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의 공간>시신 나가던 광희문 맞은편, 자궁 본뜬 ‘탄생의 공간’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생명의 탄생 과정을 설계에 반영해 1965년 완공된 옛 서산부인과 병원. 부드러운 원형의 곡면으로 마감된 벽이 모성을 연상시킨다. 곽성호 기자 tray92@

(59) 건축가 김중업과 동대문 舊서산부인과

서울이 거쳐온 시간의 단층을 오롯이 보여주는 몇몇 지역 중 하나가 동대문 지역이다. 한때는 동대문운동장이라는 체육시설 때문에 스포츠경기로 주목받았고 지금은 여러 문화행사와 국제행사들까지 열리는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가 들어서 있다. 유커들이 동대문 일대의 패션타운에 몰려오면서부터는 한류의 새로운 명소로도 각광 받고 있다. 동대문이라는 ‘장소의 역사성’은 이 같은 현대사뿐 아니라 멀리 조선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우선 지역 남측의 광희문을 꼽을 수 있다. 광희문은 4대문과 4소문으로 구성된 한양성곽 문 중에서 동남측에 있는 4소문 중 하나다. 시구문으로도 불리던 이곳은 서소문과 함께 조선시대 한양의 주검이 도성 밖 묘지로 나가는 문이었다.

여기에 최근에는 한양성곽길까지 복원됐다. 한양도성은 조선 태조 5년인 1396년부터 수도 한양을 지키기 위해 북악산·인왕산·낙산·남산을 따라 지어진 성곽이다. 동대문을 찾으면 보물 1호 동대문의 또 다른 이름인 흥인지문부터 장충체육관까지 이어지는 흥인지문 구간(1.8㎞)에 오를 수 있다.

동대문 의류쇼핑몰에서 쇼핑하고, DDP에서 전시를 본 뒤 성곽길을 따라 산책하고 광희문이 보일 무렵 예사롭지 않은 형태의 자그마한 백색 건물 하나를 건널목 근처에서 만나게 된다. 아리움이란 광고회사의 사옥으로 사용되고 있는 옛 서산부인과 병원이다.

1960년대 초반 건축가 김중업(1922∼1988)은 자신의 아내와 친척 관계에 있는 산부인과 의사 서병목의 의뢰로 병원 설계를 맡게 된다. 그리고 1965년 병원이 완공된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신축 주한 프랑스대사관 예상도. 가운데 사무동 건물의 지붕 처마 선이 김중업이 한옥을 모티브로 설계했던 모습 그대로 복원된다. 주한프랑스대사관 제공

병원의 건물 모습은 한마디로 파격이었다. 생명을 상징하는 자궁과 성기의 모양을 본떠서 설계해 건물 형태 자체에 생명의 탄생 과정이 담기도록 했다. 기능적이고 실용적인 측면만을 감안해 지어진 표정 없는 건물들 사이에서 확실히 돋보이는 건물이다.

당시 이 건물이 안겨준 충격 효과는 오늘날의 DDP 못잖았다. 임신부들은 둥근 모태를 연상시키는 이 아름다운 건물에 줄을 지어 찾았다.

서산부인과 병원은 1952년부터 ‘현대건축의 아버지’로 불리는 르코르뷔지에(1887∼1965)의 사무실에서 현대건축을 익히고 이를 자신의 강렬한 조형적 언어로 내면화한 후 귀국해 당시 한국 건축계를 압도했던 김중업의 건축 이념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그는 이 건축물에 대해 “건축이란 하나의 뚜렷한 사인이며, 인간의 감성에 던져지는 강한 몸짓으로 눈길을 끈다. 둥근 면에 뚫린 구멍들이, 살짝 붙어 돌아가는 발코니들이 삶에의 희열을, 또는 태어나는 새 삶에의 찬가를 부른다”고 말했다.

건물 형태를 자세히 살펴보자. 평면을 보면 건물 입구 좌측으로 둥근 벽들이 웅크린 아기 모양을 하며 자궁을 떠올리게 한다. 가장 신성하고 아늑한 공간이자 건물의 용도와 어울리는 형상이다. 그 옆은 임산부와 환자들의 원활한 층간 이동을 위한 램프 부분이다. 임산부들이 계단보다는 램프를 이용하는 것이 더 안전하다고 본 것이다.

