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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파워인터뷰 게재 일자 : 2019년 02월 15일(金)
“묘법은 道 닦듯이 하는 그림작업… 생각을 비워내는 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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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서보 화백이 작업실 겸 거처인 ‘기지 아트베이스(서울 서대문구 연희동)’에서 물감이 잔뜩 묻은 작업복 차림으로 작품세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박 화백은 구순을 코앞에 둔 나이에도 하루 8시간씩 매일 그림 작업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동훈 기자 dhk@

한국 단색화의 거장 박서보 화백

묘법 출발점은 네살배기 아들
글씨쓰다 체념하는 데서 착안
긋고 덮고 그어… 버리는 작업
서양 모노크롬과는 전혀 달라

끊임없이 변화 추구하는 수행
2000년대이후 화려한 色으로
2018년 19억원에 작품 팔려
뒤늦게 인정받자 아내는‘눈물’
“이제 한지조각 붙여 작업할것”


박서보 화백은 내년이면 구순(九旬)이 된다. 이는 오랜 화업 못잖게 그가 겪어온 시대의 굴곡도 떠오르게 한다. 6·25전쟁과 해방, 독재와 민주화, 아날로그와 디지털 시대 등 격동하는 근현대사는 그의 작품이 탄생한 배경이었고, 동시에 삶의 무대이기도 했다. 그래서 박 화백이 걸어온 길은 그대로 한 편의 생생한 한국미술사다. 1950년대 패기와 열정, 분노, 토로로 얼룩진 앵포르멜(informel)에서 1960년대 기하학적이며 옵티컬(optical)한 평면작업과 설치작업, 1970년대 초반부터 등장해 1980년대를 관통하며 지금에 이르는 전기, 후기 묘법(描法, ecriture) 시리즈, 그리고 지금의 원색 묘법 등 한 세기에 이르는 동안 끊임없이 변신하고 도전하며 우리 현대미술을 이끌어 왔다. 이제 그는 세계인들에게 ‘한국적 추상미술’ 즉 단색화의 최고봉으로 알려지며 ‘거장’의 반열에 올랐다. 그러나 아직 그는 멈추지 않았다. 지난해 8월 완공 후 새롭게 보금자리를 튼 연희동의 ‘기지 아트베이스(GIZI Art Base)’는 ‘기지’라는 타이틀처럼 ‘만년 청년’인 그가 나이에 아랑곳없이 패기와 열정을 불태우는 공간이다. 기지 아트베이스에서 작업 중인 박 화백을 만났다.

지난해 3월 홍콩 크리스티 경매에서 박서보 화백의 작품인 ‘묘법 No.37-75-76’이 172만 달러(약 19억4000만 원)에 낙찰됐다. 수수료를 포함하면 200만 달러가 훨씬 넘는 액수다. 1980년대만 해도 같은 규모의 작품이라고 해도 300만 원을 받기 어려웠다고 한다.

그동안 어떤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팔리지도 않는 그림을 참으로 억척스럽게 그렸습니다. 게다가 대부분 500호, 1000호짜리 대작이었는데 어차피 안 팔리는 것 기운 있을 때 하자는 심정이었죠. 그러던 중 그림값이 갑자기 뛰니 왜 진작 알아봐 주지 못했냐 하는 심정도 들었어요.”

기지 아트베이스 1층의 갤러리 겸 라운지에서 만난 작가는 구순을 얼마 안 남긴 나이에도 또렷하게 본인의 소회를 밝혀 나갔다. 바로 전에도 작업 중이었는지 작업복 차림의 옷에는 여기저기 물감이 묻어 있었다.

지상 4층, 지하 2층의 기지 아트베이스는 일종의 근린생활시설로 박 화백의 주거공간과 갤러리, 작업실을 겸하고 있다. 건축가 조병수가 설계했다. 갤러리와 외부의 돌과 자갈, 이끼로 이뤄진 정원 사이에는 벽 대신 통유리가 설치돼 정원의 박 화백 두상이 훤히 내다보였다. 두상은 조각가 박석원의 작품이다. 갤러리에는 30여 점의 에스키스(작품설계도)도 전시돼 있다. 박 화백은 본격적인 인터뷰에 앞서 집에 대해 간단히 소개했다.

