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에세이>우리는 지금 제네바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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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석영/駐제네바 대사

스위스 제네바는 ‘작은 거인’이다. 인구 20만의 소도시다. 쥐라산을 배경으로 레만호와 론강을 끼고 있다. 쥐라의 산세는 강릉에서 보는 대관령을 닮았다. 남쪽으로 몽블랑의 자태가 보인다. 초승달 모양의 레만호는 빙하가 깎아낸 거대한 작품이다. 둘레 180㎞에 크기는 여의도 70배에 달한다. 140m나 치솟는 제트분수는 레만호의 상징이다.

제네바는 보수적이면서도 역동적인 이중성을 가지고 있다. 6할은 스위스령이고 4할은 프랑스령인 레만호 때문일까. 스위스의 엄격함과 프랑스의 자유분방한 정신을 고스란히 투영하고 있다. 제네바는 다양한 종교적, 언어적, 민족적 이질감을 엄격한 규율과 분권적 전통으로 극복하면서, 혁신과 개혁을 위해 부단히 투쟁해 온 곳이다.

레만호는 자유와 해방의 역사를 증거하고 있다. 제네바, 로잔과 몽트뢰는 로마의 지배를 거쳐 사보이 공국 등 외세로부터 목숨을 걸고 독립을 쟁취했다. 종교개혁의 선구자인 칼뱅이 몸바쳤던 곳이기도 하다. 종교개혁의 산실인 성피에르 성당의 첨탑이 제네바 구시가지를 굽어본다. 500년 전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열띤 설교를 했던 칼뱅의 자취다. 칼뱅 덕에 스위스 시계산업이 번창했다. 칼뱅이 사치라는 이유로 보석 가공업을 금지시키자 장인들이 시계 조립으로 전업했다고 한다.

제네바의 자유정신은 영국의 방랑시인 바이런에 의해 빛난다. 19세기 초 바이런은 친구 셸리와 제네바에 머물렀다. 어느날 돛단배를 타고 레만호 문학 탐방을 떠났다. 그들의 최종 목적지는 16세기부터 정치범 감옥으로 유명했던 시옹성(城)이었다. 사보이 공국의 지배에 항거하다 6년간 쇠사슬에 묶인 채 옥살이를 했던 ‘보니바르’의 스토리는 비극의 결정체였다. 그의 아버지와 여섯 형제는 모두 참형을 당하거나 전쟁터에서 죽었다. 바이런은 ‘시옹성의 죄수’를 통해 자유를 위한 그들의 용기에 대해 헌시했다.

오늘날 제네바는 국제도시의 거인으로 우뚝 섰다. 이런 역사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앙리 뒤낭이 주창한 국제적십자 운동이 제네바에서 태동한 것도 한몫 했다. 1차 세계대전 후 창설된 국제연맹도 여기서 둥지를 틀었다. 지금은 350여 개의 국제기구가 소재하고 있고, 4만여 명의 외교관이 활동하는 국제도시로 성장했다. 무역·인권·군축·보건·환경 등 다양한 분야에서 연간 2000여 회의 국제회의가 개최된다. 다자외교의 본산으로 총성없는 전쟁터라 할 만하다.

필자는 15년 만에 다시 제네바 근무를 한다. 그간 격상된 대한민국의 위상을 실감하면서 다자외교의 영역을 넓히는 데 진력하고 있다. 우리에게 제네바는 국제협상의 중심이자 동경의 이미지를 투영한다. 우리는 영화 ‘콰이강의 다리’에서 ‘포로의 대우에 관한 제네바 협약’을 근거로 장교의 사역을 거부하던 영국군 장교 니컬슨을 기억한다. 1933년 임시정부 대표로 독립을 호소하기 위해 국제연맹 총회 참석차 방문했던 이승만 박사가 프란체스카 여사를 만났던 건물도 남아 있다. 한국전쟁 후에는 한국 문제를 토의하기 위한 정치회담과 북한 핵 문제를 논의하는 6자회담을 출범시킨 1994년 합의도 제네바에서 이뤄졌다.

제네바는 우리 영화에도 녹아 있다. ‘우리는 지금 제네바로 간다’는 월남전의 상처를 다룬 사회극이다. 정애리와 이영하가 열연한 ‘레만호에 지다’는 5060세대에게 더 친숙하다. 한국 외교관이 한국전쟁중 애인이었던 북측 여성 외교관과 제네바에서 재회하는 드라마였다. ‘마리’로 분한 정애리는 죽음으로 비극적 결말을 맞지만, 사랑과 인간성은 사상과 분단의 벽을 넘는다는 짠한 감동을 남긴다.

국제도시 제네바가 개방과 경쟁력 강화를 통하여 세계화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우리와 지향점이 같다. 우리도 제네바 같은 ‘작은 거인’을 가질 날을 기다려 본다. 제네바에 오면 레만호가 증언하는 역사의 현장을 한번쯤 둘러보기를 권한다.

◆ 최석영(57) ▲서울대 독문과 ▲제13회 외무고시 ▲주제네바 참사관 ▲ 외교부 환경과학과장 ▲주유엔 참사관 ▲ 아태경제협력체(APEC)사무국장 ▲주미 공사 ▲외교부 자유무역협정(FTA) 교섭대표 ▲주제네바 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