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를 처음 역사적으로 연구한 사람은 프랑스 아날학파의 대가인 필리프 아리에스다. ‘아동의 탄생’에서 수많은 사료를 바탕으로 해 그는 17∼18세기 이전에는 어린이를 일종의 ‘작은 어른’으로 취급했다고 주장했다. 근대에 들어서야 어린이에게 ‘양육과 보호가 특별히 필요하다’는 인식이 커지면서 ‘어린이에게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으며, 학교에 보내 교육하고 출산을 조절해 양육에 더 크게 신경을 쓰는 등의 변화가 출현했다는 것이다. 근대와 전근대 사이의 문턱을 강조하는 이러한 입장은 이 책의 번역서가 출간된 후, 국내에도 많은 영향을 주어 지금까지도 관련 연구가 이어지는 중이다.
조지메이슨대 역사학과 교수인 피터 스턴스의 ‘인류는 아이들을 어떻게 대했는가’는 아리에스 이후, 반세기 동안 진행된 어린이 역사 연구의 성과들을 하나로 집약한 책이다. 책은 아리에스의 연구를 비판적으로 계승하면서, 그 시야를 유럽에 가두지 않고 전 세계로 확대한다. 저자에 따르면, 아리에스의 주장은 학계에서는 대부분 철회되었다.
성인이 아닌 존재로 어린이에 대한 관심(사랑)과 성인 만들기로 이어지는 훈육(교육)은 서양 근대에서 특별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인류 역사 대부분의 시대와 장소에 존재’했지만, 그 방법이 항상 서양과 같았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보통교육을 실시하고 어린이를 배움에만 집중하게 했던 서양 근대가 특이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가족이 아니라 국가가 어린이 교육에 책임을 느낀 문명은 이전에는 어느 곳에서도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또한 서양 근대의 방식이 최종인 것도 아니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산업혁명기 공장에서 일하는 어린이(왼쪽 사진)와 스웨덴의 초등학교 교실(오른쪽) 모습. 이 사진들은 어린이에 대한 규정이 노동력을 제공하는 노동자였던 시대와 국민국가가 관리하고 교육하는 학업인 시대를 보여준다. 자료사진
저자에 따르면, 세계 전체에서 어린이에 대한 인식은 세 차례 혁명적 변화를 겪었다. 인류사 대부분을 차지하는 수렵채집 시기에는 어린이들에게 먹일 식량이 부담돼, 전체 출산 기간 ‘아이를 넷 이상 낳는 가족’이 거의 없었다. 영아살해 등 아이들 숫자를 줄이기 위한 갖가지 조치가 취해지고, 인구증가는 더딘 속도로 진행되었다. 아이들은 열 살 무렵에 이미 성인이 되었고, 보통 청년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다.
약 1만 년 전에 시작된 농업은 어린이에 대한 인식을 혁명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어린이는 10대 중반이 되면 가족경제에 완벽한 노동을 제공할 수 있게 되었다. 이에 따라 노동력 확보와 재산 확장이라는 차원에서 어린이의 효용이 높아져 출산율이 빠르게 높아졌다. 노동에 기여하지 못하는 유아기에는 아이들을 애지중지했지만, 일곱 살 무렵에는 가혹한 훈육이 시작되어 가족경제에 복무할 수 있도록 종교와 법률 등을 통해 복종을 가르쳤다. 청년을 설득하는 도구로 쓰려고 재산 관념을 확립했으며, 혈기를 주기적으로 분출할 수 있도록 경기나 축제 등이 기획되었다. 요컨대 농업사회는 어린이 ‘노동’의 가치를 발견하고, 훈육을 통해 청년의 불복종을 억제하는 ‘노동과 복종의 사회’라고 할 수 있다.
근대 산업사회의 출현에 따라 18∼19세기 서양에서부터 어린이에 대한 인식에서 또 다른 혁명적 전회가 일어난다. 가장 큰 변화는 아동의 본분이 노동에서 학업으로 전환된 것이다. 어린이는 부모에게 전적으로 경제적 부담을 지우는 존재가 되어, 아주 적은 아이만을 낳는 핵가족 시대가 나타나고, 위생과 공공보건이 도입됨에 따라 아동사망률이 극적으로 떨어진다. 그리고 이들이 서로 상승작용을 일으키면서 어린이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지자, 드디어 국민국가가 어린이를 직접 관리하는 여러 가지 시스템이 도입되었다. 그 결과 ‘아동기’와 ‘성인기’ 사이가 결정적으로 분리돼 ‘어린이’가 뚜렷하게 인식되었다.
20세기 동안, 산업화가 더욱 더 깊은 수준으로 진행되면서 서유럽에서 나타난 변화는 전 세계로 확산 중이다. 어린이를 보호해야 한다는 인식이 빠르게 퍼지면서 1989년에는 유엔 아동권리협약이 발표되기도 했다. 한편 어린이를 향한 부모의 애정표현이 소비라는 형태로 본격화돼 장난감, 놀이기구, 대중음악 등이 광범위하게 등장한다. ‘어린이의 세기’라고 불릴 만큼 현대사회의 어린이는 보호받지만 비만, 성, 우울, 자살 등으로 이어지는 어린이의 정신적 행복을 둘러싼 여러 문제들이 새롭게 등장했으며, 경제적·사회적 격차로 인한 아동착취 문제도 아직 개선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어린이는 통제와 훈육의 대상에서 사회적으로 독립된 권리를 가진 존재로 변해 왔다. 368쪽, 1만9000원.
장은수 출판평론가·순천향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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