두부김치 등 간단한 안주류를 파는데 쌉싸름한 도토리묵을 부추 양념장에 무쳐낸 메뉴가 1만 원이다. 서울 종로구 삼일대로 428.

◇도토리묵, 청포묵 = 된장예술과술. 서울 종각에서 구수한 된장비빔밥으로 유명한 전통 한식집. 저녁에는 전통주와 한식 요리를 주로 파는데 간자미 무침, 두부김치볶음 등이 주메뉴. 커다란 접시에 그득 담아내는 도토리묵 맛이 좋아 막걸리 안주로 많이들 찾는다. 서울 종로구 삼일대로15길 20. 1만3000원.

◇묵채 = 울산에서 육회비빔밥으로 가장 유명한 집이지만 주문 메뉴에 묵채가 빠지면 서운하다. 메밀묵은 부드럽고 가격에 비해 양도 푸짐한 편, 진한 풍미의 육회비빔밥과 곁들이면 담백한 맛에 금세 빠지게 된다. 울산 남구 삼산로228번길 19. 묵채 6000원.

◇한천 = 레스토랑 마중. 식재료에 한천과 곤약을 주로 쓰는 등 보기 드문 메뉴를 내는 집. 일제강점기부터 한천을 만들어 온 국내 최고 최대 한천 테마파크 내에 위치했다. 돈가스, 곤약비빔밥 등에도 한천을 기본으로 한 반찬을 낸다. 밀양시 산내면 봉의로 58-10. 9000원. 양갱만들기 1만7000원.

◇황포묵 = 정통 전주식 비빔밥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바로 황포묵. 성미당은 고추장에 비벼서 나오는 ‘비빈 밥’으로 인기를 얻은 전주비빔밥 맛집이다. 샛노란 황포묵이 모양과 맛에서 단연 존재감을 드러낸다. 전주 완산구 전라감영5길 19-9. 육회비빔밥 1만7000원. 전주전통비빔밥 1만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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