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긴 터널 지나자 눈앞에 雪國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1968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1899~1972)의 소설 ‘설국’을 여는 첫 문장이다. 1935년 ‘문예춘추’ 1월호에 연재되면서 시작된 ‘설국’의 인상적인 첫 문장 속 장면은 짧지 않은 세월의 바람을 견디고 여전히 그대로였다. 설국이 쓰여진 지 70여년, 가와바타가 자살로 삶을 마감한 지 40년 가까이 지났지만, 기차를 타고 군마(郡馬)현과 니가타(新潟)현을 가르는 13㎞의 어둡고 긴 시미즈 터널을 지나자 소설에 쓰여진 대로 눈앞에 하얀 눈의 나라가 펼쳐졌다. 습기찬 북풍이 니가타의 1963m 다니카와산을 넘지 못해 그대로 눈이 되어 쏟아진다는 이곳은 가와바타가 설국을 썼던, 그리고 설국의 배경이 된 니가타현 유자와 마을이다.

이 눈의 마을에서 1월29일부터 2월1일까지 교보문고와 대산문화재단이 주관하는 ‘설국’ 문학기행이 진행됐다. 33명이 참가한 문학기행은 시인 고운기 연세대 연구교수의 해설과 함께 이뤄졌는데 기차를 타고 소설 속 첫 장면을 만나는 것에서 시작, 작가가 ‘설국’을 썼던 다카한 료칸, 허무에 찬 남자 주인공 시마무라와 격정적이고 당돌한 여주인공 고마코가 만나고, 이야기하고, 어긋나는 감정을 나눴던 장소들 그리고 ‘설국’과 관련된 자료들을 전시하는 설국관을 살펴보는 것으로 이어졌다.

가와바타는 1934년 유자와 온천마을을 처음 찾은 이후로 5년간 여러 차례 이곳을 방문해 머물며 글을 썼다고 한다. 그때마다 그가 묵었던 곳이 바로 다카한 료칸, 정확하게 말하면 료칸의 2층, 설국의 풍경이 한눈에 보이는 가장 전망 좋은 방이었다. 물론 이 료칸은 허무와 고독에 휩싸였던 작가의 모습이 그대로 투영된 주인공 시마무라가 머물며 여주인공 고마코를 만났던 곳이기도 하다.

1930년대 가와바타와 그의 분신 시마무라가 머물렀던 3층짜리 작은 료칸은 그동안 증개축을 거듭해 옛날과는 달라진 외관이지만, 그들이 머물렀던 방은 당시 모습 그대로 보존돼 있었고, 그 옆에는 가와바타와 ‘설국’에 관련된 자료들을 모아놓은 자료관이 마련돼 있었다. 그곳에는 1930년대 당시의 유자와 마을, 가와바타의 사진, 작가의 친필 자료들, ‘설국’이 연재됐던 잡지들 등이 전시돼 있었다. 자료관 옆에 바로 붙어 있는 작은 공간에서는 흑백 영화 ‘설국’이 오후 4시, 8시 하루 두차례씩 상영되고 있었다.

특히 자료관에서는 여주인공 고마코의 실제 모델이었던 게이샤 고다카 기쿠에 대한 자료도 전시돼 있어 참가자들의 흥미로운 시선을 끌었다. 게이샤 이름이 마쓰에였던 고다카는 갓 스무살이 되던 1934년 가와바타를 이곳에서 처음 만나, 그를 지극 정성으로 모셨다고 한다. 한쪽 벽에 걸려 있는 사진 속 마쓰에의 모습은 ‘가늘고 높은 코, 아름다운 자줏빛 환형동물의 태처럼 매끄러운 입술, 약간 밑으로 처진 듯한 눈썹… 순백의 도자기에 엷은 분홍빛 붓을 살짝 갖다댄듯한 살결’이라는, 소설에 묘사된 고마코의 얼굴 그대로였다.

료칸을 나서자 곧바로 시마무라와 고마코가 만나 처음으로 데이트를 했던 산사가 나타났다. 소설에서 이 장면은 “여자는 얼른 돌아서서 삼나무 숲 속으로 천천히 들어갔다. 그는 말 없이 따라갔다. 산사였다. 이끼가 돋아난 돌사자 옆의 번듯한 바위에 가서 여자는 앉았다”고 묘사돼 있다. 삼나무 숲은 사라졌지만 산사, 돌사자, 널찍한 바위는 그대로 남아 ‘설국’을 좇아 한국에서 온 문학기행자들을 반기고 있었다.

가와바타가 노벨상을 받은 직후 한국을 방문해 한양대를 찾았을 때 스무살의 대학생이었다는 이승현(61)씨는 “대학 시절 봤던 가와바타에 대한 기억을 따라 이곳까지 왔다”면서 “소설의 배경이 된 장소를 보고 걸으니 마치 내가 주인공이 된 것 같다”고 말했다. 또 고창명 박경리문학공원 소장은 자막이 없는 ‘설국’영화를 보면서 문학공원에 있는 박경리에 대한 영상자료에 영어 자막을 넣어야겠다고 했고, 울산의 ‘오영수 문학관’ 건립을 위해 유자와마을을 벤치마킹하러 왔다는 이연옥씨는 작가와 작품을 어떻게 관람객 앞에 소개할 것인지에 대한 아이디어를 많이 얻어간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국에서 온 문학기행자들의 뜨거운 관심과 달리 지금은 스키타운으로 개발된 유자와 마을에서 만난 하얀 슬로프를 내려가는 젊은이들은 오히려 먼곳에서 온 문학기행자들을 놀랍게 바라봤고, 이 거리에는 ‘설국’이 아니라 최근 시작된 NHK 역사 드라마 ‘천지인’의 주요 인물인 전국시대 가신 나오에 가네쓰구의 고향을 찾아온 관광버스들이 바쁘게 오가고 있었다. 하지만 이같은 사람들의 망각과 변화는 오히려 무한한 자연과 대비되는 유한한 인간에 속절없어 하며, 유한한 삶을 넘어선 극도의 아름다움의 세계를 추구했던 가와바타의 고독을 극명하게 드러내 보였다.

니가타 = 최현미기자 chm@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