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용절벽 ‘정상일터로’ 넘어야>“너, 승진 안할거야?” “야, 밥 먹고가”… 일-가정 양립 망친다

⑦ 상명하복 기업문화, ‘윗물’부터 변해야…

- 좋은 사례
직원 제안 임원이 직접 답변
이유 없이 야근하면 문책도
한달에 한번은‘팀장없는 날’

- 나쁜 사례
“우리 때는 몸 바쳐 일했는데”
상습 야근·비효율 회의 골병
“연차 사유가 뭐야”휴가 트집

# “내가 왜 김 사무관 연차 쓰는데 무슨 집안일 때문인지를 알아야 하나. 법적으로 쓰게 돼 있는 연차인데, 필요하면 알아서 쓰게.” (중앙부처 A 과장)

# “괜히 사무실에 앉아 전기세 축내지 말고, 업무 끝났으면 알아서들 퇴근해.” (대기업 김모 부장)

# 한 중앙부처 A 과장은 직원들이 휴가 신청서를 낼 때 굳이 휴가 사유를 말하지 않아도 된다고 공지했다. 당장 중요한 현안이 걸려 있어 도저히 연차를 쓸 수 없는 상황을 제외하고는 법으로 보장된 연차를 알아서 찾아 쓰라는 취지다. A 과장은 “휴가 갈 때마다 죄인처럼 윗사람에게 무슨 일 때문에 휴가 간다고 보고해야 하면 마음이 편하겠느냐”며 “상사 눈치 보면서 집안일이 있다고 둘러대는 직원들이 많은데, 그러지 말고 당당하게 휴가 떠나는 문화를 정착시키려고 나름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 오후 6시 30분 사무실을 나서며 모 대기업 김모 부장은 직원들에게 정시에 퇴근하라고 했다. 김 부장이 퇴근을 미루면 부하 직원들도 자연스레 퇴근이 늦어진다. 김 부장 스스로 정시퇴근하려고 노력하는 이유다. 정시퇴근을 지켜야 하니, 부서원들은 업무 시간에 수다를 떨거나 인터넷 서핑을 하는 등 비효율적 시간을 최소화하고 일에 집중하게 된다. 김 부장 역시 야근을 하지 않기 위해 될 수 있으면 회의는 짧게 하고, 보고는 간략하게 받으려고 노력 중이다.

김 부장은 “회사가 최근 조직 문화 개선 캠페인을 하면서 야근금지령을 내렸다”며 “한 달 정도 해보니 조직원 만족도도 높고, 업무처리에 차질이 빚어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와 달리 오히려 생산성이 높아지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일·가정 양립, ‘윗물’부터 변해야=고용 문화 개선의 요체라고 할 수 있는 일·가정 양립이 가능해지기 위해선 기업 내 최고위층의 생각이 먼저 바뀌면서 일반 직원이 눈치 보지 않아도 되는 문화가 확립돼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경상 대한상공회의소 기업환경조사본부장은 “기업 문화의 중요한 경영철학과 가치 등을 구성원과 공유하고, 이를 바꿀 수 있는 위치에 있는 것이 CEO”라며 “아래서부터 변한다 해도 CEO가 ‘상명하복식’ 조직 문화를 선호한다면 조직 문화 개선은 요원해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는 이런 점에서 CEO의 의지가 중요하고, 이어 일·가정 양립이 가능하도록 업무 방식과 인사평가 등 기업 시스템을 바꾸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지적했다. 이 본부장은 “몇 시간씩 회의하고, 면대면 보고가 넘치는 업무환경이라면 CEO가 아무리 일·가정 양립을 강조해도 야근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몰린다”며 “효율적인 업무 시스템이 구축돼야 한다”고 말했다.

최근 대한상공회의소와 맥킨지가 국내 100개 기업을 대상으로 한 기업문화 진단 결과, 상습적인 야근과 비효율적인 회의 등 기업 문화를 바꾸기 위한 핵심 열쇠로 ‘CEO의 인식과 의지’가 제시됐다.

