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징검다리’ 건너 … 이윽고 ‘단순한 기쁨’을 찾았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쓰고 싶은 게 없을 때는 쓸 수 없다”면서 오랫동안 단편소설을 쓰지 않았던 김연수 작가가 최근 소설집을 발표했다. 자료사진

■ 이토록 평범한 미래│김연수 지음│문학동네

김연수, 9년 만에 소설집 출간

동반 자살 대학생의 시간여행
치매 아버지 살해한 독신 여성

말·글을 통한 자신의 완성부터
타인에 대한 이해 등 풀어나가
“세상의 경이로움 이제는 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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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는 자신이 이미 겪은 일이기 때문에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데, 미래는 가능성으로만 존재할 뿐이라 조금도 상상할 수 없다는 것. 그런 생각에 인간의 비극이 깃들지요.”(‘이토록 평범한 미래’) “인간의 실존은 앞뒤가 맞지 않는 비논리적인 이야기예요. 그럼에도 저는 그중에서 가장 좋은 생각들만 선택해 왔습니다.”(‘진주의 결말’)

육체의 시간은 유한하지만, 정신의 시간은 무한하다. 인간에겐 이해와 기억, 그리고 이야기가 있으니까. 그리하여, 어쩔 수 없이 우리는 낙관적이고, 기어코 결말에 가 닿는 존재들이다. 소설가 김연수가 오랜만에 펴낸 소설집 ‘이토록 평범한 미래’는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사월의 미, 칠월의 솔’ 이후 9년 만. ‘작가의 말’에서 “쓰고 싶은 게 없을 때는 쓸 수 없다”고, “한동안 괴로운 마음에서 좀체 벗어나지 못했다”며 오랫동안 단편소설을 쓰지 않은 이유를 고백한 김 작가는, 이제 여덟 편의 단편을 풀어놓으며, 그의 말대로 ‘어두운 시간’이 만들어 낸 ‘빛으로 가득 찬 이 몸’을 한껏 드러낸다.

책은 김 작가가 최근 2~3년간 집중적으로 매진한 단편 작업의 결과물이다. 동반 자살을 결심했던 대학생이 시간 여행을 다룬 소설을 접한 뒤 의외의 선택을 하거나(‘이토록 평범한 미래’) 아이를 잃은 엄마가 어둡고 두려운 바다 앞에 서서 200년 전 그 바다를 건넌 역사 속 인물을 떠올리는(‘난주의 바다 앞에서’) 등 김 작가는 이번 신작에서 ‘시간’ 인식에 대한 변화를 보여준다. 그는 내내 ‘시간을 상상해야 한다’고 우리를 설득한다. 표제작 속 ‘외삼촌’이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과거가 아니라 오히려 미래”라고 강조하듯. 이는 ‘마음먹기’나 ‘무한 긍정’과 같은 납작한 말들로는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세계의 끝’에서 발견한, 김연수식 사랑이자, 어렴풋하게 잡히는 희망 한 줌이다.

2022 김승옥문학상 우수상을 받은 ‘진주의 결말’은 치매를 앓는 아버지를 살해하고 집에 불을 지른 삼십 대 후반 독신 여성의 이야기다. 용의자 ‘유진주’가 범죄심리학자인 ‘나’와 팽팽한 해석의 대결을 벌이며, 김 작가 소설 세계의 한 축인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의 가능성과 개인의 선택에 대해 탐색한다. 일어날 일은 일어나고, 결말은 변함없어도, 우리 각자가 건널 ‘징검다리’는 다르기에, 모두 같은 이야기는 아니라고, 따라서 어떤 이야기가 될지는 각자가 선택할 수 있다고.

‘다만 한 사람을 기억하네’는 ‘누군가를 기억하는 것’의 의미에 대해 살핀다. 세월호 사건이 있었던 2014년 겨울에 쓰인 소설은 당시 김 작가가 했을 고민과 어떤 간절함이 함께 느껴지는데, 생판 모르는 누군가의 기억으로 인해 일본에 가서 공연을 하게 된 인디 가수의 일화는 기억을 ‘애쓰는’ 행위가 나의 가까운 곳에서부터 먼 곳, 저 우주에까지 어떻게 연결되는지 아득한 바람과 상상의 세계로 우리를 데려간다. “그렇다면 그 기억은 나에게, 내 인생에, 내가 사는 이 세상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끼칠 수 있을까? 우리가 누군가를 기억하려고 애쓸 때, 이 우주는 조금이라도 바뀔 수 있을까?”

상상으로 가능해지는 미래, 기억의 영향을 받는 우주, 좋은 생각들만 선택하는 결말…. 이는 다시 ‘이야기’로 연결된다. 언젠가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사라진 그때에, 오롯이 남게 되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 말이다. ‘다시, 2100년의 바르바라에게’ 속 화자가 할아버지로부터 듣는 이야기는, 이 소설집의 절정이자, 모든 소설이 수렴하는 지점이다. “모든 것을 직접 체험하면서 이 우주를 인식하기에는 육신의 삶이 너무나 짧기 때문에 인간은 말과 글을 통해 서로 협조함으로써 자신을 완성해 나갈 시간을 단축해야만 한다는 할아버지의 말에 나는 백퍼센트 동의했다. 덕분에 책은 우리의 나이 차이를 뛰어넘는 징검다리가 되어주었다.”

김 작가는 소설이라는 형식을 빌려,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아름답고 서정적인 방식으로 사랑과 인생의 ‘잠언’들을 쏟아낸다. 그는 “고통과 불만족을 겪어내면 이윽고 단순한 기쁨이 찾아온다”고, “세상에는 경이로움이 있다는 사실”을 이제 확신할 수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 시간을 지나 찾아온 그의 소설을 읽는다는 건, 그 자체로 ‘경이’인 셈이다. 또한, 이윽고 우리에게 찾아온 ‘단순한 기쁨’이다. 276쪽, 1만4000원.

박동미 기자 pdm@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