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빈 환영식에 안나타나는 花童… 진땀 빼는 순간”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의전 베테랑’으로 불리는 정현규 현대의전연구소 소장은 “의전에서 원칙과 기준이 분명해야 국가의 품격을 높일 수 있다”고 말한다. 김동훈 기자 dhk@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이명박 대통령 취임식을 앞둔 2008년 2월 24일 국회의사당 행사장에서 당시 정현규(가운데) 의정담당관이 한덕수 국무총리 등에게 준비상황을 브리핑하고 있다. 정현규 제공

- ‘의전으로 보는 현대사’ 펴낸 정현규 소장

정상회담 국가의전은 종합예술
완벽하게 준비해도 곳곳 지뢰밭

의전에서 생명은 ‘원칙과 기준’
시비 부를 요인은 사전에 차단
글로벌 시대 국가품격의 상징

34년 공직중 18년 의전업무
‘현대판 의궤’로 정리 책 발간

“정상회담이나 대통령 취임식 같은 국가 의전(儀典) 행사는 그야말로 종합예술이지만, 준비가 아무리 완벽해도 행사 과정은 지뢰밭의 연속입니다. ‘행사는 잘해야 본전’이란 말도 있습니다. 하지만 글로벌 시대의 의전은 국격을 높이는 ‘남는 장사’가 돼야지요.”

남북정상회담 등으로 국가 의전이 관심을 모으는 가운데 34년의 공직 생활 중 절반이 넘는 18년을 국가 의전 업무에 종사하며 ‘의전 베테랑’으로 통해온 정현규(64) 현대의전연구소 소장이 ‘국가 의전으로 다시 보는 대한민국 현대사’를 최근 펴냈다. 정 소장은 1981년 옛 총무처 의정국에서 7급 공무원으로 의전 업무를 시작해 행정안전부의 의정담당관까지, 제13∼17대 대통령 취임식을 비롯해 국빈 방한, 국가장(國家葬), 국경일, 국제회의 등 수많은 국가 의전의 실무와 지휘를 수행한 ‘산증인’이다. 9일 문화일보에서 만난 정 소장은 “대한민국의 발전 과정과 궤를 같이해온 우리의 국가 의전을 ‘현대판 의궤(儀軌)’로 정리하고 싶었다”고 말문을 열었다.

의전의 밑바닥부터 해온 오랜 경험 때문이겠지만, 정 소장의 의전에 대한 철학은 고지식할 만큼 뚜렷했다. 그는 “서양에서 외교적 서열 문제가 국가 간 분쟁으로 비화한 사례가 적지 않아 우여곡절 끝에 의전(protocol)이 오늘날 국제 의전 규범으로 정립됐다. 의전에서 ‘원칙’과 ‘기준’은 한 국가의 품격을 나타낸다”고 말했다. 특히 국가 정상의 의전에는 나중에 시비의 단서가 될 소지를 피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2007년 10월 노무현 대통령의 방북 당시 의전 논의 과정에 군사분계선 부근 환송 연도에 한반도기를 걸자는 의견이 제기됐다. 그는 당시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 남북의 정치회담에 나서는 만큼 그 상징으로 태극기를 걸어야 원칙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의견을 내 이의 없이 태극기를 걸게 됐다”고 말했다. 정 소장은 안팎의 평가가 좋았던 이번 남북정상회담의 의전에 관해 “의전 관계자들의 노고가 피부로 느껴졌다”면서도 “정상회담이 이뤄진 공동경비구역 내에서 김정은의 군 의장대 사열이 원칙과 기준에 맞는지 생각해 볼 일”이라고 몸에 밴 의전 원칙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정상회담의 의전은 기획 과정부터 상대 정상을 고려한 미술, 음악, 노래, 춤 등 문화 콘텐츠와 음식, 술의 선택까지 꼼꼼히 살피는 종합예술인 셈”이라며 “완벽한 기획과 예행연습을 거쳐도 돌발 상황은 나올 수 있어, 행사 필수 요원의 기분과 건강 상태까지 꼼꼼히 챙긴다”고 말했다. 그렇다 해도 수많은 국가 의전에서 돌발 상황은 발생한다.

“남북 간 외교 경쟁이 치열했던 1980년 후반까지 우리 대통령이 직접 김포공항에서 국빈을 맞았습니다. 한 번은 ‘행사의 꽃’인 초등학생 남녀 화동(花童)이 인솔 교사와 오는 도중에 신촌 일대의 학생 시위로 교통이 마비돼 예정 시간에 나타나지 않았어요. 휴대전화도 없던 시절, 발을 동동 구를 수밖에요. 외국 정상을 맞기 직전 간신히 도착해 환영식을 마칠 수 있었던, 진땀 빼는 순간이었습니다.”

“1980년대 중반 세종문화회관에서 삼부 요인이 참석하는 제헌절 경축식 직전, 기념사를 낭독할 제헌동지회장이 원고를 깜박 차에 두고 왔다는 거예요. 부랴부랴 회관 뒤편의 주차장을 뒤져 차량을 발견했지만, 운전기사가 없었어요. 차창을 깨려 달려들던 차에 옆 차의 운전기사가 철사 고리를 가져와 문을 열어줘 낭독 직전에 전달할 수 있었습니다. 그다음부터 ‘사람을 빼고는 모두 두 벌씩 준비한다’는 의전 원칙을 세웠습니다.”

정 소장 등 8명의 의전연구소 전문가가 참여한 이번 책에는 ‘의전 십계명’이 들어 있다. 그중 하나는 ‘의전의 핵심은 서열’이라는 것. “1987년 헌법에 신설된 헌법재판소의 수장은 정부로부터 삼부 요인에 준하는 예우를 받았으나 대통령, 국회의장, 대법원장, 국무총리 다음 순서였어요. 초기 헌법재판소에서는 ‘의전 순서는 헌법질서와 관계가 있는 만큼 적어도 국무총리 앞에 자리 배치를 하는 게 맞는다’면서 각종 경축식에 행사장 앞에 왔다가 자리 배치를 보고 돌아가기도 했습니다. 2006년 3월에 청와대가 국무총리보다 앞서는 것으로 정리하면서 논란에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정 소장은 “초라했던 정부 수립 초창기보다 오늘날 국가 의전은 국력의 성장과 함께 크게 발전했다”며 “실시간으로 전 세계에 전달되는 글로벌 시대에 국가적 의전 행사는 국격의 척도란 점이 더 부각하는 만큼 이 책이 후진들에게 도움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 책은 800여 장의 사진을 담아 대한민국 의전 역사와 현대사의 발자취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했다. 비매품으로 행안부와 외교부 등 의전이 많은 정부기관과 국립중앙도서관, 국회도서관 등에 무료로 배포할 계획이다.

엄주엽 선임기자 ejyeob@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