환자와 환자 가족들은 마치 유기적 관(튜브)을 타고 움직이듯 이 슬로프를 이용해 흘러다니는 듯한 느낌을 갖지 않았을까. 이 램프 부분은 남성성을 상징한다. 이렇게 탄생의 메커니즘을 평면에서 구성하여 남측 면으로 배치하였다.

북측으로 옆 필지와 마주하는 방향은 큰 창을 가진 반면에, 유기적 곡선으로 입면을 구성한 남측 면은 각각의 창들을 통해 빛이 비집고 들어오며 내부의 아늑하고 낮은 층고를 강조하게 했다. 병실에서 창이 갖는 기능적인 면을 북측 면에서 활용했다면, 남측 면은 간호사실, 수술실 등에 어울리도록 창을 연출했다. 설계 당시 램프 부분은 일체감을 주는 세로의 긴 띠 형태의 창으로 전체를 두르려 했지만, 당시 시공기술 부족으로 천장 부분을 콘크리트로 덮은 채 생략해 버리고 만다.

지금은 개인 사무실로 이용 중이라 출입이 힘들지만, 자궁 공간에 있는 대기실, 간호사실로 사용되었던 위치의 소파에 앉아본다면, 아늑한 층고와 타원형으로 감싸는 벽면 그리고 창에서 들어오는 빛의 어우러짐을 통해 모태 공간에 대한 느낌을 알 수 있지 않을까.

김중업은 어떤 생각으로 을지로와 퇴계로가 만나는 이 지점에서 파격적인 조형적 실험을 했을까. 여기에는 역사성, 장소성이 모두 가세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선 건물과 마주 보고 있는 광희문부터 보자. 조선시대 서울 도성에 살았던 이들에게 시구문으로 쓰였던 광희문은 죽음의 아이콘이었다. 말하자면 김중업은 생명 탄생의 풍요로움을 연상시키는 건물을 통해 광희문이 지닌 죽음의 그림자를 몰아내려고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여기에 이 같은 독특한 조형언어의 건물이 필요했던 현실적인 이유도 있다. 당시 광희문 일대는 1928년 혜화문과 함께 헐리게 된 광희문의 성루가 일본 사람들에 의해 팔려가며 초라하게 성곽만 남은 상태였다. 광복과 전쟁을 겪으며 그 성문터에서 전통시장과 빈민가와 화류가들이 창궐했다.

이에 따라 정부는 1960년대 무렵부터 충무로에 대한 확장공사 계획을 이어가며 주변을 지속적으로 정비하고 있었다. 김중업은 빈민가와 전통시장, 화류가들이 정리되며 어수선한 분위기에 있던 광희문 주변에 상징적이면서도 기념비적인 건물을 세우고 싶었을 것으로 보인다.

건물 위치도 좋았다. 일반적인 대지 이용으로는 결코 이롭지 못한 삼각대지였지만 을지로와 퇴계로가 만나는 장소에 있었기 때문에 시각적인 면에서 상징성을 가질 수 있었고, 최대한 이 점을 고려해 건물을 설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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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함께 시대적인 분위기도 김중업의 과감한 실험을 강요하고 있었다. 당시 정부는 가족계획이란 명분으로 인위적으로 생식능력을 조절, 통제하고 있었다. 그 같은 국가의 통제에 김중업은 극적으로 생명의 풍요로움을 상징하는 건물을 서울 한복판에 세워 항변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당시 외국의 건축문화를 받아들일 때 일본을 통하여 들어온 부분이 많이 있었는데, 김중업은 서양의 건축문화를 받아들인 1세대라고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동양의 문화와 다른 서양 문화에 큰 괴리감을 느꼈을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는 한국에서 서양의 근대 건축을 받아들여 그대로 선보인 것이 아니라, 한국적인 부분을 찾고 한국화하는 데 역량을 집중해왔다.

