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북디자이너 이보용 그래픽. 푸른역사 제공
- 서울 탄생기 / 송은영 지음 / 푸른역사
작가 16人의 작품 110편속 60~70년대 현대도시로의 재탄생 과정 조명
‘그많던 싱아…’의 ‘사대문안’,‘서울의 초상’의 ‘시골뜨기’… 서울 거주 열망 표현
‘낙토의 아이들’속 복부인, 강남개발 광풍으로 시작된 계급분화 과정 그려
지난 1964년 발표된 김승옥의 단편 ‘무진기행’에서 화자인 ‘나’와 사랑을 나눈 무진의 음악선생 하인숙의 첫 마디는 “서울에 가고 싶어요, 단지 그것뿐이에요”이다. 하인숙이 자신을 구원해 달라는 간청이 ‘서울에 가고 싶다는 것’이었다. 서울에서 출세했지만 거기서 절망한 ‘나’가 하인숙에게 쓴 사랑한다는 편지를 찢어버리고 결국 현실로 회귀하는 공간도 ‘서울’이다. 1965년 ‘사상계’에 단편 ‘퇴원’으로 등단한 이청준은 직접 쓴 그해 연보에서 소설 당선을 “잘하면 서울에서 다시 쫓겨나가지 않을 수 있는 구실”을 마련한 것이라며 “서울을 사수하자”고 적고 있다. 서울은 “한국사회의 모든 욕망을 흡수하는 절대적 중심의 공간”이었고, 지금도 그렇다. ‘죽기 전에 서울에 집 하나 장만할 수 있을까’는 요새 젊은이들 절망을 집약하는 말이다.
‘1960~1970년대 문학으로 본 현대도시 서울의 사회사’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은 도시계획이나 정책을 위주로 다룬 기존의 서울개발사와는 완전히 차별된다. 1970년대 초반 서울에서 태어나 강남과 강북을 오가며 자란 저자 송은영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학술연구교수는 대학 학부에서 사학을 전공하다 문학으로 옮겨 1960∼1970년대 서울의 도시문화와 문학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했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압구정동 현대아파트와 소 밭갈기를 하는 농부. 두 공간의 계급적·시간적 거리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전민조, 1978)
이 책은 1960∼1970년대 서울이 현대도시로 재탄생하는 과정을 ‘문학’을 통해 들여다본다. 김승옥의 ‘서울 1964년 겨울’, 박태순의 ‘서울의 방’, 최인훈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등 당대 작가 16인의 110편이나 되는 소설을 분석해 일반적인 ‘근대성’이나 ‘도시성’의 범주로 환원되지 않는 서울이란 장소의 사회사를 구성했다. 문학은 “통계와 다른 진실”이나 “역사적 사실에 남아있지 않은 사실”을 보여주기도 한다. 무엇보다 객관적 사실과 어긋난 재현일지라도 당시의 사회상이나 “문학 텍스트들이 허구적 표상 층위에서 구성한 서울에 대한 관념과 이미지” 등 무의식을 드러내준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은 문학 작품에서 객관적 데이터를 얻고자 하는 ‘문학지리학’과도 결이 다른 시도다.
책은 본격적인 서울 도시개발의 전사(前史)인 1961∼1966, 도시개발의 광풍이 몰아친 1967∼1972, 강남개발이 본격화된 1972∼1978 등 3부로 나누어 서울의 변천사를 다룬다. 책에 따르면, 서울이란 도시공간의 변화 방향은 1962년 시행된 도시계획법과 건축법, 1963년 행정구역의 확장이 지리적 토대가 됐으니 지금의 서울은 1960∼1970년대에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한국전쟁 전후를 다룬 박완서의 장편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는 개성을 떠나 서울로 이사하면서 어머니가 딸에게 반드시 ‘문안’, 곧 사대문 안에 살아야 한다고 단호하게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문안’만 진짜 서울로 인정할 수 있다는 모친의 고집이다. 이런 인식은 1960년대 중반까지 이어졌다. 그러다 보니 이호철의 ‘서울은 만원이다’(1966)가 말해주듯 인구는 조밀했고, 인구의 급증은 1960∼1970년대는 물론, 1992년 정점을 찍을 때까지 장기적 추세였다.
최일남의 ‘서울의 초상’에서 서울에 살려는 열망으로 입성한 성수는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이라거나 장사치들과 우연히 건네는 한마디 말에도 깍듯한 서울 말씨를 쓰려고 애썼”는데, 서울 어디를 가든 시골뜨기처럼 보여서는 안 된다는 강박관념이 있었다. 하지만 이미 서울은 토박이들의 것이 아니라, 해방 이후 다양한 공간에서 이주해온 이주민들의 도시였다. 상경민들이 “과거의 자아와 단절”하고 “새로운 ‘자기’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 일은 사실상 서울 사람의 정체성과 이미지를 새롭게 구성했다.
박정희 정권의 제1차 경제개발계획이 완료된 1966년은 한국 자본주의 성장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한 해로, ‘불도저’로 불렸던 김현옥 서울시장의 개발정책 등으로 서울은 위로부터 강제적 변화를 겪게 된다. “파란 불꽃을 폭죽처럼 터뜨리고 지나가는 전차”(‘서울의 방’)가 1968년에 사라지고, “급히 어디론가 가야 할 사람들이 수없이 떠났는데도 구보 씨는 좀처럼 잡을 수 없는”(‘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좌석버스란 이름의 입석버스가 생겨났다. 전차에 비해 버스는 전투적 출퇴근길에 어울리는 교통수단이었다. 사람들의 삶이 점점 경쟁 속으로 말려드는 모습이었다.
부동산 투기 붐이 절정에 이른 1978년 발표된 박완서의 ‘낙토의 아이들’에서 평민 아파트조차 겨우 마련할 수밖에 없었던 ‘나’는 “하루하루 생기 발랄해지고 당당해지는” 아내의 “기분 나쁘고도 걷잡을 수 없는 활기”에 당황한다. 이른바 강남개발의 붐 속에 ‘복부인’의 등장을 그렸다. 이 같은 광풍은 1975∼1978년 사이에 연작으로 나온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서 보듯, 구 동네와 새 동네, 빈민과 중산층 등 빈부 격차가 벌어지고 계급분화와 위계화가 시작되는 시기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식민지 시대에 세워진 건물들은 거리낌 없이 파괴되고, 개인의 기억과 체험이 깃든 장소성 따위는 서울에서 중요하지 않게 됐다. 저자는 “빠르고 항상적인 변화라는 기본적인 속성을 가진 서울의 개발에는 1960∼1970년대에 만들어진 현대성의 지향, 발전주의 이데올로기, 일상과 문화의 아메리카니즘이 뒤섞여 있다”며, 하지만 “이 시기 서울에 정착해 서울 사람이 되는 데 성공한 사람들은 얼마간 동조자이자 공범자”라고 말한다. 서울은 권력과 자본의 폭력적 기획과 사람들의 욕망이 복합적으로 뒤엉킨 공간인 셈이다. 568쪽, 2만9000원.
엄주엽 선임기자 ejyeob@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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