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엿보기>가짜가 판치는 세상 ‘잔짜’떠야 함께 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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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훈아(41)와 이엉자(38).

그들은 종종 ‘가짜’ 인생 또는 ‘3류’인생으로 불린다. 가수 나훈아와 개그우먼 이영자를 흉내내 밥 벌어 먹고 산 지 벌써 10여년째. 최근 밤무대 3류 밴드의 삶을 그린 한국영화 ‘와이키키 브라더스’에 반짝 출연하기도 한 이들을 10시간동안 동행 인터뷰했다.

1.너훈아

본명 김갑순. 충남 논산 출신. 논산농고 졸업 후 고향에서 축산업을 하다 실패. 88년부터 ‘이훈’이라는 이름으로 밤무대에서 무명가수 생활. 91년 SBS ‘나훈아 모창대회’에서 ‘청춘을 돌려다오’를 불러 인기상 수상. 웨딩숍을 운영하는 아내와 초등학교 3학년, 1학년 아들을 둠. 현재 의정부와 동두천 일대 밤업소 4곳에서 근무. 월수입 800만원 정도.

2.이엉자

본명 정낙송. 충남 예산 출신. 성결대 중퇴. 92년 이미테이션 연예인을 선발하는 SBS ‘내가 진짜 스타’프로에서 개그우먼 ‘이영자’ 모방 연기로 대상 수상. 사업하는 남편과 중학교 1학년 아들, 초등학교 3학년 딸을 둠. 현재 낮에는 아동교육교재 방문 판매사원으로, 밤에는 부평과 김포 밤업소에서 근무. 월수입 500만원 정도.

3.오후 2시 서울 마포구 합정동의 한 다방

가수 나훈아와 똑같은 모양의 선글라스를 쓴 너훈아의 왼손에는 ‘롤렉스’ 금장시계와 1캐럿은 족히 넘어보이는 다이아몬드 반지가 번쩍이고 있었다. “아, 이거 ‘가짜’예요. 일본 오사카(大阪) 공연 갔다가 샀어요.” 검정색 정장 차림에 중절모까지 눌러쓴 이엉자는 2년 전에 구입한 빨간색 아토즈 승용차를 몰고 왔다. “이영자가 살빼기에 성공한 이후, 저도 덩달아 주가가 높아졌어요. ‘오리지널’이 잘돼야 ‘이미테이션’이 잘 된다니까요.”

4.너훈아

그는 90년대 초반 가수 나훈아를 닮기 위해 80만원을 들여 코를 높이는 성형수술을 했다. 여자들이 성적으로 끌린다는 ‘큰 코’를 가지게 됐기 때문일까. 얼마 전에는 밤무대 여자 손님이 ‘2차’를 가자며 1000만원짜리 수표를 제시했지만 거절했다. 지금까지 ‘나훈아’가 되겠다며 앞만 보고 살아온 세월이 10년. 초등학교 3학년인 큰아들은 아직도 “난 ‘너훈아’아빠보다 ‘김갑순’아빠가 좋아”라고 투정부린다. 보람도 있다. ‘진짜’ 나훈아가 바빠서 찾아가지 못하는 외국이나 지방 공연에서 만난 나훈아의 팬들은 ‘가짜’ 나훈아인 너훈아에게도 아낌없는 갈채를 보낸다. 간혹 끝까지 ‘가짜’임을 눈치채지 못하는 팬들에게는 ‘눈속임’을 한 것 같아 죄책감이 들기도 한다.

5.이엉자

‘진짜’ 이영자를 만났을 때 ‘가짜’를 보는 ‘진짜’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이엉자는 이영자가 일하는 밤업소에서 가까운 거리의 밤업소에서 일하고 있다. 그는 이영자가 출연하는 밤업소를 몰래 찾아가 ‘진짜’의 말투와 무대매너를 메모, 암기하고 있다. 처음에는 이영자의 목소리만 닮았는데, 간절히 닮고자 했더니 외모마저 비슷해졌다. 밤무대 무명가수들의 수입은 고작 월 30만∼60만원. 단지 ‘이영자’를 닮았다는 이유로 그들의 10배 가까운 돈을 벌고 있는 것이 감사할 뿐이다. “가짜라 재수없다”며 술안주를 던지는 손님들의 행동은 서글프지만 참을 만하다. ‘가짜’도 연예인이라고 가끔씩 마음이 허공에 붕 뜰 때면 가난이 지겨웠던 시절을 떠올리며 “난 정낙송(이엉자의 본명)이야”라고 자기암시를 건다.

6.오후 5시 합정동 숯불갈비집

옆 테이블에서 소주잔을 기울이며 돼지갈비를 먹던 50대 손님이 다가와 “나훈아씨, 이영자씨 아닙니까. 정말 반갑습니다”라며 사인을 부탁했다. 너훈아와 이엉자의 사인은 나훈아와 이영자의 것과 똑같다. 이엉자는 언젠가 이영자가 서울시내 한 식당을 방문해 남긴 사인을 보고 그대로 따라 연습했다고 했다. 이 손님은 이엉자의 등을 두드리며 “다이어트 스캔들 있었어도 실망하지 말고 기운내요”라고 말했다.

7.오후 7시 서울 영등포의 한 카바레

너훈아가 2년 넘게 일했던 서울 영등포의 한 카바레에는 기본 테이블 메뉴에 4만5000원인 술값이 부담스러워 3000원 입장료만 내고 들어온 30~40대 ‘아줌마’들이 춤을 추고 있었다. 양 옆으로 확 퍼지는 짧은 치마를 입은 30대 후반의 여성은 남자가 받쳐주는 손을 붙잡고 20바퀴 넘게 몸을 뱅그르르 돌렸다. 춤출 남자가 부족해 대부분의 아줌마들은 남자의 ‘부름’을 앉아서 기다렸다. 너훈아는 “여기 오는 여자는 외로워요. 애들은 컸지, 집에 있으면 답답하지. 카바레에 와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 정 붙이는 거예요. 직업이 없는 ‘제비족’ 남자가 ‘가짜’ 사장 명함을 내밀어도 그냥 믿고 함께 잠도 자죠. 나만 ‘가짜’인 줄 알았는데, 세상에는 ‘가짜’와 거짓말이 판치고 있어요”라고 말했다.

8.밤 12시 경기도 김포의 한 나이트클럽

이엉자는 이곳에서 월 150만원을 받고 매일 밤 12시부터 20분동안 DJ를 한다. 왁스의 ‘오빠’, 홍경민의 ‘가져가’ 등의 가요가 빵빵 터져 나왔다. 음악이 100평 남짓한 나이트클럽의 담배연기를 휘감아 돌면서 이엉자의 입심이 시작된다. “안녕하세요. XX나이트의 슈퍼모델 ‘엉자’ 인사드리겠습니다. 34-24-34, 허벅지·팔뚝·장딴지 사이즈입니다. 여자 꼬시러 온 분 나오세요. 남자 꼬시러 온 분도요. 오늘 스트레스 받는 분들, 이 곳에서 확 떨쳐 버리세요. 자, 재밌게 리듬에 맞춰 사는 거예요.”

/김선미 기자 kimsunmi@munhw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