“이 집은 지금까지 잘살아온 것에 대한 감사한 마음을 기념하기 위해 지었습니다. 그동안 60년 넘게 같이 살며 고생해온 집사람을 비롯해 우리 가족에게는 일종의 감사패 같은 공간입니다.”

박 화백은 후일 이 건물을 ‘박서보 기념관’으로 운영할 계획이라며 현재 만들어져 있는 서보미술문화재단 외에 별도의 재단을 하나 더 설립한 후 작품을 모두 기증하고 싶다는 바람을 피력했다.

박 화백은 그림에 문외한인 이들에게도 ‘묘법’의 대가, 단색화의 최고 권위자 등으로 유명하다.

묘법이란 ‘그린 것처럼 긋는 방법’을 지칭하며 프랑스어 표기인 ‘ecriture’도 ‘쓰기’란 의미를 지녔다. 따라서 말 그대로 묘법은 선을 긋는 행위의 결과물이다. 캔버스에 물감으로 밑칠하고 그것이 채 마르기도 전에 연필로 선을 긋고, 또 물감으로 지워버리고, 다시 그 위에 선을 긋는 행위를 되풀이하는 과정을 통해 하나의 작품이 탄생한다. 단색화로 더 잘 알려진 묘법 회화의 탄생은 196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묘법 회화에 앞서 박 화백은 1956년 ‘반국전’ 선언 후 표현주의적 추상예술을 지향했던 앵포르멜 작가였다. 당시 전후의 불안한 상황을 반영하듯 외향적이면서 거친 표현이 넘치는 그림들은 다분히 ‘자기 파괴적’이었다. 그의 작품인 ‘원형질’ 시리즈는 어두운 색조의 찐득한 추상 속에 비극적인 한국 근대사의 현실을 투영했다.

그때 작품에 대해 박 화백은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고 나의 불만을, 분노를 폭발시키는 것 같았다”며 “인간이 총 맞아 죽을 때 어머니를 찾는 마지막 외마디 비명을 작품에 담고 싶었다”고 회고했다.

묘법과의 만남은 그가 1966년 모교인 홍익대 교수를 그만두고 얼마 뒤 시작됐다. “집에서 쉬며 ‘너는 누구냐’는 반문이 계속 들었습니다. 그리고 왜 서양 사람들이 하는 것만 따라 하느냐는 반성도 했고요. 노자, 장자부터 불경까지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습니다. 그러면서 모든 덕을 비워내야 한다는 깨달음에 도달했어요. 우리 조상들도 선비가 예술가가 되기 위해 사군자를 치고 붓글씨를 쓰는 것이 아니라 수신하기 위해 작품을 하잖아요. 저도 그쪽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박 화백으로서는 방법이 없었다. 서양화를 전공한 자신이 다시 수묵화에 매달릴 수도 없었다. 잠 못 이루는 날이 계속됐다. 그러던 박 화백 앞에 네 살짜리 아들의 유난스러운 행동이 눈에 들어왔다. 형의 연필로 공책에 그려진 칸에 글씨를 넣으려고 하다가 잘 안 되니까 연필로 그 칸을 아예 그어버리며 마구 문지르는 동작이 목격됐다. ‘체념’이라는 단어가 떠오르며 무릎을 쳤다. ‘바로 이것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묘법의 출발 과정을 보면 느껴지는 사실이 있어요. 진리는 책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변에 널려 있다는 것이죠. 책은 많이 읽되 읽은 것은 다 버리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잘못하면 명문장에 매달리고 갇혀버리는 일이 발생하기 때문이죠. 한약을 먹을 때도 녹용은 안 먹고 녹용의 물만 빼먹잖습니까.”

묘법의 착안과 깨달음에 이르는 중에도 그는 그동안 해왔던 작업을 멈추지 않았다. 현대인의 번잡스러운 형상을 고발한 ‘유전질’ 시리즈도 그중 하나다.

