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생각하며>그대 다시 고향에 가지 못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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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호 나남출판·나남수목원 회장

추석에 고향을 찾는 길은
매년 반복되는 고난의 행군

전국이 일일생활권 됐지만
마음속 고향은 더 멀어져

나무 밑에 묻히려는 나에게
선배들이 함께하고 싶다 한다

고향 가는 길은 항상 정직한 길이다. 조상들의 기침 소리가 여전히 울리는 듯하고 태어난 태(胎) 자리가 아직도 선연하기 때문이다. 중추가절(仲秋佳節)의 풍요를 마음으로 나누는 추억을 찾아 민족대이동의 행렬에 가족 전체가 나선다. 도회지의 꿈을 좇아 고향을 탈출한 사람들이 부모님께 작은 성공이라도 보여주는 귀향길이다. 그리고 치열한 경쟁의 틈바구니에서 외롭고 고단한, 상처받은 삶을 고향의 품에서 잠시 위안받고 싶기도 할 것이다. 삼사십 년 전, 추석에 고향 찾는 길은 매년 반복되는 고난의 행군이었다. 귀향 기차표 구입은 하늘의 별 따기였다. 자랑하고픈 마이카로도 스무 시간이 걸린 기억이 새롭다. 거대한 주차장이 된 고속도로 아스팔트 위나 발 디딜 틈 없는 휴게소에서 소식이 끊겼던 아는 사람들과의 우연한 만남은 다반사였다. 조금 빨리 가겠다고 경기·충청의 낯선 샛길을 찾는 달 밝은 밤의 국토순례로 낯모르는 이들의 고향 땅을 먼저 스치기도 했다.

집 뒤의 감나무 꼭대기에 남은 빨간 연시(軟枾)는 까치밥이기 이전에, 아들에게 주려고 남겨놓은 아버지의 마음을 달큼하게 보여준다. 무엇하러 먼 길을 힘들게 왔느냐는 아버지의 반가움을 감추지 못하는 반어법은 손자를 덥석 안는 혈육의 정에 묻힌다. 가끔 세상과의 불화로 강퍅해진 나는 무뚝뚝한 아버지의 환한 웃음 하나로 자신을 얻는다. 고향을 찾는 마음은 도회지의 욕망을 잠시 내려놓는 성찰의 시간이다. 고향에서는 마음의 눈으로 아름다운 영혼인 자신을 되찾는 그런 시간이어야 한다.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는 120여 년 전의 한가윗날로부터 시작한다. ‘까치들이 울타리 안 감나무에 와서 아침 인사를 하기도 전에, 무색옷에 댕기꼬리를 늘인 아이들은 송편을 입에 물고 마을 길을 쏘다니며 기뻐서 날뛴다. 어른들은 해가 중천에서 좀 기울어질 무렵이라야, 차례를 치러야 했고 성묘를 해야 했고 이웃끼리 음식을 나누다 보면 한나절은 넘는다. 이때부터 타작 마당에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하고 들뜨기 시작한다. 빠른 장단의 꽹과리 소리, 느린 장단의 둔중한 여음으로 울려 퍼지는 징소리….’ 이제는 사라진, 경련처럼 이는 그리운 풍경이다.

정지용의 시 ‘향수’는 90여 년 전 일제강점기인 1927년에 발표된 작품이다. 휘문고보를 마치고 유학한 일본 교토(京都) 도시샤(同志社)대학 영문과 졸업 전이다. 가난한 집안의 일본 유학생에게 고향은 아름답고 평화로운 안식을 줄 수 있는 공간이어야 했을 것이다. 1988년 서울올림픽 무렵 해금작가가 된 정지용의 시에 대중가요 작곡가 김희갑이 곡을 붙였다. 가수 이동원과 성악가 박인수가 이 노래를 불렀다. 그 시절 박인수는 클래식의 품위를 떨어뜨렸다고 국립오페라단에서 제명당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이 노래는 고향을 그리워하는 많은 사람의 마음에 공명을 울려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하는 고향의 노래로 ‘그리운 금강산’과 함께 제자리를 잡았다.

정지용이 그리는 고향은 ‘옛이야기 지줄대는’ 농촌 풍경으로, 그곳에서는 ‘얼룩빼기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울고, 농사일에 지친 밤이면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개를 돋아 고이’신다. 가난에 찌든 고향은 가을 추수가 끝나면 ‘어린 누이와/ 사철 발 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고단한 삶의 현장이다. 고향에서 힘든 농사일에 찌든 꿈 많은 어린 누이와, 남편을 유학 보낸 아내에게 부끄럽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으리라. 당장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어디에도 없는 무기력함에 짓눌렸을 것이다. 고향에 남은 사람들이 넥타이를 맨 출향 인사에게 거는 기대치는 항상 높기 때문이다.

가난한 고향을 떠날 기회를 박탈당한 소외감의 보상심리도 숨어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위안을 얻고자 고향을 찾은 천재 시인은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란 하늘빛이 그립어/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초롬 휘적시던’ 낭만의 공간으로만 고향을 기억하고 싶은 것이다. 이 시에 등장하지 않은 어머니는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거리던’ 고향 그 자체의 그리움일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고향’이란 시에서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라고 한숨을 내쉰다. 자신의 성장에 걸맞게 아름답게 변해 포근히 안길 수 있는 그런 고향은 없다. ‘어린 시절에 불던 풀피리 소리 아니 나고/ 메마른 입술에 쓰디쓰다’할 수밖에 없다. ‘그리던 하늘만이 높푸’를 뿐이다.

할아버지 산소에 성묘하러 아버지의 뒤를 따라가던 그 길을 이제는 내가 훌쩍 커 버린 아들을 앞세우고 아버지 산소를 찾아간다. 그렇게 3대가 순서를 지키며 그 길을 순환할 것이다. 전국이 일일생활권이 될 만큼 교통이 편해졌으나, 많은 사람이 떠나버린 마음속의 고향을 찾는 길은 더 멀어졌다. 아버지가 그러하셨듯이 이제는 내가 손주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다. 10년 넘게 20만 평의 아름다운 숲 수목원 조성에 몰두하는 것은 사랑하던 아버지의 나이를 넘어 더 살면서 또 다른 고향을 스스로 만들고 싶어서인지도 모른다. 이제는 선배들이 포천 수목원에 정성 들여 키우는 3000그루의 반송(盤松)들을 탐내기 시작한다. 나무처럼 살다가 나무 밑에 묻히려는 나에게 당신들도 함께하고 싶다고 한다. 대자연 속에 수목장(樹木葬)을 하겠다고 채근한다. 이번 추석에는 내 나무를 마음속에 정하는 일보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이곳에 모실 나무부터 정해야겠다는 생각이 앞선다. 토머스 울프의 장편소설 제목만을 빌려 말한다면 이제는 ‘그대 다시 고향에 가지 못하리’라고 해야 하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