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 애호가가 아니라면 한국 대표 직업 발레단을 꼽기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을 모르는 이는 거의 없다. 1세대 발레 스타로 명성을 떨치고, 지금은 국내 발레단의 양대산맥 수장이 됐다. 문훈숙(왼쪽 사진) 유니버설발레단 단장과 강수진(오른쪽) 국립발레단 단장이다. 한국 무용수가 세계적인 발레단에서 주역으로 활동하고, 국제 콩쿠르를 휩쓰는 등 ‘발레 한류’를 이야기할 때, 이 두 단체를 빼놓을 수 없다. 이들이 수십 년 굳건하게 자리를 지키며 선의의 경쟁을 펼친 시간이 밑거름이 됐을 터. 두 발레단의 수장으로부터 ‘한국 발레의 시대’에 대해 들어봤다. 선화예술학교 선후배인 두 사람은 모나코 왕립학교에서 마리카 베소브라소바를 사사한 공통점도 있다.
문훈숙 유니버설발레단 단장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사진 = 유니버설발레단제공
공연시장 커지고 작품 다양해져야”
“한국 발레 성장의 증거는 너무 명백하죠. 저만 해도 해외로 유학 가서 배워 와야 하는 세대였잖아요. 그런데 이젠 유학 갈 필요가 없는 시대가 됐어요. 그것만으로도 놀랍죠. 이제 반대로 모두 국내 발레 교육에 대해 궁금해하고 있어요.”
지난 17일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린 제3회 ‘예술의전당 예술대상’에서 유니버설발레단의 발레 ‘심청’이 대상을 받자, 객석에 앉아있던 발레단 직원들은 눈물을 훔쳤다. 심청은 지난해 30주년을 맞은 국내 대표 창작발레로, 한국 발레의 성장과 함께했으며 이를 지탱한 유니버설발레단의 역사 그 자체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가운데엔 문훈숙(54) 단장이 있다.
1986년, 이 발레단 수석 무용수였던 문 단장은 심청이 인당수에 빠지는 장면을 처음 맞닥뜨렸을 때를 잊지 못한다. 지난 20일 서울 광진구 유니버설아트센터에서 만난 문 단장은 “안전 조치도 없이 2층 높이에서 매트 위로 뛰어내려야 할 정도로 안전에 대한 개념도 없던 시절에 만들어진 작품이다”며 “심청이 30년을 공연할 수 있었던 게 대견하고 또 지금 발레 한류라고 불릴 정도로 발레계가 성장한 게 놀랍고 뿌듯하다”고 말했다. “당시엔 관객들이 커튼콜에도 익숙하지 않았어요. 박수를 안 치니 민망해서 ‘빨리 들어갈게요’라는 듯 뒷걸음질 쳐 빠져나왔죠. 그런 시대에 한국 것으로 창작을 한 초대 예술감독이 정말 대단하게 느껴집니다.”
문 단장은 지난해 심청 30주년 특별 공연 때에 은퇴 후 처음으로 무대에 섰다.(아래 왼쪽 사진) 춤을 많이 추는 역할은 아니었지만 쉰을 넘긴 1세대 발레스타가 무대에 서는 것만으로도 귀감이 됐다. 다시 무대에 서고 싶진 않을까. 문 단장은 “치마나 밟지 말자는 생각으로 집중해야 할 정도였다”며 손사래를 쳤다. 아쉬운 마음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지난해 문 단장과 동갑인 세계적인 발레리나 알렉산드라 페리(54)의 내한공연 때다. 페리는 맥밀란 안무의 ‘로미오와 줄리엣’ 주연으로 한국 무대에 섰는데 나이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가벼운 몸놀림과 농익은 연기로 한국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문 단장은 “은퇴 전에 꼭 해보고 싶었던 작품으로 항상 마음 한쪽에 남아 있었다”고 고백했다. “페리 연습을 보면서 ‘아, 나도 하고 싶다’ 생각만 했죠. 60세까지 활동한 발레리나가 있지만 페리처럼 큰 작품은 거의 없어서 우리 발레 팬들이 보시면 참 좋겠다 싶었어요. 후배들에겐 높이 뛰는게 다가 아니라 진짜 연기가 무언지 보여 줄 수 있는 무대였고요.”
문 단장은 앞으로 30년의 청사진을 명확하게 그리고 있었다. ‘우리’ 발레를 하고 또 ‘우리’ 무용수를 키워낸다는 것. 문 단장은 “해외에 나간 무용수들이 정말 잘하고 있지만, 반대로 이들이 국내에 있어 줘야 진짜 한국 발레 시장이 좋은 것 아닌가”라고 반문했다. 그래서 꾸준히 ‘공연전 해설’로 대중화에 힘쓰고 있는 것. “공연 시장이 커져야죠. 무대가 많고 작품 수가 다양해져야 합니다. 예술가는 어떤 무대에 설지가 가장 중요하니까요. 그런 환경을 만들어 줘야 하는 의무가 아직 남아 있어요.”
강수진 국립발레단 단장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사진 = 국립발레단 제공
모두 갖춘 안무가 육성에 주력”
“국립발레단 55년 역사, 정말 짧은 시간이죠. 발레는 외국으로부터 받아들인 문화잖아요. 몇백 년 된 해외 유명 발레단이 우리 무용수들을 주목하고 있으니 대단한 일이죠. 한국인보고 뭐든지 ‘빨리빨리’ 한다고들 하는데 정말 빠르고 또 열심히 잘하는 게 사실이에요, 하하.”