인간의 실체가 빠져나간 허상의 상태를 표현하기 위해 무중력의 느낌을 시각적으로 표현해냈다. 박 화백은 붓 대신 안료를 녹인 스프레이를 이용해 캔버스에 뿌리는 방식으로 작업하다 폐에 손상을 입기도 했다.

그의 작업은 앵포르멜에서 원형질, 유전질 그리고 묘법으로 항상 새로운 길을 모색해 나갔지만, 생활은 나아지지 않았다.

“1970년대 무렵 합정동에 살 때였죠. 작업실이 마땅히 없어 집의 차고를 작업실로 쓰고, 집사람은 보일러실을 개조해 미장원을 했습니다. 진짜 나 자신이 한심스럽게 여겨질 때였죠. 팔리지 않는 그림을 미련스럽게 그리니 한심스러웠던 것이죠. 김창열, 이우환 작품은 잘 팔렸는데 난 미술상들에게 늘 천덕꾸러기, 찬밥 신세였어요.”

생활고 속에 작품을 하면서도 그에게는 철저히 지키는 원칙이 하나 있었다. 새로운 작업을 시도할 때 먼저 4, 5년간 대외적으로는 그동안 해오던 작업을 하는 것처럼 보이게 한 후 혼자서만 반복적으로 새 작업을 연습하는 것이었다.

1966년 무렵 묘법 시리즈 작업을 혼자 할 때는 미처 문을 걸어 잠그지 못해 집에 찾아온 이우환 화백에게 현장을 들키기도 했다. 당시 이 화백이 “작품이 너무 좋다”며 일본에서의 전시를 제안했고, 박 화백은 결국 1970년대 초반 이 화백의 제안대로 일본에서 전시를 하기도 했다.

▲  “예술은 변화하지 않으면 추락한다. 동시에 변화해도 추락하는 것이 예술이다.” 박서보 화백의 평소 지론이다. 이에 대해 박 화백은 “변화를 추구하되 제대로 변하라는 것”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김동훈 기자 dhk@

“작업이 내 몸에 체화돼야 외부에 발표하고 본격적으로 작업을 했습니다. 좋은 술도 오래 숙성돼야 맛있잖아요. 서양의 대가들이 하루아침에 망하는 것도 개념과 아이디어에 급급하기 때문입니다.”

그가 우직하게 매달린 묘법이 인정받는 날이 드디어 왔다. 지난 2015년 베니스비엔날레 특별전으로 벨기에 보고시안재단이 주최하고 국제갤러리가 후원한 ‘단색화’전에 등장한 박 화백의 묘법 그림들이 해외 유명 컬렉터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2016년에는 데이미언 허스트 등의 전시로 유명한 영국 ‘화이트큐브’에서 한국인 최초로 개인전을 열기도 했다. 작품은 전시가 개막하기도 전에 다 팔려 나갔다. 팔순을 넘긴 나이에 해외 화단에서도 그를 인정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동안 뒷바라지하며 고생만 했던 집사람이 ‘벽지 같다’며 외면받던 내 작품이 세계적인 전시장에 내걸리자 눈물부터 보이더군요.”

아들의 낙서에서 비롯된 ‘연필 묘법’으로 시작했지만, ‘묘법’이라는 이름 안에서 부단히 변화를 추구했다. 작가는 1980년대부터는 종이 대신 한지를 이용해 대형 화면에 선을 반복적으로 만들어 냈고, 2000년대부터는 모노톤을 벗어나 밝고 화려한 색채들을 쓰기 시작했다.

원색 묘법에 대해 박 화백은 일화를 들려주었다. “2000년 도쿄(東京)화랑에서 개인전을 할 무렵이였습니다. 마침 당시 단풍이 한창일 때였죠.

전시 개막을 마치고 후쿠시마(福島)로 단풍 구경을 갔습니다. 산에 올라 계곡을 내려다보는데 골짜기의 단풍 모습이 마치 나를 향해 쳐들어오는 불길 같았어요. 나를 타 죽이려는 듯요. 그때 깨달았습니다. 자연은 위대하다고. 다음 날 산 뒤편의 호수를 찾았는데 물에 비친 단풍 빛이 참 보기 좋았습니다. 새빨간 단풍이 수면 위에서 바람 방향에 따라 색을 바꾸고 있었습니다. 그때 이후로 제 묘법 그림에 원색이 등장하기 시작했죠.”

