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종의 시화기행>언어로 빚은 자연속 빛·색…그의 詩, 그림·음악이 되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김병종, ‘생명의노래-어락’, 43x32㎝, 종이에 먹과채색 , 2018.

■ (85) 더블린, 슬라이고와 시인 예이츠

아일랜드·영국 두 얼굴의 시인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이기에
남다른 고뇌·근심 많은 삶 살아

아일랜드 자연서 스스로 치유
대자연 신비·영성 체험이 詩로
시인에게 조국은 축복의 땅

1923년 노벨문학상 수상 영예
엘리엇 “영어로 쓴 최대 시인”

무수옹(無愁翁), 즉 걱정없는 노인 이야기가 있다. 무슨 일을 당해도 걱정하는 법이 없었다. 걱정 많은 왕이 노인을 불러 상으로 귀한 옥구슬을 줬다.

하지만 돌아오는 길에 뱃사공의 간청으로 옥구슬을 꺼내 보여주다가 그만 강에 빠뜨리고 말았다. 1년 후 왕은 그 노인을 다시 초대했고, 전에 상으로 내린 옥구슬을 지참하라고 하명했다. 온 가족의 근심이 깊었지만 노인은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오히려 위로했다. 그리고 무슨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지만 이미 일어난 일과 앞으로 일어날지 어떨지 모를 일을 놓고 후회나 근심하지 않는 평소 모습 그대로였다. 내일이면 궁으로 들어가는 날, 며느리는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시아버지를 위해 정성껏 저녁상을 차렸다. 큼지막한 생선도 한 마리 올렸는데 젓가락질을 하려던 노인의 눈에 생선 배에 반짝이는 무언가가 보였다. 자세히 보니 1년 전 물에 빠뜨렸던 왕의 하사품이었다. 노인은 그 구슬을 꺼내 들고 다음 날 왕 앞으로 갔고, 왕은 칭송했다(사실은 왕이 사공을 시켜 구슬을 일부러 빠뜨려 놓고, 과연 그가 그런 상황에서도 걱정하지 않는지 시험했던 것이란다).

삶의 석양을 향해 걸어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무수옹으로 살고 싶지 않으랴. 돌아보면 우리 삶의 허다한 부분들이 후회와 근심, 헛된 희망 같은 것으로 갉아먹혀 버렸다는 걸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일랜드에 와 그 푸르스름한 이끼의 대자연과 시간 속으로 들어가면서 잠시나마 무수옹이 돼가는 것을 느낀다. 자연은 기쁨의 초록빛, 붉은빛을 발하고 있었고 그 속의 삶은 안온해 보인다. 도시는 도시로되 전에 느껴보지 못한 근심 없는 은은한 기쁨 같은 것이 흐르는 것을 느끼게 된다.

시인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휘트먼의 시들과 함께 나는 그의 시를 가끔 소리 내 읽어본다. 서양 민요 가락이라고나 할까. 한결같이 소리가 들리고 빛이 있다. 무수옹의 기록 같은 그의 시들은 아일랜드의 신화와 민요와 숲의 영감 같은 것으로 가득 차 있다. 물론 자신을 “레오 아프리카누스”라고 칭하며 어떤 혼령과의 접점을 고백하는 등 지나치게 물신적, 이교도적 성향으로 기울 때도 있지만 그의 시는 대자연의 신비와 영성과 그 체험의 고백 같은 것으로 가득 차 있다. 무엇보다 한 올의 근심도, 우수도 없다. 근심은 현실에 갇혀 있을 때 강고해진다. 현실의 감옥을 벗어나 초월적 세계로 걸어 들어가면 더 이상 근심은 힘을 쓰지 못한다. 그렇다고 그의 조국 아일랜드가 초월적 세계는 아니었다. 그 땅이야말로 근심 많은 곳이었다. 하지만 눈을 대자연으로 돌릴 때 근심도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 같다. 예수께서도 먹을 것과 입을 것으로 걱정 많은 인생들을 향해 “공중을 나는 새를 보라, 들의 백합화를 보라”고 시선의 전환을 주문했다. 예이츠의 시는 역시 일종의 시선 전환을 권한다. 숲을 보라, 그 숲에 흐르는 창조의 영성과 생명의 정수를 보라. 빨리 나는 새와 날렵한 사슴들과 죽음의 두려움마저 빨아들이는 장엄한 낙조를 보라. 저 속에 무슨 근심이 있고 헛된 야망이 있으며 아물지 못한 상처가 있겠는가. 아기의 웃음소리 같은 기쁨으로 가득 차 있지 않은가.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김병종 화가, 서울대 명예교수, 가천대 석좌교수

