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생각하며>虛像을 넘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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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민호 문학평론가, 서울대 교수

30년이라. 생각해 보면 아득한 세월이다. 한 사람이 나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긴 시간이다. 올해는 2016년, 그때는 1987년. 29년이라면 30년이나 다름없는 긴 시간이다. 그때, 6월 10일. 서울시청부터 신세계백화점까지 수많은 사람이 길을 메웠다.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 보는 광경, 그러나 이 장관은 그로부터 20일을 두고 계속되었다. 세상이 변하기 시작했다. 광주의 학살자들이 금방이라도 물러가고 새 세상이 올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수많은 시민이 손에 쥔 것은 ‘대통령 직선제’라는 딱지 한 장뿐이었다. 지겹고도 지루한 시대의 변천이 변화의 기대에 들뜬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해 연말에 치러진 선거에서 야당 세력은 양분됐고, 구 집권 세력에 다시 기회가 주어졌다. 변화를 바라던 사람들의 깊은 탄식 속에서, 설상가상으로 1990년 벽두에는 한 거대한 정당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3당 합당, 이른바 보수 대연합이라는 것이었고, 이로부터 보수니 진보니 하는 말이 본격적으로 거론되기 시작했다. 보수라는 기치를 내건 거대 정당이 출현하자 근본적 변혁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혁신이다 진보다 하는 말이 세력과 명분을 얻는 현상이 나타났다. 민주주의라는 문제틀은 대통령 직선제라는 딱지 한 장을 얻었으므로 무대의 후경으로 물러나야 한다는 것이었다.

1992년 연말에 치러진 대통령 선거는 보수 대연합 구도의 주창자와 그 카운터파트로 설정된 야당 지도자가 대결하는 양상을 보였다. 이 둘은 과거에는 군사독재 세력에 저항한 야당 인사들이었다. 이 선거에서 외톨이가 된 야당 지도자는 보수 대연합이란 독재를 연장하고자 하는 술책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선거의 승리자는 보수 대연합의 주창자였다.

무심하고도 냉정한 세월이 흘렀다. 나라 경제가 갑자기 무너지면서 나라의 운명을 국제통화기금(IMF)에 저당 잡혀야 하는 위기를 맞이하자 외톨이 야당 지도자에게 새로운 기회가 주어졌다. 그는 보수 대연합의 구도를 깨는 새로운 틀을 만들어내기 위해 애썼다. 보수 대연합이라는 말 속에 숨어 있는 지역 패권 연합을 깰 수 있는 방법은 보수 대연합에 합류해 있던 인사들을 맞아들여 새 틀을 짜는 것이었다.

1997년 연말, 국가 위기 속에서 새로운 대통령이 선출됐다. 보수 대연합에 큰 금이 가면서 그 세력에 밀려 있던 민주주의 의제가 되살아났다. 그러나 그것은 지극히 불철저한 것이었다. 경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IMF로 상징되는 신자유주의 세계 경제 논리를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부 토대는 신(新)자유주의에 의해 장악된 가운데 상부 구조만 민주적 재편이, 그것도 불완전하게 이뤄진 체제, 그것이 바로 김대중 대통령의 시대였다.

그러니 이 새로운 체제는 지극히 불안한 체제이기도 했다. 한국 경제와 정치의 오랜 습성을 근본적인 변화 없이 물려받은 채 경제위기 극복이라는 당면 과제를 해결하는 데 급급해야 했고, 그러면서도 민주 연합이라는 위태로운 틀을 유지해 나가야 했다. 이 민주 연합은 보수 대연합의 구성원들을 빌려온 것이었기에 대연합이 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외부는 물론 내부의 반발과 비판에 직면해야 했다.

2002년의 대선에서 집권 세력은 패색이 짙었다. 그럼에도 용케 민주 연합 세력이 다시 한 번 뭉쳤다. 차라리 음모라고나 해야 할 병역 스캔들에 의존해서, 그러나 그 못잖게 ‘행정수도 이전’이라는 의제로 충청지역을 민주 연합 안에 묶어둠으로써 정권은 재창출했다. 그러자 선거 직후 뜻밖의 현상이 나타났다. 한 번 더 권력을 장악한 민주 연합 내부에서 그 틀을 깨고 한국 정치를 다시 한 번 보혁 구도로 재편하려는 움직임이 인 것이다. 보수 대연합을 겨냥했던 세력이 반가워할 일을 그 정치적 반대자들이 오히려 능동적으로 추진했고, 그 결과 열린우리당이라는 ‘진보당’이 출현했다. 이로써 민주 연합은 깨어졌다. 정치판은 보수 연합과 호남을 중심으로 한 민주 연합 구파와 ‘진보당’으로 3분됐다.

그 후의 모든 선거 결과는 이러한 삼분지계가 얼마나 취약하고 어리석은 것인지 충분히 보여주었다. 지리멸렬한 민주 연합 구파와 ‘진보당’은 2007년 대선을 앞두고 서둘러 다시 모였지만 너무 늦었다. ‘진보당’을 주축으로 한 과거의 민주 연합은 부자가 되고 싶은 사람들의 욕망을 자극한 보수 대연합의 리더에게 대패하고 말았다. 큰 패배를 경험하고도 ‘진보당’ 중심의 민주 연합은 분열을 거듭했고, 그러면서도 진보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못했다. 무엇이 진보인지 깊이 헤아려 보지 않고도 진보주의를 신봉할 줄 아는 사람들. 그들은 진보가 아니면 보수라는 도그마에 사로잡혀 민주 연합의 분열상을 진정한 진보와 사이비 진보의 분화 과정으로 이해했다.

자신들이 생각하는 진정한 것이 아닌 모든 것은 가짜일 뿐이라는 믿음이 계속되는 가운데 다시 한 번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다. 2012년의 선거에서 ‘진보당’의 대표자가 더 진보적이라 주장하는 세력과 연대해서 보수 대연합의 후계자와 경쟁했다. ‘당연한’ 패배였다. 하지만 불과 몇십만 표의 안타까운 패배였기에 진보주의에 대한 맹종은 철저히 검토되지 못했다. 그리고 그러는 사이에 혼군(昏君)의 나라에는 어둠과 부정이 유령처럼 어슬렁거렸다.

내일 토요일에 서울에는 200만 명의 시민이 모여들 것이라는 소문이 들린다. 분명 다시 변화의 시대다. 부디 진보의 허상(虛像), 진보라는 말의 허상에 얽매이지 않기를. 더 많은 민주주의, 우리에게 간절히 필요한 것은 오로지 이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