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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이용식 논설주간 게재 일자 : 2017년 03월 20일(月)
정치 허무주의를 경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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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식 논설주간

영웅 정치의 시대는 갔다. 국부(國父)로도 불리던 대통령, 산천초목이 떤다던 대통령, 대통령에 앞서 선생님이었던 대통령, 정치 9단이라던 대통령을 다시 보기는 어렵다. 걸출한 사람이 없어서가 아니라 세상이 변했기 때문이다. 다수의 강력한 지지를 받으려면 시대적 쟁점이 적고 단순해야 하는데, 너무 많고 복잡하다. 게다가 일거수일투족이 공개되고 빛의 속도로 전파되는 SNS 시대다. 이미 2세기 전 민주주의 태동기에 헤겔은 ‘(시시콜콜 아는)하인에게 영웅은 없다(No man is a hero to his valet)’고 설파했었다. 엘리트 정치도 막을 내렸다. 일반인은 더 이상 전통적 여론 주도층을 추종하지 않는다. 그나마 조금 남아 있던 권력자에 대한 경외감을 박근혜 전 대통령이 완전히 무너뜨리고 있다.

이런 와중에 대선이 50일 앞이다. 1987년 민주화 이후 30년 동안 언제나 조기(早期) 과열을 걱정했는데, 이번엔 정반대다. 시간에 쫓긴 정당과 주자들이 헐레벌떡 뛰다 보니 스텝이 꼬이고, 그럴듯한 대통령감 등장은 더욱 어렵게 됐다. 특히 보수 정치권 사정이 딱하다. 여론 지지도 5% 주자가 드문 데다 모두 합쳐도 야당 유력 주자의 절반 수준이다. 게다가 이런 불균형은 한편에선 정치적 오만을, 다른 편에선 정치 허무주의를 불러온다는 점에서 진보를 위해서도, 국가를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다.

최근 유권자 사이에서 신문도, TV 뉴스와 종편 토론 프로그램도, 심지어 정치적 대화도 회피하는 정치 외면 현상이 확산되는 배경이다. 특히 건국과 민주화에 헌신한 60대 이상 세대에서 심하다. 그러나 그래서는 안 된다. 어려운 일도 아니다. 시대 변화에 대응해 눈높이만 조정하면 된다. 후보 개인에 대한 기대치를 낮추고, 그 대신 ‘팀’과 시스템을 중요하게 바라보면 되는 것이다.

국정 비전과 정치적 매력, 인품에다 참모진까지 완비한 ‘타고난 대통령’은 없다. 언제든 언론의 질문에 답하고, 반대세력과 소통할 수 있는 자질만 갖춰도 된다. 이나마 없으면 또 불행해진다. 정치 리더십에 대한 이런 기대 절하(切下)는 글로벌 현상이다. 지난해 미국에서는 ‘비호감 후보’가 뽑혔다. 프랑스는 다음 달 23일 대선을 앞두고 주요 후보가 모두 수사 선상에 오르면서 버락 오바마 영입 청원까지 일어나고 있다.

그래도 비관할 필요는 없다. 주자 중에는 대통령이 되기만 하면 역대 대통령 못지않게 잘할 수 있는 사람이 없지 않다. 20년 전 출마를 위해 동분서주하던 어느 중진은 우락부락한 외모 때문에 ‘머리가 없다’는 비방에 시달렸는데, 당당히 “전두환, 노태우도 했는데, 내가 못할 리 없다”고 말했다. 당시 쓰러져 아직 병상에 있는 그의 말은 요즘 정치권에도 합당하다. 1970년 후보 도전에 나선 양김도 ‘구상유취’ 얘기를 들었다. 최근 미국 대통령들인 빌 클린턴, 조지 W 부시, 버락 오바마 역시 출발은 미미했다.

이제부터가 중요하다. 각 정당은 원칙대로 후보를 선출해야 한다. 유권자들은 주자들의 장점을 봐야 한다. 더 큰 목적을 위해 작은 차이를 극복하도록 압력을 가해야 한다. 혹 마뜩잖은 후보로 결정될지라도 선거 자체를 기권하는 방향으로 흘러선 안 된다. 강력한 주자가 없는 위기는 제도·노선 중심의 진정한 보수정당을 만들 기회도 된다. 올해로 창당 163년을 맞은 미국 공화당의 출발이 그랬다. 정치 신인 에이브러햄 링컨이 대선 후보로, 또 대통령이 되어 경쟁자들과 ‘라이벌들의 팀’을 만들어 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미국 연방도 살려냈다.

보수 정치권은 자유민주주의 체제 보수(補修)의 기치 아래 ‘연합팀’으로 뭉치면 된다. 어차피 예비내각도 필요하다. 태극기 시위와 모금에 동참하는 ‘행동하는 보수’도 등장했다. 탄핵 반대를 지나 보수 집권으로 옮겨간다면 훌륭한 동력이 될 것이다. 불가피한 합종연횡을 넘어 개헌으로 국가 시스템 재설계까지 이뤄내면 금상첨화다.

이제 헤겔 얘기를 끝까지 들어볼 때다. 하인에게 영웅이 없는 것은 ‘영웅이 영웅 아니어서가 아니라 하인이 하인이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정신현상학이라는 난해한 분야의 예시이지만, 영웅을 알아보지 못하고 헐뜯는 것에 대한 비판으로도 해석된다. 시대가 영웅을 만들든, 영웅이 시대를 만들든, 영웅의 출현을 기다리기보다 찾아내고 키우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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