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評>헌법은 국민통합의 나침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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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연 변호사, 前 법제처장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우리도 대한민국 국민이다.’ 광화문 촛불집회에 나온 어느 고교생이 든 피켓의 구호다. 그런가 하면 이른바 ‘배신의 정치’로 몰려 대통령과 각을 세운 어느 정치인이 원내대표직에서 물러나면서 던진 말도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였다. 헌법 제1조 제1항이 문자 그대로 국민의 소유물로 바뀌는 장면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대통령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청와대로부터 나온다.’ 군사독재 시절 법과대 화장실 낙서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표현이다. 헌법이 권력자들의 게임 룰을 정한 장식물로 전락하고 국민은 헌법을 거론하기만 해도 처벌받던 살벌한 긴급조치 시절, 위 표현처럼 헌법을 희화화한 것은 없었다. 국민이 주인이 되는 권리(주권), 즉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헌법 제1조 제2항)―평범한 진리에 가까운 이 명제를 주인이 찾아오기까지 긴 여정이 소요됐다.

대통령과 그 측근 권력자들에 의한 헌법질서 침해를, 헌법을 지켜야 할 권력기관 등이 방관하자 마침내 주인이 나섰다. 지난해 10월 말부터 이어진 촛불집회―주인이 임명한 심부름꾼을 바꾸기 위한 헌법의 틀 안에서 이뤄진 평화적인 저항권 행사였다. 세계 헌정사상 유례가 없는 저항권 행사의 모범이었다. 마침내 국민은 가장 큰 심부름꾼(대통령)을 바로 내치는 대신 그 잘잘못을 문서로 남기기 위해 마지막 헌법 수호기관인 헌법재판소의 심판대(탄핵심판)로 올렸다. 이런 일련의 과정은 혁명도, 헌정 중단도 아닌 헌법에 근거를 둔 정당한 행위다.

이제 헌법에 보장된 기본권과 모든 권력이 국민에게 있다는 주권재민(主權在民)의 헌법 조문은 더 이상 정치적 상징 조작의 장식물이 아니다. 언제라도 주인이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이 되었다. 우리 사회의 모든 현안과 문제가 헌법이 정한 적법절차에 따라 논의되고 해결돼야 한다.

또한, 헌법은 국민 개개인이 피부로 느끼는 생활 규범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1990년대 후반으로 기억난다. 택시 운전하는 분이 내 사무실로 찾아왔다. 부친이 사망한 뒤 1년이 지났는데 갑자기 은행으로부터 아버지가 생전에 보증선 돈을 갚으라는 소장을 가지고. 당시 민법에는 피상속인(부친) 사망 시 3개월 내에 상속포기 여부를 결정하지 않으면 단순 승인한 것으로 간주돼 채무까지도 상속하게 돼 있었다. 그 택시기사는 부친이 남긴 재산이 별로 없고, 보증채무가 있는지 몰랐기 때문에 상속포기를 하지 않고 3개월을 넘겼다고 한다. 채무까지도 승인한 것으로 간주된 것이다. 나는 이 민법 조항에 문제가 있음을 간파하고 즉시 위헌심판제청을 하여 헌법재판소의 판단을 받도록 절차를 밟았다. 헌법재판소는 민법의 위 규정이 개인의 행복추구권과 재산권을 침해한 것으로 보아 위헌결정을 했다. 그 후 민법이 개정돼 지금은 3개월의 기간을 사망 시가 아닌 채무 등이 있음을 안 날부터 기산하도록 하고 있다.

국민이 헌법의 힘을 피부로 느끼는 사례다. 비단 이 사례뿐만 아니라, 국민 생활에 불편을 주는 많은 위법·위헌적인 법과 제도를 헌법소원을 통해 개폐한 기억이 새롭다. 헌법이 추상적·선언적 규범이 아닌 재판규범 내지 생활규범으로서 국민의 삶 속에 각인되고 있다. 헌법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헌법의 존재감을 절감케 한 대통령 탄핵 시국에 직면해, 또한 개헌이 화두인 시대를 맞아 헌법은 더 이상 전문가나 지식인, 법조인의 전유물이 아니다. 헌법은 모든 국민이 숙지하고 소유해야 할 지적재산이다.

우리 사회는 이념 편향적이고 파편화된 개인과 집단의 극단적인 주장으로 공동체적 연대가 급속히 허물어지고 있다. 국가의 정체성이 흔들릴 뿐만 아니라 개인 간 연대의 끈도 점점 사라지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그 와중에 헌법을 자기 편의적으로 해석하거나 폄훼하는 경우도 있고, 헌법마저 이념투쟁의 수단으로 삼기도 했다. 이제 관용과 진실에 기초한 공동체 정신을 헌법적 가치로 회복해야 할 때다. 다양한 이념과 가치관을 지닌 대한민국 국민이 합의할 수 있는 기본 텍스트는 바로 헌법이다. 헌법은 국민통합의 나침반이 돼야 한다.

끝으로, 퇴임을 앞둔 멋진 대통령 버락 오바마의 헌법 사랑 한마디. “진보와 보수를 가리지 않고 우리 모두 헌법을 옹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