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들 끝장 좋아하는데… 사랑도 미움도 남겨놓자”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이남호 교수는 우리 전통적 삶과 문화는 끝장, 막장, 완벽을 좋아하지 않았다며 이를 우리 시대 인생관으로 제시했다. 아래 사진은 왼쪽부터 남김의 미학을 보여주는 신윤복의 월하정인, 백자 달항아리, 김홍도의 창해낭구도. 현대문학 제공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 문학평론가 이남호 교수 ‘남김의 미학’ 제안

우리 시대 1등주의 신화 갇혀
맹목적 질주 극단·막장 범람
풍요롭지만 실제는 너무 강퍅

시조·고전 소설·도자기 속에
선조들 무심함의 여유 배워야

“불편함도… 오래된 것들도…
누추하지만 조금 남겨두길”

“우리 시대는 철저함, 완전함과 효율성의 신화에 갇혀 있다. 이를 위해 맹목적으로 질주하다 보니 극단, 막장, 끝장이 범람하고 있다.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밀어붙이는 악착스러움은 미덕이 되고 1등이 돼야 한다는 강박은 일상이 됐다.”

문학평론가 이남호(60) 고려대 국어교육과 교수는 이 같은 우리 시대를 ‘풍요 속의 불행의 시대’로 규정했다. 그 어느 때보다 풍요로워졌지만 실제로는 너무나 강퍅한 시대. 그는 이런 우리 삶에 대한 대안으로 전통 미학, 바로 ‘남김의 미학’을 제안했다. 그가 지난 몇 년간 시조, 고전소설, 건축, 정원, 도자기, 풍속화 등에 나타난 전통의 미학을 분석한 글들을 묶어 ‘남김의 미학’(현대문학)을 출간했다.

30년 넘게 문학 현장에서 활발하게 활동해온 문학평론가인 이 교수가 문학의 장을 넘어 다양한 전통문화를 살피고 그 속에서 시대 문제를 푸는 열쇠를 찾게 된 것은 ‘시조창’때문이었다. “오래전부터 시조창을 좋아해 자주 듣곤 했는데 7, 8년 전 어느 날 문득 ‘시조창은 왜 시조의 종장을 부르지 않을까’라는 의문이 들었다”는 것이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우리 정형시인 시조시를 가사로 하는 시조창은 4분 이상 걸리는 세상에서 가장 느린 노래 가운데 하나인데 시조의 종장을 노래하지 않는다. 인간문화재에게도 그 이유를 물어봤지만, 그저 옛날부터 그렇게 불렀다는 답만 돌아왔다. 결국 그는 생각을 거듭한 끝에 “우리 옛 문화에는 남기는 것, 완벽하게 채우지 않고 빈 곳을 남기는 것이 많다”는 것과 “점점 더 완벽해지려는 우리 시대에 대한 답이 여기에 있음”을 깨달았다고 한다.

이 교수는 우리 이야기만 봐도 남김의 미학이 빛난다고 했다. 가령 옛 이야기에는 철저히 끝장내는 복수극이 없다. “이야기는 복수가 아니라 주인공이 잘돼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것에 초점이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춘향전’의 변학도나 ‘흥부전’의 놀부 정도가 잘 알려진 나쁜 인물이지만 이들은 끝장나지는 않는다. ‘춘향전’의 결말은 이몽룡과 춘향이가 결혼해 잘사는 것일 뿐 변학도가 어떻게 됐는가에는 관심이 없다. ‘흥부전’의 많은 판본에서는 놀부가 흥부의 도움으로 잘살게 되는 것으로 끝나기도 한다.

한국의 풍속화나 산수화도 꼼꼼하게 모든 것을 그리기보다는 여백을 남기고, 집을 지을 때도 나무나 돌을 반듯하게 다듬기보다는 자연의 모습을 그대로 남겨 둔 채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한국의 정원도 자연을 삶의 한 공간으로 곁에 두었지 인공적 공간으로 따로 만들지 않았다. 심혈을 기울여 만든 백자 도자기는 또 어떤가. 그 아름다움 속에 무심과 장난기를 남겨 두는 여유가 있다고 했다.

이 교수는 이런 미학은 “때로는 끝마무리가 꼼꼼하지 못하다는 지적으로 이어지기도 하지만 이는 남김의 부정적 측면을 서양의 합리성의 관점에서 확대한 것”이라며 관점을 달리하면 이런 약점은 오히려 강점이 된다고 말했다. 특히 모두가 완벽과 1등을 향해 달리고, 그 속에서 막장과 끝장이 난무하는 시대에 남김의 미학은 너무나 절실하게 필요한 덕목이라고 강조했다. “요즘 사람들은 끝장 보기, 끝장내기를 좋아하고 막장까지 추락한 타인의 삶을 훔쳐 보기를 좋아한다. 아무리 사정이 어려워도 사람이 지켜야 할 선이 있다”는 그는 “끝장과 막장은 보통의 윤리나 상식이 통하지 않는 곳이며 인간성의 포기나 파탄까지 예상되는 곳”이라고 지적했다. 또 일상적 목표가 된 완벽에 대해서도 “완벽은 도달할 수 없는 지점이며 도달한 순간 다시 불완전해지기 시작한다”며 “1등 한 사람에게는 퇴보할 가능성만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그는 한국의 전통적인 ‘남김의 미학’이 단순한 예술적 미감이 아니라 일상의 인생관으로 적용될 수 있다면 1등을 향해, 끝장을 향해 달려가기보다는 남겨 두는 연습을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좀 남기자. 자식 사랑도 모든 것을 다 바치지 말고 좀 남기고, 할 말도 다 하지 말고 남기고, 사랑도 다 표현하지 말고, 미움도 남기고, 욕심도 남기자. 1등만 전부 갖지 말고 꼴찌를 위해서도 좀 남기자. 편리함만 추구하지 말고 불편함도 조금 남겨 두고, 오래된 것들은 누추해도 남겨 두자.”

최현미 기자 chm@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