박서보 화백은 그동안 죽을 고비를 세 번 넘겼다. 첫 번째가 60대 중반에 찾아온 심근경색, 두 번째가 2009년 발병한 뇌경색, 그리고 얼마 전 급격히 오른 혈당으로 인한 고통이 바로 그것이다. 뇌경색으로 쓰러진 이후에는 캔버스를 들 힘이 없어 조수를 고용하기도 했다. 당시 박 화백은 “처음에는 물을 전라도에서 퍼왔건, 한라산·백두산에서 퍼왔건 내 그릇에 담으면 다 내 물이니 상관없다고 생각했다”며 “얼마가 지나자 이 그림은 수신을 위한 그림이 아니고 대리만족을 주는 그림이라는 반성이 들었다”고 술회했다.

요즘 박 화백은 조수들을 대부분 내보내고 밑칠 돕는 조수만 일주일에 2, 3일 가량 찾아와 일을 돕고 있다. 2009년까지는 하루에 14시간 이상 작업했지만, 지금은 오전 11시부터 오후 8시까지 식사시간 빼고 8시간가량 작업한다.

“이제 대작을 못 해요. 한쪽 다리가 시원찮아 일주일에 물리치료를 두 차례씩이나 받습니다. 한지를 조각보처럼, 작은 토막토막 이어붙여 나가는 작업을 보여줄 예정입니다.”

박 화백은 평소 “변화하지 않으면 추락한다. 그러나 변화해도 추락한다”는 말을 즐겨 한다. 변화를 추구하되 제대로 변하라는 얘기다. 새로운 작품 발표에 앞서 4, 5년간 대외적으로 공개하지 않고 작업하는 것도 그 같은 지론과 무관치 않다. 여기에는 또 “남의 것을 곁눈질로 베껴 제 것처럼 보여주면 금방 추락한다”는 충고도 담겨 있다.

그의 작품을 일반적인 추상의 언어, 더 구체적으로는 서양미술의 문맥과 비교하며 ‘코리안 모노크롬’이라고 설명하는 견해도 많다. 그러나 박 화백은 이 같은 주장에 단호히 맞선다.

“묘법은 도(道) 닦듯이 하는 작업이에요. 그림이란 내 생각을 표현하는 마당이 아니라 비워내는 마당이죠. 일종의 수행입니다. 엇비슷해 보이는 ‘묘법’ 안에서도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해 왔다고 단언합니다. 어떻게 이런 작업이 ‘개념’에서 출발한 서양의 모노크롬과 같을 수 있겠습니까.”

이 같은 주장을 하며 박 화백은 1983년 일본 교토(京都)에서 열렸던 국제종이회의에서 자신이 밝힌 ‘주객전도론’이 큰 반향을 일으켰던 사실을 공개했다.

“참신하고 새롭다는 반응이었습니다. 종이 위에 그리는 것이 나무판에 그리는 것하고 똑같으면 종이에 그릴 필요가 뭐 있냐. 종이 특질이 드러나도록 작가는 뒤로 물러서야 한다. 쉽지 않은 이야기죠. 이 주장이 현장에서 크게 주목 받았습니다.” 종이의 물성을 살려야 한다는 주장으로 종이를 표현의 도구로만 여겨온 서구 화단에서는 확실히 신선한 이론이었다.

2000년대 들어 한때 박 화백은 “아날로그 시대의 화가로 빠른 속도의 디지털 시대에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라는 회의가 들며 “너절한 작가로 추락하는 것보다 차라리 죽어버리는 것이 편하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묘법’으로 깨달은 ‘비움의 미학’이 그를 또 한번 올바른 길로 인도해 주었다.

