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치의 위기… 석학들에게 답을 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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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유네스코, 21세기의 대화:세계의 지성 49인에게 묻다’라는 부제가 붙어있다. 자크 데리다, 장 보드리야르, 폴 리쾨르, 제레미 리프킨, 에드워드 윌슨 등 내로라 하는 세계 각 분야 석학들에게 ‘가치는 어디로 가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듣고 있다.

책을 엮은 제롬 뱅데는 유네스코 미래전망 사무국장이며, 미래이사회 사무총장이자 로마 클럽 회원이다. 유네스코 미래전망 분과와 철학 및 인문과학 분과는 1997년부터 미래의 중대한 쟁점들을 놓고 ‘21세기 대화 시리즈’를 진행하고 있는데, 이 책은 2001년 9·11 사건 직후 기획된 2차대담에 참가한 석학들의 글을 모은 것이다. 9·11 ‘이전’과 ‘이후’는 ‘새로운 형태의 폭력’이 등장하는, 세계사적으로 큰 분수령이란 점에서 이 책이 묻고 있는 ‘가치’의 미래는 의미가 작지 않다.

책에 등장하는 석학들은 현재 인류가 ‘가치의 위기’에 직면해 있다는 데 동의한다.

“어쩌면 오늘날 너무나 많은 가치가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것은 가치들의 위기라기보다는 가치들이 갖는 의미 자체의 위기이며, 스스로를 통제하는 능력의 위기다. 따라서 시급한 문제는 어떻게 가치들 사이에서 방향을 잡을 것인가이다.(마쓰우라 고이치로, 유네스코사무국장)

가치의 위기는 크게 두 가지 관점에서 제기된다. “가치들에 대한 문제제기는 ‘세계화’와 ‘신기술’이라는 두 가지 중대한 현상이 접합되어 낳는 결과들로 일어난다.”(제롬 뱅데)

세계화의 광풍은 세상을 완전히 ‘새로운 영토’로 만들어버렸다. 이제는 “우리가 윤리 없는 세계로 나아간다는 사실을 의미하는가?”라는 질문까지 등장할 지경이다. “세계적인 것이란 용어와 보편적인 것이란 용어 사이에는 어떤 거짓된 유비가 있다. 보편성은 인권, 자유, 민주주의에 관한 용어다. 세계화는 기술, 시장, 관광, 정보에 관한 용어다. 세계화는 되돌릴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반면, 보편적인 것은 사라지고 있는 중인 듯하다.”(장 보드리야르)

하지만 세계화와 신기술의 접합이 가치의 전도와 불안한 미래만을 예견하게 하는가? 인도출신 인류학자인 아르준 아파두라이는 현재 세계의 위기를 ‘문명의 충돌’이 아니라 ‘세계 체계들의 충돌’이라고 정의하면서, 구체적으로 다국적 기업과 민족국가, 미국, 브레튼우즈 체제에서부터 세계무역기구(WTO), GATT 등 자본을 조정하고 통치하려는 기구 등의 ‘척추동물적 세계’와, 흐름과 네트워크, e메일로 연결되는 다양한 세포적 조직들의 ‘세포적 세계’의 충돌로 본다. 9·11은 그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다. 그는 미래에는 “세포적 네트워크들이 다른 전 세계적 통치권의 형태를 앞지를 것”이라고 전망한다.

자본이 주도하는 세계화는 다른 한편으로 문화들 간의 전례 없는 교류와 소통의 가능성을 포함하고 있으며, 특히 인터넷은 어느 순간이든 온 인류가 서로에 대해 깨어있는 거울이 될 수 있도록 해주면서 새로운 형태의 연대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 책에 나오는 적지 않은 석학들은 거기에서 인류의 희망을 본다.

엄주엽기자 ejyeob@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