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생각하며>무궁화·진달래·철쭉의 ‘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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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호 나남출판·나남수목원 회장

생명을 돈으로 환산하는 천박한 세태
몇해전 군부대 무궁화동산 사업 열풍

납품업자 묘목 사진 찍은후 내팽개쳐
무궁화는 스스로 생존하여 꽃 피워

수십만년 생태계 속에 주인공은 나무
우리는 잠시 지나가는 나그네일 뿐

무궁화 꽃들이 파란 하늘을 캔버스 삼아 두둥실 떠다닌다. 고개를 젖혀 하늘에 떠 있는 꽃들의 군무(群舞)를 지켜보는 첫 경험의 현기증으로 가슴이 먹먹해졌다. 20여 년 전 전남 진도의 한 초등학교 폐교를 인수해 미술관과 정원을 꾸민 매제(妹弟) 집에서 받았던 충격이다. 교사(校舍) 앞의 백 년 가까운 동백나무 군락을 자랑하는 그이의 목소리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숙직실 곁에 꽃이 만개한 50년이 넘는 거대한 무궁화나무에 정신을 빼앗겼다. 수많은 선생님과 학생들의 관심도 받지 못하고, 학교 뒤뜰 후미진 곳에서 고독하게 자신만의 존재를 되새기며 ‘나절로’ 인고의 세월을 보냈을 것이다.

이제까지, 무궁화는 학교 가는 길의 경계목 정도의 키 작은 나무로만 알았던 나는 사람 키의 두세 배가 넘는 무궁화나무에 압도돼 그동안 나무 사랑의 교만을 부끄러워했다. 사람들의 사치를 부린 가위질만 아니라면 무궁화나무는 이런 거목이 될 수 있는 자연 그대로의 나무 그 자체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두세 해 전, 태풍으로 쓰러져 다시 볼 수 없는 이 무궁화나무에 대한 그리움은 너무 컸다. 그래서 포천수목원 곳곳에 심어두었던 무궁화를 키 큰 나무로 키우기 위해 가지치기에 부지런을 떨었다. 밑동부터 다닥다닥 붙어 나오는 잔가지들을 잘라내 양분이 키로 가서 크게 자랄 수 있게 했다. 벌써 내 키를 훌쩍 넘는 녀석도 많다. 나무는 말이 없다. 나를 어떻게 키울 거냐고 묻지도 않는다. 내가 의도하는 수형(樹形)을 잡아주고 무단 침입하는 덩굴들을 걷어주면 그다음부터 커가는 것은 나무의 몫이다.

나무에게 고맙다고 말하지만, 수십만 년 계속되는 생태계의 순환 속에 주인공은 그들 나무이고 우리는 잠시 지나가는 나그네일 뿐이라는 회한도 스친다. 나무처럼 살며 늙어가기가 쉬운 일이 아니듯이, 온전한 인물이 되기 위해서는 인간적 욕망의 자질구레한 잡사는 애써 외면하거나 희생하는 결단이 있어야 한다. 스스로 선택하는 자유가 인간의 존엄을 높이는 일이지만, 크든 작든 간에 목표를 세운 일을 성취한다는 것은 나무처럼 고독한 일일 수밖에 없다.

몇 년 전에 예산의 지원을 받아 군부대에 무궁화동산을 꾸미는 사업이 전국적으로 일었다. 군인들에게 국화(國花)의 보급으로 충성심까지 고취할 목적이었지 싶다. 그 전에는 블루베리 묘목 열풍에 몰렸던 사람들이 돈이 된다는 무궁화 묘목 군납품 사업에 뛰어든 모양이다. 무슨 무궁화선양사업회라는 곳에서 수목원의 묘목장 비닐하우스를 빌려 달라 했다. 묘목 재배를 배워 보려는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손가락 크기의 묘목 1000개를 꺾꽂이하고 몇 차례 들락거리며 사진을 찍더니 소식이 없었다.

