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남편은 밥벌레” … 가부장제 맞선 여성의 ‘공적 외침’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조선 시대 풍속화 ‘여인이 밤에 책 보는 것’의 일부. 독일인 헤르만 산더의 소장품이다. 국립민속박물관 제공

영조~순종 때 官에 올린 상언
10건 중 1건은 여성들이 제기
“버림받은 딸 재혼조차 못하나”

계몽시기엔 주체적 여성 진화
“나라의 흥함, 여자교육에 있다”

17~20세기초 ‘女 목소리’조명

■ 격정의 문장들

김경미 지음 | 푸른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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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됨이 모자라고, 행동이 경솔하고 무례하며 가난한 선비를 능멸하고 … 소견이 어둡고 생각이 막혀 있으니 밥부대일 뿐…시골에 보내 10년간 성현의 글만 읽게 했으면 좋겠다.”

19세기 후반 기생 출신 초월이 첩이 된 후 남편의 잘못을 조목조목 지적한 글의 일부다. 남존여비 사상과 유교 규범이 확고하던 시대, 남편을 ‘밥벌레(밥부대)’라 칭한 기개가 예사롭지 않다. 초월은 남편뿐만 아니라 당시 정치, 경제, 관료, 사회 전반에 걸친 적폐까지 신랄하게 비판한다. ‘격정의 문장들’의 저자는 초월이 당시 사회제도의 폐단을 명확히 인지하고, 해결책까지 제시하는 통찰과 혜안에 감탄하는데, 무엇보다 이 글이 일기나 소설이 아닌, 임금에게 올리는 ‘상소문’의 형식을 띠고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관인이나 유생이 아니면 쓸 수 없었던 상소문의 화자가 여성이라는 것은, 조선 시대 이미 여성의 목소리, 즉 여성의 글쓰기와 말하기가 공적으로 발화할 수 있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책은 17~20세기 초까지 공적 공간에서의 여성들의 발언을 좇는다. 그들의 목소리는 초월의 사례처럼 발췌·인용하는 것만으로도 신선한 충격을 주지만, 저자는 이에 그치지 않고, 그 말과 글에 대한 적극적인 해석을 시도한다. 과거를 들여다본다는 건 현재를 새롭게 정의하기 위함인데, 결론부터 말하면 저자는 이 시기 여성들의 말하기와 글쓰기를 한국 페미니즘의 초기 형태로 본다. 이로 인해 지금의 여성운동은 보다 확실하고 풍부한 근거를 획득하게 된다.

저자는 조선 후기와 근대 계몽기로 나눠 여성들의 글을 분석한다. 전자는 상소문을 비롯해 누구나 임금에게 억울한 사정을 알릴 수 있었던 상언(上言), 격쟁(擊錚), 원정(原情) 등을, 후자는 주로 신문의 여성 독자 투고를 다룬다.

1752년(영조 28)부터 1910년(순종 4), 총 4427건의 상원과 격쟁이 접수됐고, 이 중 약 10%에 해당하는 405건을 여성들이 제기했다. 그중 ‘김씨 상언’은 마치 한 편의 드라마다. ‘구운몽’을 쓴 김만중의 딸이자, 경종 때 숙청당했다 복권된 이이명의 아내 ‘광산 김씨’가 쓴 것이다. 그는 집안이 정쟁에 휘말려 멸문 목전에 있을 때, 종의 아이를 죽여 손주의 장례처럼 꾸몄다. 국법을 어겼으나, 조선의 근간인 가부장제와 가문을 지키기 위해서였다고 강조한다. 양반의 특권의식과 순응적 태도가 있으나, 책은 자칫 임금의 덕도 훼손된다는 전략적 글쓰기로 광산 김씨가 사건의 주체로 떠오르게 됐다고 평한다.

딸을 재가시킨 어머니의 항변과 해남 윤씨 집안 종부 이씨가 쓴 ‘규한록’은 원정의 사례다. 어린 나이에 시집간 딸이 남편에게 버림받고 돌아오자 어머니는 딸이 측은해 양반가에 첩으로 보낸다. 그는 “사람들이 천하다고 할 수는 있으나, 재혼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라며 당당하게 딸의 구명을 요청한다. 종부 이씨는 시삼촌과의 갈등에 대해 시어머니에게 하소연하는데, 마치 관에 보내는 원정의 형식을 취했다. 그는 “증 내어(화내어) 불에 넣지 마옵시고 읽어 달라”고 부탁한다. 감정과 사고의 주체로서의 여성을 선명하게 드러내며 ‘여성 주체’가 만들어진 과정이다.

근대 계몽 시기는 이들이 ‘여성주의적 주체’로 변모한 시기다. 신문의 등장이 결정적이었다. 여성들은 독자 투고로 자신들의 존재를 증명하기 시작했다. 특히, ‘집단적’ 여성 주체가 나타나는데, 여성들은 ‘일천만 동포 자매’ ‘부인 사회’ 등으로 서로를 호명하며 연대의식을 고취했다. 가장 절실하게 요구한 건 교육권이었다. 12세 김확실이 쓴 ‘나라의 흥함이 여자교육에 있소’, 남자에게 의존하지 말자던 김송재의 ‘한국 부인계의 새 사상’ 등이 유명하다. 투고에는 다양한 목소리가 쌓였다. 축첩제도를 비판하는 ‘처’들, 여자를 다시 위계화하는 남성들에 대항한 ‘첩’들, 그리고 개가는 개인의 자유라는 과부들의 목소리까지 더해진다.

저자는 이들이 ‘쓰기’로 자신들의 억압 상황을 분명하게 인식했다고 강조한다. 상언은 여성이 주체가 되면서도 그 관심사가 남편과 자식, 그리고 가문에 국한됐으나, 투고에서는 ‘여성’ 그 자체로 옮겨간다. 중요한 것은 이 두 쓰기를 통해 여성 주체의 성장과 확장이 대대적으로 이뤄졌다는 것이다.

상언과 투고는 그 의도나 내용이 흥미롭지만, 책을 읽어내는 일은 만만치 않다. 예컨대, ‘김씨 상언’은 노론과 소론의 대립 등 당시 붕당정치에 대한 배경 지식을 요구한다. 그러나 그들의 문장을 ‘경청’하다 보면, 저자가 보았다는 그것이 종국에 보일 것만 같다. 저자는 이것들이 종이를 뚫고 나올 것만 같다고 했다. 배제됐으나 존재했던 정치의식, 교육에 대한 절실함, 이름을 남기고자 하는 열망. 그리고 그 모든 게 자신들의 것이 아니라는 허탈감과 좌절감까지 말이다. 308쪽, 2만 원.

박동미 기자 pdm@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