“아날로그 시대의 예술은 작가가 자신의 이미지를 캔버스에 토해내는 것이죠. 그러면 캔버스는 작가가 토해놓은 것을 받쳐 관람객들에게 보여주고요. 말하자면 그림을 감상하는 이는 이미지로부터 폭력을 당한다고 봐야 합니다. 그러나 디지털 시대에는 달라야 합니다. 어떤 이미지를 강압적으로 들이미는 것이 아니고 종이가, 캔버스가 흡인지가 돼 보는 이의 스트레스와 고뇌를 받아들여 줘야 합니다. 예술은 그처럼 치유의 역할도 해야 합니다.”

흔히 단색화는 어렵다고 한다. 그런데 어떻게 그의 그림에서 치유의 능력을 실감할 수 있을까. 박 화백의 그림에서 그 결과물만을 보고 마음의 평화와 안정을 찾으려고 한다면 이는 성급한 욕심이다. 박 화백의 작품은 만들어지는 과정 그 자체가 ‘비움의 미학’을 실천하는 것이다. 따라서 눈앞에 있는 묘법의 선과 색채에만 집착할 것이 아니라 그림이 완성되기까지의 과정을 명상하듯 더듬어 보는 것도 그림을 감상하는 한 방법일 수 있다.

박 화백은 홍익대 교수로 재직하며 수많은 후학을 양성했다. 그의 묘법은 세계인들이 주목하는 ‘단색화’라는 새로운 화풍을 이끌었고, 제자들은 다양한 방법과 형식으로 단색화를 발전시켜 나갔다.

그러나 현대 화단에는 단색화에도 다양한 유파가 존재한다. 박 화백은 요즘 21세기 젊은 작가들의 작품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지금 젊은 사람들 작품은 너무 ‘개념’에 치중해 있어요. 남의 것을 가져다 짜깁기한 것 같은 작품이 많죠. 잭슨 폴록, 마크 로스코 등의 액션 페인팅으로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았던 미국의 미술이 추락한 것도 개념에 몰입했기 때문입니다. 화장실 ‘변기’ 오브제로 유명한 마르셀 뒤샹이 미국으로 이주하면서 미국 작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고, 그것이 오늘날 미국의 미술을 이처럼 만들어냈습니다.”

‘만년 청년’이라는 별명처럼 박 화백은 여전히 작업하고 있으며 국내외에서 전시도 활발히 하고 있다. 중국의 상하이(上海) 파워롱 미술관에서 지난해 11월 8일부터 올해 3월 2일까지 열리는 ‘한국의 추상미술: 김환기와 단색화’전에도 박 화백의 작품은 주요 전시작으로 소개되고 있다. 오는 5월에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대규모 회고전이 예고돼 있다.

박 화백이 우리 화단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영향력을 고려할 때 그의 작업은 곧바로 우리 근현대미술사다. 그러나 한편으로 보면 한 세기 가까이 살며 격동의 근현대사를 지나온 그의 삶은 그 자체로도 생생한 우리의 근현대사다. 그에 대한 소회를 듣고 싶었다.

이에 대해 그는 일본 교토에서 열렸던 국제종이회의에서 자신에게 던져졌던 질문 한 가지를 소개했다. 그에게 던져진 질문은 “나는 한국미술에 대해 잘 안다. 특징은 금욕적이다. 자기 억제가 강하다. 자기를 드러내지 않고 무화시킨다. 그렇다면 이것은 뭐냐. 박정희 군사정권이 독재하기 때문에 그에 대한 항거냐” 였다. 여기에 박 화백은 “나는 한 번도 정치와 연관해 고려해 본 적 없다. 정치가 나를 지시한 적도 없다”고 말했다.

“2014년 이우환, 하종현 선생 등과 함께 전시할 때 이런 얘기를 나눴습니다. 난 군사정권을 한 번도 고려한 적 없다. 그러나 그 분위기 속에 있었으니, 그렇다면 그 영향이 무언으로서 저항하는 쪽으로 나를 이끌어 갔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떨궈 낼 수 없다고 말했죠. 그 말에 모두 깊이 공감해 주었습니다.”

인터뷰 = 이경택 문화부 부장 ktlee@
e-mail 이경택 기자 / 문화부 / 부장 이경택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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