정부도 이에 맞춰 6월부터 8월까지 CEO가 참여하는 ‘기업문화 개선’ 캠페인을 진행 중이다. 대·중소기업 CEO 등 9명이 일·가정 양립 동참과 기업문화 개선을 위한 실천메시지를 각계에 전달하고, 국내 모든 기업 경영진과 정부 부처 및 공공기관 고위급 관계자들의 인식을 바꿔나가자는 캠페인이다. 기업문화 개선 홍보 동영상에는 LG전자와 KT, 포스코, 한화생명 등의 CEO가 직접 출연해 ‘회의는 짧게, 소통은 길게’, ‘정시 퇴근이 행복한 출근을 부릅니다’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수평적 조직 문화 정착이 관건=기업문화 개선 캠페인 우수 기업으로 꼽히는 LG전자는 일반 직원이 기업의 발전이나 변화를 위한 아이디어를 실명 혹은 익명으로 제안하면 최고 인사책임자(CHO)가 사내 방송을 통해 직접 응답하는 시스템을 도입했다. 상명하복식 조직 문화를 타파하고, 수평적 조직 문화를 정착하기 위한 조치다.

LG전자는 ‘스마트워킹위원회’를 신설해 업무상 비효율적인 부분과 불필요한 야근 문화 등을 개선하기로 했다. 위원회는 5만여 종의 전자 문서를 30종으로 간소화하고, 야근·특근을 해당 팀 예산에서 수당 지급이 가능한 선까지만 허용하도록 했다. 또 이유 없는 야근을 고집하는 팀장급 직원에 대해서는 문책하는 강력한 제도도 도입했다.

LG전자는 휴가를 제대로 챙겨 쓰는 문화를 정착하기 위해 한 달에 한 번 ‘팀장 없는 날’을 운영하고 있다. 팀장은 먼저 자신이 쉬는 날을 정해서 직원들에게 알려야 한다. 팀장 눈치를 보며 일반 직원이 연차를 쓰지 못하는 분위기를 바꾸기 위한 조치다. 여름휴가를 최대 2주까지 쓸 수 있게 하고, 본부별 안식주간을 정하는 등 ‘제대로 쉬고 제대로 일하는’ 문화 정착을 위한 다양한 제도가 시행 중이다.

또 지난달 30일 열린 ‘제2차 일·가정 양립 민관협의회’에서는 ‘휴가 사유 안 적어 내기’ ‘근무시간 외 업무요청을 정중히 거절하는 공용 응답 문자 개발’ 등이 제시됐다.

◇‘윗사람의 잘못된 말 한마디’, 조직 문화 망치는 지름길=CEO가 의욕적으로 일·가정 양립 문화정착을 위해 나선다고 그동안 굳어진 조직 문화가 하루아침에 바뀔 순 없다. 아무리 좋은 제도가 있더라도 현장에서 제대로 시행되지 않으면 오히려 없는 것만 못하게 된다는 지적이다.

특히 부장·과장·팀장 등 일반 직원과 직접 얼굴을 맞대고 일하는 일선의 관리자가 “우리 때는 몸 바쳐 일했는데 요즘 젊은 사람들은 참 이해가 안 된다”는 식의 반응은 경계 대상이다. 일·가정 양립은 고사하고 조직의 사기나 업무 효율성 등을 저해할 수 있는 불통 사례로 꼽힌다.

‘일·가정 양립 민관협의회’에서는 금기시되는 대화내용으로 △“야, 저녁 먹고 가라”(회식 강요) △“휴가 가서 뭐하려고?”(휴가 신청 부담스럽게 만들기) △“내일까지 부탁해”(퇴근 무렵 업무지시) △“김 대리, 너 승진 안 할 거야?”(과중한 업무 강요) 등이 지적됐다.

한 전문가는 “군대에서 내부 부조리는 현장에서 ‘최고참’인 병장이 마음을 고쳐먹어야 하듯 일선 관리자들이 ‘나는 안 그랬는데 왜 지금’이라는 피해의식을 버리고 변화를 받아들여야 한다”며 “기업에서도 이런 변화를 적극적으로 밀고 나가는 ‘현장 리더’에게 인사상 혜택이 돌아갈 수 있는 시스템 등을 개발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영주 기자 everywhere@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