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생각하며>권진규의 아틀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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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희덕 시인,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권진규 탄생 100주년 기념전
영원성을 담은 작품세계 조명

수행자의 태도로 창작에 정진
‘입산’ ‘수행’ ‘피안’의 구성

그가 살았던 성북구의 집에는
‘노실의 천사’가 앉아 있는 듯

‘세상과 역사는 돌이킬 수 없는 어떤 흐름에 휘말린 듯하다.’ 시인 장 주네가 쓴 ‘자코메티의 아틀리에’의 첫 문장이다. 다음 문장은 이렇게 이어진다. ‘언제나 조야(粗野)한 목적을 위해 눈에 드러나는 모습만을 바꾸려는, 걷잡을 수 없이 나날이 증폭되기만 하는 이러한 흐름에 사로잡힌 세상과 역사를 보고 있으면, 누구든 공포까지는 아닐망정 슬픔 같은 걸 느낄 것이다.’ 요즘 세상 돌아가는 모습에 대한 나의 착잡한 심경을 너무도 정확하게 대변해주는 구절이다. 이 부박한 세태 속에서 예술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예술가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장르를 넘어 두 예술가의 각별한 우정으로 탄생한 이 책에서 장 주네는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기교가 아니라 작품이 불러일으키는 감정에 대해 쓰려고 했다. 주네는 자코메티를 향해 당신의 조각상을 집에 갖고 있으려면 상당한 용기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자코메티가 왜 그러냐고 묻자, “당신 작품을 들여놓으면 방안이 사원(寺院)처럼 돼버릴 것 같다”고 대답한다. 그 대화를 적어 넣으며, 주네는 자코메티라는 사람이 자기 아틀리에와 마찬가지로 온통 잿빛을 띠고 있었다고 표현한다.

스탠리 투치 감독의 영화 ‘파이널 포트레이트’에서 보았던, 석고 먼지들로 뒤덮인 자코메티의 아틀리에가 문득 떠오른다. 그 비좁은 잿빛 공간에서 자코메티는 ‘다른 우주’를 꿈꾸고 ‘다른 인간’의 형상을 빚어냈다.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권진규 탄생 100주년 기념 전시 ‘노실의 천사’를 보며, 나는 권진규야말로 ‘한국의 자코메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그의 작품세계 전모를 이렇게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는 전시는 이번이 처음이다. 그의 예술적 생애를 구도(求道)의 과정으로 이해하고, 시기별로 나누어 ‘입산’ ‘수행’ ‘피안’으로 구성한 것도 적절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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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가로서 그의 일상은 실제로 수행자와 다를 바 없었다. 권진규는 1959년 일본에서 돌아온 후에 아틀리에를 손수 지었고, 외출도 하지 않고 규칙적인 생활을 하며 새벽 6시부터 밤 10시까지 작업했다고 한다.

동서양의 고대 미술을 탐구하며 원시성과 영원성을 현대 조각 속에 구현해내려고 했던 그의 작품에서는 구도적 정신이 강하게 느껴진다. 또한, 긴 세월을 견디는 테라코타 작업이나, 조각의 무게를 덜어내면서 새로운 질감을 만들어낸 건칠(乾漆) 기법 등에 몰두했던 것도 그의 장인적 태도를 잘 보여준다.

‘노실의 천사’에서 ‘노실(爐室)’이란 가마가 있는 아틀리에를 뜻한다. 유족의 회고가 담긴 영상을 보니, 좁고 허름한 아틀리에 한쪽에 벽돌로 만든 작은 가마가 보였다. 화가의 작업실과 달리 조각가의 작업실에는 가마가 필요하겠구나 싶었다. ‘노실의 천사’라는 전시 제목은 그가 남긴 시에서 따온 것이다. ‘예술적 산보-노실의 천사를 작업하며 읊는 봄, 봄’이라는 시에서 권진규는 ‘진흙을 씌워서 나의 노실에 화장(火葬)하면 그 어느 것은 / 회개승화하여 천사처럼 나타나는 실존을 어루만진다’고 썼다. 그는 자신의 작업을 진흙에 묻혀 있는 영혼들에게 불로 장례를 치러주는 제의적 과정으로 인식했음을 알 수 있다.

전시장에는 그가 진흙 속에서 발견해낸 천사들이 가득했다. 말, 고양이, 양 등의 동물상들과 자화상을 비롯해 다양한 인물상들이 있고 예수나 부처, 수행자들도 있었다. 군상은 거의 없고 스케일이 크지는 않지만, 매우 침착하고 응집된 힘을 지닌 그 형상들은 고독한 단독자로서 각자의 우주를 거느리고 있는 듯했다. 안타깝게도 권진규의 꿈은 좌절되고 그는 가마를 부수고 작업실에서 스스로 세상을 마감했다.

그러나 권진규의 조카이자 ‘권진규’의 저자인 허경회는 그의 작품에서 겨울을 견디는 참나무의 벌거벗은 힘, ‘나력(裸力)’을 본다. 마치 박완서가 ‘나목’이라는 소설에서 박수근의 어두운 그림 속 나무들이 ‘고목(枯木)’이 아니라 ‘나목(裸木)’이라는 것을 읽어냈던 것처럼.

박수근과 권진규가 살았던 현실은 겨울과도 같이 혹독했지만, 그 “벌거벗은 몸통과 가지에 돋아있는 힘”은 지금까지 살아 있다. 그 나력을 살려내려는 유족들의 사랑과 신뢰가 있었기에 권진규가 남긴 작품들이 이렇게 부활할 수 있었을 것이다.

영상 속 아틀리에의 공간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특히 천장 가까이 일렬로 난 작은 창문들이 눈에 들어왔다. 허경회의 설명에 따르면, 그 창문들이 크지 않고 위로 나 있어서 빛이 절제된 상태로 들어올 수 있었다고 한다. 너무 밝지도 어둡지도 않게 빛을 조절하는 기능은 작업실의 중요한 조건 중 하나였을 것이다.

작업실의 창문은 작품을 비추는 빛의 조절뿐 아니라 작가의 마음이 무엇을 지향했는지를 말해주는 듯했다. 그 작고 높은 창문들은 속된 세상을 내다보지 않고 영원을 향했던 그의 구도적 시선과 닮았다. 당대에 작가로서 성공을 거두어 경제적으로 넉넉해졌다 해도 그는 이 작은 작업실을 고수했을 것이라는 설명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권진규가 살았던 서울 성북구 동선동 집과 아틀리에는 현재 내셔널트러스트 문화유산기금에 기탁되어 기념관으로 쓰이고 있다고 한다. 전시 시간 동안 아틀리에 역시 주말에는 개방된다고 하니, 이번 주말에는 그곳에 다녀오려 한다. 노실의 천사가 왠지 그 아틀리에 마루에 아직 앉아 있을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