수목원이 쓰던 묘목 밭 500평에 무궁화 묘목 150종(種)을 다섯 그루씩 심은 무궁화동산 시범 전시장도 내팽개쳐졌다. 납품 계약에 필요한 요식 행위였던 모양이다. 생명의 가치를 돈으로 환산하는 천박한 세태를 탓할 수밖에 없는 착한 농부의 마음이 아렸다. 3년이 지난 이번 여름에 형형색색의 무궁화 꽃이 피어났다. 인간의 탐욕에 버려진 묘목 밭의 무궁화 중 절반 가까이가 스스로 생존해 화사한 꽃을 달고 생환한 것이다. 새삼스럽게 아기 무궁화가 크는 재미에 빠졌다. 자연과 벗해 나무를 심다 보면 의도하지 않았던 꽃동산을 품는 기쁨도 생기는 모양이다.

5년 전에 임도(林道) 작업을 하다가 진달래 군락지를 발견했다. 키 작은 나무로만 알았던 진달래가 3m에 가까웠다. 태고의 음향 속에 잠들었던 십여 그루를 호숫가에 옮겨 심었다. 상식의 반전은 그 자체만으로도 유쾌하다. 발아래 내려다보았던 나무들을 이제는 고개를 젖히고 한참을 올려다보아야 한다.

봄날엔 하늘 높이 둥둥 떠 춤을 추는 진달래꽃들은 박경리의 ‘토지’에서 참꽃으로 화전(花煎)을 부쳐 먹고 싶다던 별당 아씨의 금기의 사랑에 도전한 괴로운 환희를 다시 보는 그리움이다. 이때부터 나지막하게 키웠던 철쭉과 소사나무들도 아랫가지를 모두 쳐내며 위로 키워 상식을 뒤집는 유쾌한 배반을 꿈꾸었다. 이제는 제법 줄기가 굵어지고 키도 자라며 억제됐던 나무의 본능을 스스럼없이 드러낸다.

추석 전에 동네 이웃이 산속에 묵어 있는 철쭉나무를 주겠다고 했다. 그이는 한 20년 전원생활에 외로웠던 모양이다. 수목원 정자에서 수담(手談)을 나눈 우아한 바둑 한판의 우정이었다. 내 키를 훌쩍 넘는 50년이 넘는 우람한 철쭉나무를 품에 안을 때까지 며칠 밤을 설쳤다. 생전 처음 보는 웅자(雄姿)에 감동을 갈무리하기 쉽지 않아서였다. 가을이 오는지도 몰랐다.

오랜 세월 한 뿌리에서 수십 개의 줄기를 내밀며 당당한 자태를 뽐내는 철쭉나무를 정자 앞 호숫가에 옮겼다. 쏟아지는 맑은 햇살에 맘껏 어깨 펴고 하늘로 치솟기를 바랐다. 바람 맑은 봄날 키 큰 진달래나무 꽃들에 이어 피어날 철쭉의 고운 빛깔이 벌써 눈앞에 선연하다. 중간 호숫가에도 늙은 밤나무를 베어낸 허전한 자리를 대신하게 모셨다. 책 박물관 앞의 호숫가에도 장송 숲과 자작나무 숲길의 매력 포인트에 자리를 내주었다. 잔디밭 초록 공간이 확장됐다.

수풀에 갇혀 햇볕 차지하기 경쟁으로 한쪽으로 기울어진 녀석은 비탈진 곳에 심어 균형을 잡게 했다. 제일 잘난 한 그루는 수목원 초입에 자리를 잡아 열두 명의 벅수와 고졸한 오층석탑을 양손으로 마주 잡고 처음 찾아오는 사람들을 반갑게 맞이하라고 했다. 붉은 구름바다 같은 철쭉나무 꽃들과 여한이 없는 사랑에 빠질 것 같은 찬란한 봄을 벌써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