그런가? 실제로 시인의 삶 속에서도 무수옹으로 살만큼 기쁨으로 출렁거렸던가. 사실은 그 반대에 가까웠다. 그는 남다른 고뇌와 근심의 삶을 산 사람이었다. 우선 삶의 스펙트럼이 너무도 크고 넓어 고단했다. 아일랜드인과 영국인의 두 얼굴로 살았다. 그만큼 걱정과 근심도 많았을 것이다. 결코 조용히 둘러앉아 자연예찬이나 하며 시를 쓸 입장이 아니었다. 시인이기 전에 독립운동가였고 정치인이었으며 그만큼 고뇌도 깊었을 것이다. T S 엘리엇은 예이츠를 향해 “영어로 쓴 최대의 시인”이라고 한 다음 다시 올려서 “시인 가운데 최대의 시인”이라고 격찬했고 1923년 노벨 문학상을 받음으로써 그 문명(文名)에 정점을 찍었다. 하지만 그는 실상 반평생을 아일랜드 독립 문제로 근심의 나날을 보냈다. 영국에 대한 그의 모호한 태도로 아일랜드 독립 열혈분자들에게는 자주 공격을 받았고 그의 문학적 발판이 돼줬던 영국으로부터는 비난을 당하기 일쑤였다. 그 모든 고뇌의 시간을 그는 아일랜드의 대자연 속으로 들어가 스스로 치유하고 정화시켜 갔다. 그러면서 마치 재가승처럼 자연의 청정한 빛을 마음의 나라에 초청하기로 한 것 같다. 그리고 시(詩) 속에서만은 무수옹으로 살기로 작정했던 것 같다.

아일랜드의 자연은 확실히 저 법정스님이 썼던 말처럼 “영혼의 모음(母音)”같은 울림이 있다. 창조의 본래 모습 같은 청정함과 신비함이 있다. 세상의 근심·걱정을 바람에 날아가는 안개처럼 흩어버리는 힘이 있다. 시인은 바로 그 자연 속에 흐르는 빛과 색을 언어로 잡아 올렸던 것이다.

그래서 예이츠의 시는 그림이 되고 음악이 되는 것이리라. 그런 면에서 근심 많은 조국 아일랜드가 시인에게는 축복의 땅이었던 셈이다.

화가, 서울대 명예교수, 가천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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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슬라이고(Sligo), 예이츠 문학의 고향

호수 ‘이니스프리’ 품은 항구도시… 동상·박물관 등 곳곳 시인의 흔적

“나 일어나 이제 가리/이니스프리로 가리”.

“거기 외가지 엮어 진흙 이겨 바른 작은 오두막을 짓고 아홉이랑 콩밭과 꿀벌통 하나/ 벌 윙윙대는 숲속에 나 혼자 살으리…”.

주로 더블린, 런던, 파리 같은 대도시를 오가며 살았지만 시인 예이츠는 슬라이고를 늘 마음속에 시적 고향으로 생각했다.

더블린 태생이었지만 그는 유년시절 외가가 있던 슬라이고에서 보냈던 추억을 평생 소중히 간직했다. 여류시인 캐서린 타이넌(Katharine Tynan·1859∼1931)에게 쓴 편지에 “내 생애 가장 큰 영향을 준 곳이 있다면 그건 슬라이고”라고 할 정도였다.

“밤이나 낮이나/ 호숫가에 철썩이는 낮은 물결 소리 듣나니…/ 내 마음 깊은 곳까지 들려오는 그 물소리…”.

더블린에서 자동차로 두 시간 반 남짓 북서방향을 향해 가다 보면 닿게 되는 슬라이고는 그래서 예이츠 문학의 생태적 고향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시에 나오는 이니스프리(Innisfree) 잔잔한 호수(사진)를 지닌 고즈넉한 항구도시인 슬라이고는 기이한 암석 산인 벤불빈(Benbulbin)이 랜드마크처럼 서 있다. 시내 곳곳에서 예이츠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데, 시(詩)의 옷을 입고 있는 동상이 있고 카운티 박물관 안의 예이츠관에서는 각종 문헌과 사진 등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