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7세 때 호주로 이민을 갔던 조카(왼쪽 두 번째)가 결혼을 해서 호주인 남편과 함께 한국에 왔을 때, 나(맨 오른쪽)와 아내(오른쪽 두 번째)는 조카의 아이가 예뻐서 어쩔 줄 몰라 했다.
■ 사랑합니다 - ‘할아버지’가 된 삼촌의 고백록
2002년 초 드라마 ‘겨울연가’가 방영되는 날 저녁이면 거리가 썰렁했다. 멜로드라마를 외면했던 내가 어떤 연유로 보게 되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겨울연가’ 방영일에는 만사 제쳐 놓고 귀가를 서둘렀다. 게다가 이건 또 무슨 일! 주인공 남녀의 애절한 사연에 가슴을 치다 못해 어느새 눈물이 줄줄 흐르는 게 아닌가.
처음 의아해하던 아내는 나를 놀리는 데 재미를 붙였다. 드라마 방영 시간이 되면 의미심장한 미소를 띤 채 딸아이를 불렀다. “얘야! 아빠 우실 시간 됐다. 큰 수건 갖다 드려라.” 아내의 기대는 어긋나지 않았다. 울지 않으려 마음을 다잡아도 어김없이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드라마에 너무 몰입한 탓일까. 아니면 남들보다 갱년기가 빨리 오면서 여성호르몬이 과다 분출된 것일까.
아무튼 종영과 더불어 언제 그랬냐는 듯 눈물샘이 마르자 아내의 놀림도 사라졌고 실추된 가장의 명예도 조금씩 회복되었다. 그런데 최근 여성호르몬이 다시 분출하기 시작했다. 계기는 조카와의 상봉이었다.
20년 전 암으로 누나가 숨지자 절망한 매형은 일곱 살 조카를 데리고 호주로 이민간 뒤 연락을 끊었다. 여기저기 수소문해 봤지만 누나가 남긴 한 점 혈육인 조카의 행방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다 가까스로 연락이 닿으면서 19년 만에 조카와 해후가 이뤄졌다. 이국땅에서 엄마 없이 성장하느라 얼마나 힘들었을지, 조카에게 새어머니와의 관계를 물었다. “저에게 잘해주는 것은 중요하지 않아요. 아버지께 잘해주는 것이 중요하지요.” 너무 일찍 철든 조카의 대답에 그동안 멈췄던 눈물이 다시 솟았다.
조카가 결혼한다는 소식을 듣고 호주로 달려갔다. 신랑은 직장에서 만난 ‘호 서방’이었다. 친절한 호 서방이 조카를 천지 복덩이처럼 아끼는 것 같아서 안도했다. 호주 사돈네와 간단한 상견례와 결혼식만 참석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웬걸, 예식은 사흘이나 진행됐다.
이왕이면 한국의 전통문화도 보여줘야겠다는 생각으로 30년 전 내 결혼식 때 입었던 한복을 입고 갔다. 나이 든 동양 남자가 새빨간 한복을 입은 것이 신기한지 호주 하객들이 다가와 ‘원더풀’을 외치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주인공 신부를 제쳐 두고 외삼촌이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으니 정말 주책맞은 삼촌이었다. 조카와 호 서방이 아이 셋을 낳겠다고 선언하는 것으로 사흘간의 결혼식은 끝이 났다.
그리고 이달(10월)에 조카와 호 서방이 6개월 된 딸과 함께 한국 여행을 왔다. 아기와 첫인사를 나누면서 ‘이제 꼼짝없이 할아버지가 됐구나’ 실감했다. 눈을 마주치면 웃는 아기를 안아 들자 또 눈물이 터졌다.
얼마 전의 일이 떠올랐다. 재단 건물 2층에 있는 발달재활센터에 온 꼬마와 엘리베이터를 같이 탔을 때였다. 한눈에도 주의가 산만한 다섯 살 정도의 아이였다. 녀석은 처음부터 내 흰머리를 유심히 쳐다보더니 엘리베이터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갑자기 내게 와락 달려들어 “할아버지, 할아버지!” 하고 얼굴을 비비며 절규했다. 이산가족 상봉도 이렇게 애절하진 않았을 것이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나도 당황했지만 함께 탄 사람들은 웃음을 터뜨렸다. 아이 엄마는 얼굴이 새빨개져 아이를 야단치기 시작했다. “너! 갑자기 왜 그래? 할아버지라니 이런 결례가 어딨어?” 나는 얼떨결에 “저, 할아버지 맞습니다. 맞고요. 조금 일찍 결혼했으면 이 녀석만 한 손자가 있을 나이입니다.” 하고 고백했다. 그때는 할아버지가 된다는 게 이렇게 가슴이 뭉클하고 행복한 눈물을 흘릴 수 있다는 것을 몰랐다.
젊은 시절에는 그야말로 일에 파묻혀 살았다. 새벽에 나갔다 한밤중 퇴근하느라 아이와 함께할 시간도 없었고, 일에 치여 아이가 예쁜 줄도 몰랐다. ‘겨울연가’ 주제가가 나오면 수건을 건네주던 딸아이가 이제 결혼할 나이가 됐다. 딸의 아이를 품게 된다면 이 할아버지는 또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릴 것인가.
백경학(푸르메재단 상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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