지난 21일 서울 예술의전당 국립발레단 사무실에서 만난 강수진(50) 단장. 지난해 독일에서 오네긴(아래 오른쪽 사진) 을 끝으로 현역 은퇴를 했고 올해 초 연임이 결정됐다. 달라진 건 거의 없다. 오전 5시 30분이면 알람 없이 눈을 뜨고 운동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강 단장은 자신의 근황보다 한국 발레의 선전이 더 큰 이슈가 아니겠냐고 했다. “잘하는 건 계속 잘하고 보완할 부분은 보완하고. 그 둘의 균형이 딱 맞는 순간에 ‘발전’이란 게 오는데 지금 우리가 그 과정에 있는 것 같아요. 성장하고 있는데 그 속에서 인정도 받고 무용수는 성숙해지고 관객들의 수준도 높아지고…. 진심으로 감사한 일이죠.”
칭찬 일색이다. 강 단장은 “진짜 잘하고 있으니까요”라며 어깨를 으쓱했다. 단순히 몇몇 무용수가 해외 유명 발레단에서 주역으로 활동하고 있고 유망주들이 국제 콩쿠르에서 성과를 내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강 단장은 “우리만의 창작 발레를 할 수 있는 단계, 즉 재능있는 안무가들이 눈에 들어온다”며 “한국적이면서도 글로벌한 감각을 동시에 갖춘 안무가들을 키워내는 데 앞으로 더 힘쓰겠다”고 했다.
한국 무용수의 기량이 세계 수준이라는 건 더 이야기하면 입이 아프다. 흥미로운건 과거엔 몇몇에게 시선이 몰렸다면 이젠 다양한 무용수가 주목받는다. 최근 국립발레단원 박슬기와 변성완이 벨기에 플랑드르발레단 공연에 초청된 게 좋은 예다.
“깜짝 뉴스였죠. 최고의 발레리나와 발레리노가 만나도 최악의 공연이 될 수 있어요. 개인의 의지뿐 아니라 팀워크도 중요한데 그런 면에서 국립발레단은 ‘드림팀’이에요. 제가 ‘하자’고 하면 무용수와 스태프가 호흡을 맞춰 착착 해내 주니까요. 잘 따라와 줘서 고맙고 재임으로 한 번 더 기회가 주어졌으니 가고자 했던 방향의 틀을 확실하게 다잡고 싶어요.”
은퇴 후 무용수를 보는 ‘눈’이 조금 달라지지 않았을까. 팀워크를 중시하는 강 단장은 변함없이 가장 첫 번째로 인간성을 꼽는다. 강 단장은 “관객 앞에서 무용수는 오장육부를 드러낸 것과 같다”며 “무대에 선다는 건, 어떻게 바뀔지 모르는 하루하루에 대해서도 책임을 진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스텝을 잘 밟는 게 끝이 아니에요. 발레를, 또 ‘자신’을 공부해야죠. 그건 기술을 연마하는 것보다 훨씬 깊이 있는 일이에요. 관객이 없으면 발레도 없어요. 그들에게 진심을 보여야 하고 그 속에서 무용수도 성숙하고 발전하죠.”
강 단장은 올해 발레단 공연에 평창 동계올림픽 성공 개최 기원을 담고 싶다. 신작 ‘안나 카레리나’는 아예 기념 무대로 꾸민다. 이유는 명료하다. 지금 온 나라가 한마음으로 바라는 일이라서다. “여러 가지 일이 있었지만 한국을 대표하는 이 행사가 잘못되길 바라는 사람은 없잖아요. 국민이 한뜻이 될 수 있도록 국립발레단도 응원하려고 합니다.”
박동미 기자 pdm@munhwa.com
사진 = 국립발레단 제공
놓쳐선 안 될 각 발레단 주요공연
◇ 유니버설발레단
① 오네긴 = 3년 만에 올리는 작품. 소설 ‘예브게니 오네긴’을 발레로 만든 것으로, 차이콥스키의 음악과 존 크랑코의 안무가 이상적으로 배합됐다. 문훈숙 단장은 “부부 무용수 황혜민-엄재용이 일찌감치 캐스팅됐다. 이번에 못 보면 또 3년 후를 기약해야 한다”고 귀띔했다. 11월 24∼26일, 서울 예술의전당.
② 심청 = 한국 대표 창작 발레. 지난해 30주년 공연을 했다. 문 단장은 “30년간 끊임없이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노력했다. 심청 그 자체가 유니버설발레단의 역사”라고 했다. 5월 19∼20일, 천안 예술의전당.
③ 디스 이즈 모던 = 대한민국발레축제에서 선보이는 무대. 독일 안무가 레이몬도 레베크의 신작이 소개된다. 6월 8∼10일, 서울 예술의전당.
◇ 국립발레단
① 안나 카레리나 = 평창 동계올림픽 성공 개최를 기원하는 무대. 크리스티안 슈푸크의 안무작으로, 이번 공연이 아시아 초연이다. 비극적인 운명을 짊어진 주인공의 이야기가 라흐마니노프의 음악과 함께 펼쳐진다. 11월 1∼5일, 서울 예술의전당.
② 허난설헌-수월경화 = 솔리스트 강효형이 안무한 신작. 조선 중기 천재 시인 허난설헌을 소재로 만들어졌다. 강수진 단장은 “젊은 무용수가 바라본 역사가 발레로 어떻게 표현되는지 흥미롭게 볼 수 있는 작품”이라고 말했다. 5월 5∼7일, 서울 예술의전당.
③ 스파르타쿠스 = 인기 레퍼토리. 로마 검투사 스파르타쿠스의 이야기로, 발레리노가 전개를 주도한다. 에너지 넘치는 남성 무용수들의 군무가 일품. 6월 23∼25일, 서울 예술의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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