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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의 사과 편지 / 이브 엔슬러 지음 / 김은령 옮김 / 심심
‘버자이너 모놀로그’의 작가, 세상 떠난 아버지 입장서 지난날 되돌아봐
독특한 시점의 ‘르포르타주’… 허구·진실 뒤섞여 예술적 가치 높여
저자 “폭력 휘두른 남성들이라면… 이 책이 진실한 성찰로 이끌 수 있기를”
매정한 아빠는 꽃다운 소녀를 툭하면 방에 가뒀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고, 제풀에 지쳐 잠들 무렵이 돼서야 방문을 열어줬다. 소란을 피운 어린 딸을 바로잡기 위한 훈육치고는 너무 가혹했다. 아빠의 이상한 가학 취미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소녀가 다섯 살이 되자 아빠는 어두운 밤마다 소녀의 침실로 향했다. 소녀의 엄마도, 친오빠도 은밀한 곳에서 이뤄지는 폭력을 어찌하지 못했다. 방조하거나 혹은 묵인했다. 소녀의 심장에 웅크리고 있던 천사 같은 영혼은 부모의 탈을 쓴 악마를 만나 갈가리 찢겼다.
미국 극작가 이브 엔슬러가 쓴 ‘아버지의 사과 편지’는 참혹하고 고통스러운 르포르타주다. 시인이자 사회운동가이기도 한 엔슬러는 여성의 성(性)을 과감하게 다룬 연극 ‘버자이너 모놀로그’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인물이다.
성폭력 피해자인 저자는 한참 늦었으나 이제라도 가해자의 진심 어린 사과를 받고 싶었다. 하지만 심판대에 서야 할 가해자는 이미 31년 전에 세상을 떠났다. 이를 어쩌나. 보통 사람이라면 고개를 떨구고 체념할 수밖에 없는 순간, 작가는 다른 방식을 떠올렸다. 가해자, 그러니까 아버지의 목소리를 빌려 끔찍했던 지난날을 복기하며 피해자인 자신을 향해 편지를 쓰는 것이다.
예술 작품에선 때로 내용이 아닌 형식이 많은 것을 결정짓는다. 형식이 내용 자체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이 책이 그렇다. 독특한 형식적 변주 없이 저자가 1인칭 시점으로 피해 사실을 고발했다면 평범한 논픽션에 그쳤을지 모른다. 인간이 인간을 성적으로 학대하는 끔찍한 일에서 어떤 예술적 가치를 발견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딸이 아버지의 마음속으로 들어가면서, 책은 ‘참회록’과 ‘기록문학’ 사이 어디쯤에서 희귀한 독창성을 얻었다. 기본적으로 딸이 아버지의 생각을 헤아려 쓴 글이므로 모든 문장이 100% 진실일 수는 없다. 저자가 수십 년 전에 겪은 일을 바로 어제 일처럼 생생히 기억한다 해도 다른 사람의 마음을 속속들이 꿰뚫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 책은 허구와 진실이 뒤섞이는 지점에서 새로운 문학의 가능성을 열어간다. 학술서적이 아니라 르포르타주이기에, 저자가 화자의 마음을 온전히 알지 못한다는 한계는 흠결이 아니라 오히려 특별한 장점이 된다. ‘상상 속에서라면 경계를 넘어 꿈을 꿀 수 있고, 이야기의 깊이를 더해 현실과 다른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저자의 말은 그래서 정확하다.
이 책에는 저자가 1인칭 시점으로 과거를 폭로했다면 결코 담기지 못했을 단락들이 행간을 메운다. 아버지의 어린 시절을 다룬 대목이 대표적이다. 아마도 저자가 실제로 들은 일화와 머리로 상상한 그림을 더해 재구성했을 법한 아버지의 유년기는 어둡고 외로웠다. 아버지의 부모는 아들에게 어떤 사랑과 관심도 주지 않았다. 부모에게 아들은 오직 남 보기에 번듯하게 키워야 할 ‘프로젝트’일 뿐이었다.
아버지가 다섯 살 소년이었을 때 이런 일이 있었다. 나무에서 떨어진 불쌍한 참새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데 엄마가 고함치며 달려왔다. “뭐하는 짓이니? 그 더러운 새를 얼른 내려놔라. 정말 구역질 나는구나.” 가냘픈 아들의 몸을 세차게 흔들어 새를 떨어뜨린 순간 소년의 마음속에 있던 ‘공감의 밸브’가 닫혔다. 그리고 소년은 ‘언젠가 악마와도 같은 에너지에 사로잡혀 폭력적인 범죄를 저지르게 될 것’이라고 예감했다. 이것은 악마의 구차한 ‘변명’인가. 아니면 아버지의 ‘핑계’인가.
하지만 이건 실제 아버지가 쓴 이야기가 아니지 않은가. 그렇다면 연극에서 구원의 희망을 발견하기 전까지 술과 담배와 섹스에 찌들어 삶을 낭비했던 딸이 뒤늦게 힘겨운 방식으로 아버지의 마음을 들여다보고자 노력한 이야기로 볼 수도 있지 않겠는가.
이 책을 출간한 후 저자는 이름을 ‘브이(V)’로 바꿨다고 한다. 승리(Victory)를 뜻하는 V는 폭력으로부터 여성을 보호하기 위한 사회운동 ‘V-데이’에서 따온 철자다. 소녀 시절 천사를 떠나보내고 일생을 가슴에 푸른 멍이 든 채로 살아온 저자가 “딸아, 미안하다”는 ‘아버지의 사과 편지’를 받고서야 비로소 지난 세월과 결별하고 ‘승리’라는 희망의 단어를 입에 올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안도의 한숨이 나오지만, 저자가 ‘감사의 말’에 써놓은 소망까지 실제로 이뤄진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겠다. ‘여성에게 상처를 입혀온 남성들에게도, 이 책이 깊고 진실한 성찰로 당신을 이끌기를. 돌아보고, 사과하기를. 마침내 우리가 변화해 이 폭력을 끝낼 수 있기를.’ 208쪽, 1만5000원.
나윤석 기자 nagija@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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