그런 점에서 항상 안타깝게 생각해온 건물이 서울 서대문구에 있는 주한 프랑스대사관 건물이었다. 이 건물은 김수근의 공간사옥 건물과 함께 우리나라 현대 건축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평가됐지만, 1962년 준공 후 현재까지 사용되면서 수차례의 증·개축으로 본래 형태가 훼손됐다. 그런데 지난 14일 프랑스대사관은 리모델링을 통해 증·개축된 부분을 덜어내고 초기 모습으로 복원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에 따라 한국 전통가옥의 선을 모티브로 한 사무동 지붕의 처마 선이 김중업이 설계했던 모습 그대로 복원된다. 50여 년 전 대사관이 건립됐을 당시 이러한 디자인은 한국의 전통문화와 프랑스의 현대적 감각의 결합이라는 평가를 받았으나 이후 보안 등의 이유로 변형됐다. 그런 점에서 늦게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경기 안양시 만안구 석수동 예술공원로에 위치한 김중업박물관은 기존 건물을 리모델링해 개관한 지 두 해를 넘어섰다. 이 박물관을 찾으면 그의 건축이념을 일목요연하게 파악할 수 있다. 김중업박물관은 김중업이 디자인해 1959년 완공한 제약회사 유유산업 안양공장을 개조했다고 한다. 공장 설계 건물로는 유일하게 남아 있는 작품으로 박물관은 사무동(김중업관)과 공장동, 보일러실과 굴뚝 등을 옛것 그대로 살려낸 복합문화공간으로 구성돼 있다.

애초에 공장 건물로 지어졌지만 김중업의 건축이념이 이 건물에도 투영돼 있다. 김중업관은 기둥 역할을 하는 구조물을 외부로 드러내 내부 공간을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도록 지었다. 벽면을 유리로 처리해 투명성과 개방성을 높인 것이 눈길을 끈다. 그의 개성과 초기 작품 경향이 반영돼 있다.

1층 전시실에서는 김중업이 세계 각지의 건축물을 답사하며 한국어·영어·프랑스어·일본어로 남긴 각종 메모와 건물 스케치가 담긴 건축 수첩, 르코르뷔지에의 모듈러 등이 있다.

2층 전시실에는 김중업이 만든 도면과 작품사진, 건축 모형 등이 들어서 있어 그의 건축세계가 진화하는 과정을 엿볼 수 있다. 김중업의 대표작 중 하나인 주한 프랑스대사관과 서산부인과의 나무 모형은 김중업의 큰아들이 기부한 것이다. 자료를 열람하다 보면 1970년 와우아파트 붕괴사건을 계기로 현재 성남시인 광주단지의 무분별한 개발정책을 비판한 탓에 강제 추방당해 1971년부터 1979년까지 프랑스에서 도피생활을 해야 했던 사연도 알 수 있게 된다.

얼마전 김중업건축박물관과 안양예술공원 그리고 안양시 전역에서는 5회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APAP·10월 15일∼12월 15일)가 진행됐다. 도시와 예술에 대한 관점에서 진행된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는 공공예술에 대한 한국 예술계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미술, 조각, 건축, 영상, 디자인, 퍼포먼스 등 다양한 공공예술 작품을 선보였다.

근대 시기에 일본을 통한 서양문화의 수입을 탈피해 직접 서양 건축문화를 접하고 한국화한 1세대 건축가라고 할 수 있는 김중업의 작품들은 대한민국 곳곳에 자리 잡았지만 근대 한국 건축물들의 재활용과 재해석에 인색한 세태로 인해 해체되고 매몰돼 가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김중업 작품의 하나인 유유산업 공장 건물이 김중업건축박물관으로 거듭나 공공예술 프로젝트와 연계됨으로써 문화예술의 소통과 나눔의 공간으로 재탄생했다는 것은 단지 건축물의 재활용만이 아니라, 도시 장소성의 재해석이자 지역과 역사의 맥락을 이어가는 의미 있는 일이라고 볼 수 있다.

김기홍 재한 프랑스 건축사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