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생각하며>마음과 무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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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 스님 남해 염불암 주지

“더위가 오면 어떻게 피합니까?”
“더울 땐 더위 속으로 뛰어들어라”

피할 수 없으면 받아들여야
받아들이는 순간 더위 잊게 돼

마음을 열면 그 무엇도 다 친구
더운 여름의 즐거움 마음껏 만나자

막바지 장맛비에 무더위는 한풀 꺾였다지만 복더위는 여전하다. 창을 열어 봐도 습하고 후텁지근한 바람이 몸을 불편하게 한다. 여름철 무더위에 시원함을 주는 것은 멀리 보이는 바다와 눈 아래 짙은 녹음을 드러내며 펼쳐져 있는 숲이다. 긴 숲길을 쫓아가다 만나게 되는 바다, 산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으면 눈은 시원함으로 가득 찬다. 이 무더운 날 신체의 어느 부위든 더위를 피할 수 있다는 사실이 내게는 즐거움이다. 보는 것만으로도 시원해지는 묘미가 산중에는 있다. 하늘을 향해 치솟은 빌딩과 빌딩 숲 사이에 놓인 삶이 아니라, 숲과 바다와 마주한 자연 속의 삶은 이 여름, 나에게는 축복이 된다.

눈을 감고 내가 사는 곳의 이로움을 하나씩 떠올려 본다. ‘고요하다, 공기가 좋다, 멋진 풍경이 있다, 시간의 여유로움과 성스러운 시간의 행진이 있다’. 참으로 많은 것이 있다. 산중에 산다는 것은 바람이 돼 사는 것이고, 달빛이 돼 사는 것이고, 나무처럼 사는 것이기도 하다. ‘어떻게 해야지’하기보다는 그냥 시간을 따라, 자연을 따라 살아가면 된다. 컴컴한 새벽이면 홀로 눈 뜨고 계신 부처님께 예불을 올리고, 이른 아침이면 죽을 끓여 먹고 산길을 따라 포행을 나서고, 볕이 뜨거운 낮이면 책을 보다 졸고, 달이 돋는 시간이면 좌복에 앉아 마음을 궁구하는 것으로 하루를 마감하면 된다. 어찌 보면 무료하고 어찌 보면 단순한 이 삶이 좋은 것은 마음을 비우는 시간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마음을 비운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분별과 아집을 버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해의 토대가 된다. 이해하면 마음이 평안해지고 지혜가 생긴다. 지혜로운 사람은 다투거나 시비하기보다는 화해하고 침묵을 지킨다. 지혜는 다른 말로 하면 자신을 존중하고 지켜나가는 길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을 잘 지켜나가는 일은 가장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세상을 다 정복했어도 자신을 정복하지 못했다면 그는 결국 하나도 정복하지 못한 사람으로 끝나고야 만다.

우리의 삶은 대부분 감각적 토대 위에 기초하고 있고 그것은 매번 변하기 쉽다. 잦은 슬픔과 불행은 우리가 자신을 잃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그것은 대상을 쫓아가는 삶을 의미한다. 긍정적으로 받아들여라. 그것이 지혜의 삶이고 자신을 잃지 않고 사는 길이다.

당나라의 선승 동산양개(洞山良价) 화상에게 학인 스님이 물었다. “추위나 더위가 닥쳐오면 어떻게 피해야 합니까?” “어째서 추위도 더위도 없는 곳으로 가지 않는가.” “추위도 더위도 없는 곳이란 어떤 곳입니까?” “추울 때는 추위 속으로 뛰어들고, 더울 때는 더위 속으로 뛰어들어라.” 더위를 피하고 싶다는 스님의 말에 더위 속으로 뛰어들라는 동산 화상의 말씀은 의아스럽다. 화두다. 그 깊은 뜻을 헤아리기는 어렵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 말은 이런 뜻이기도 하다. 그것을 피할 수 없으면 받아들이라는 의미. 받아들이면 푸념이 사라지고 덥다는 생각까지도 사라진다. 더위 속에서 더위를 잊는 방법은 더위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받아들이는 그 순간이 바로 더위를 즐기는 순간이 된다.

소설가 김동리의 아내였던 고 손소희 작가는 ‘더 진한 열기’라는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여름을 좋아한다. 여름 중에서도 태양이 이글이글 타오르는 한낮을 더 좋아한다. 나는 더위의 승자가 되어 태양을 등 뒤에 두고 혼자서 좋아하고 혼자서 우쭐거리고 있다. 이글거리는 태양이라는 상대와 참으로 힘에 겨운 그 상대와 겨루어 쓰러지지 않고 녹음 사이로 숨어버리지도 않은 채 끝내는 맞서서 이겨 낸 꼭 그러한 기분인 나와 함께 한여름의 한낮을 지금 앉아 있는 것이다.’ 손 작가는 적어도 그 글 속에서는 더위 속에 뛰어들어 온몸으로 더위를 이긴다. 그 순간 그의 마음에는 더위가 없다. 더위를 잊음으로써 더위를 이기는 당당함이 엿보인다.

내게도 여름이 시원하게 다가오던 때가 있었다. 해인사 강원 시절 홍제암 계곡에서 물놀이하던 시절이다. 점심 공양을 마치면 마구 뛰어가 옷을 훌렁 벗고 풍덩 뛰어들던 그 시절. 난만한 웃음소리가 계곡의 물보다 더 맑은 날들이었다. 여름날의 더위는 한낮의 물놀이 한 번으로 충분히 잊을 수 있었다. 여름 한낮 계곡 물의 시원함이 달이 뜰 때까지 남아 있었던 것만 같다. 마음의 난만함은 무더위를 계곡의 시원한 물로 환치해 버리는 놀라운 힘이 있었던 것이다.

여름은 언제나 무덥게 다가온다. 그러나 여름을 맞이하고 보내는 것은 마음에 따라 다를 수가 있다. 무더위에 지친 여름을 맞을 수도 있고 시원한 여름을 맞을 수도 있다. 마음을 비우면 그곳에서 시원한 바람이 인다던 은사 스님의 말씀이 생각난다. 모두가 무더위에 지칠 때도 스님은 좌복 위에서 단정하고 편안한 자세로 앉아 계셨다. 덥지 않으시냐는 나의 질문에 스님은 다만 몸이 청량할 뿐이라고 하셨다. 더위를 묻는 내게 청량함을 내보이는 스승의 답은 마치 동산 화상의 답을 닮아 있었다. 여름 무더위 속을 한 줄기 시원한 바람처럼 흘러가는 그의 마음자리가 내게는 여전히 전설로 남아 있다.

고 조태일 시인은 ‘여름날’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여름을 노래했다. ‘햇살, 눈 시리도록 쏟아진다. 초목들, 질세라 몸 비틀어 진초록 한껏 뿜는다. 창문을 열어라. 찌든 마음도 열어라….’ 눈부신 햇살 아래 온몸을 뒤틀어 초록을 뿜어내는 초목들. 우리의 마음도 한껏 열면 초록이 쏟아져 내릴 것만 같다. 찌든 마음을 활짝 열자. 마음을 열고 더위 속으로 기꺼이 들어가자. 마음을 열면 그 무엇도 다 친구가 된다. 더위라고 예외일 수 없다. 그래서 여름의 즐거움을 마음껏 만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