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한국무용·사물놀이로 고려인에 정체성 일깨웠죠”

지난 20일 서울 신촌의 연세대 100주년 기념회관에서는 국내의 1급 예인들과 고려인 3, 4세가 참여하는 이색공연이 열렸다. ‘상뜨뻬쩨르부르그(상트페테르부르크) 아리랑.’ 이 공연에서 러시아 한국청소년문화교육센터 고려인 3, 4세 청소년의 ‘아라리 춤’을 지켜보며 남다른 감회에 젖는 이가 있었다. 이 문화센터 대표이자 상트페테르부르크 제151국립학교의 교감인 이나탈리아(55)씨였다.

이씨는 지난 9일 열린 한글날 기념식에서 러시아 최초로 한국어를 정식교과(제2외국어)로 인정받게 한 공로로 국무총리 표창을 받은 고려인 2세. 그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한국문화센터 운영에 참여한 것은 12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나이 40이 넘어 한국어를 배우기 위해 만났던 러시아 선교사 박효원 목사에게서 한국어뿐 아니라 민족의 역사와 문화까지 배우면서였다.

“1937년 스탈린의 소수민족 분리·차별정책에 따라 카자흐스탄에 강제 이주당한 뒤, 한많은 삶을 사셨던 부모님은 저희에게 한국말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이제 한국말은 평생 몰라도 될 말이다. 완전한 러시아 사람이 되라’고 했습니다.”

집이라고는 없는 허허벌판에 내던지다시피 방치된 뒤 땅굴을 판 채 혹한의 중앙아시아 겨울을 넘기고 농사를 지었던 이씨의 부모는 자식들에 대한 교육열이 남달랐다고 했다. 이런 교육열 덕에 그의 오빠는 그 지역 고려인으로는 최초로 레닌그라드 공대에 유학했고, 이씨 또한 대학에서 러시아 문학을 전공, 공무원이 되고 교사가 될 수 있었다. 한국어를 배운 동기도 러시아의 한국 유학생에게 러시아어를 부업으로 가르치다, 한국어를 배우면 더 쉽게 러시아어를 가르칠 수 있겠다는 것으로 단순했다.

그러나 박 목사를 만나 자신의 정체성과 뿌리를 알게 되면서 부업으로 한글 공부를 하는 것에 머물 수 없었다. 특히 이씨는 눈물겨운 이산의 역사를 지닌 고려인 2세였다. 자신이 재직 중인 학교에서 한국어를 정식교과로 인정받게 하려는 길고도 끈질긴 노력이 시작됐다.

“한국어를 학교에서 정식교과로 가르칠 수 있게 하기 위해 상트페테르부르크 교육청과 러시아 교육부를 수없이 들락거렸습니다. 시범교육자료며, 교보재(시청각자료), 커리큘럼 등 온갖 서류를 들고 다니며 러시아 교육 당국을 설득했지요.”

이런 노력 끝에 그는 2002년 제151국립학교를 한국어시범교육학교로 지정 받은 것에 이어, 지난 4월 러시아 전역의 국립학교에서 한국어를 제2외국어로 가르칠 수 있게 하는 것에 성공한다. 학생 7명으로 한국어 교양반을 운영한 지 8년 만이었다. 이런 범상찮은 노력에도 이씨는 국립학교에서 교감을 하는 것은 직업일 뿐, 열정의 대부분은 문화센터에 쏟아붓고 있다고 털어놓는다.

“박 목사와 함께 아파트를 전세내 한글을 가르친 게 시작입니다. 고려인의 뿌리를 알리기 위해 문화와 역사강좌도 열고, 사물놀이, 한지공예, 한국무용도 가르쳤지요. 추석과 설날이면 한국 음식을 만들어 먹으며 한복 입는 법도 연습했습니다.”

문화센터 운영은 쉽지 않았지만 성과는 컸다. 문화센터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알고난 뒤 한국의 명문대로 유학하는 이도 속속 생겨났다. 현재 이곳에서 한글과 한국문화를 배우는 청소년들은 모두 75명 정도. 하지만 어려움도 커지고 있다. 월급을 털어넣고 후원을 받고 강사들이 무보수로 일해도 악명 높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임대료를 감당할 수 없었던 것. 이씨는 지금 자신이 재직 중인 학교에서 저녁시간을 이용해 문화센터를 운영하고 있지만 언제 쫓겨날지 모른다.

“안정되게 문화센터를 운영할 수 있는 공간이 있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그래서 이곳에서 배운 학생들이 상트페테르부르크뿐 아니라, 러시아 전역에 사는 고려인들에게 한국어와 한국문화를 가르칠 수 있었으면 하는 꿈을 꿉니다.” 연락처 7-812-520-4517

김종락기자 jrkim@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