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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명작의 공간 게재 일자 : 2019년 02월 15일(金)
女간첩과의 사랑·도심 ‘실탄’ 총격신…상투적 분단영화 틀 깨뜨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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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쉬리’ 촬영지인 서울 여의도 KBS별관 옆길. 이곳에서 남과 북의 실제 군사작전 같은 총격전이 촬영됐다. 당시 주변 아파트 주민들이 총소리에 놀라 밖으로 뛰어나왔을 정도로 총격음이 요란했다. 김호웅 기자 diverkim@

- (147) 영화 ‘쉬리’ 촬영지 서울 여의도

美서 빌린 실제 소총 사용한
南-北, 거리 총격전 장면 압권
연인이 남파간첩임을 알게된
첩보요원의 애증도 긴장 더해

첫 南北 정상회담 1년전 개봉
사회적 변화에 순풍 탄듯 인기
KBS별관 주변 車·步道 통제
국정원·국방부 등 전폭 지원

국군의 날 사열하던 5·16광장
산책로 담은 시민공원 탈바꿈
총성 놀라 주민들 뛰쳐나왔던
영화속 네거리 20년전 그대로


혁명(革命)은 광장(廣場)이다. 모든 혁명은 광장에서 시작돼서 광장으로 끝난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혁명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사람들을 모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른바 ‘피플파워’를 분출시킬 공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광장은 혁명의 열기를 응집시키고 또 확산시킨다. 러시아의 ‘붉은 광장’, 중국의 ‘톈안먼(天安門) 광장’이 있는 것도 다 그런 이유다. 쿠바에서도 가장 중요한 곳 중 하나가 아바나에 있는 ‘혁명광장’이다. 최인훈 작가도 그래서, 한국의 격변기인 6·25전쟁 이야기를 그리면서 ‘광장’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한국에서의 광장은 지금은 많은 사람이 그 이름을 잊었지만 바로 ‘5·16 광장’, 현재의 여의도다. 쿠데타도 시대에 따라서 혁명이 됐다가 반혁명으로 바뀌기도 한다. 어쨌든 종종 혁명 소리를 듣기는 한다. 5·16 군사정변을 일으킨 박정희는 여의도를 자신의 혁명기지뻘로 삼았다. 그는 이곳에서 늘 군대 사열을 했다. 1979년 그가 김재규에게 저격당하기 직전까지 5·16광장에서는 10월 1일이면 늘 국군의 날 행사가 대대적으로 열렸다. 당시에는 서울의 남녀 고등학교 학생들까지 선발해 광장에 집합시켜서는 사열을 받았는데 학생들 모두 지금은 사라진 교련복과 심지어 각반까지 하고 M1 모의소총을 어깨총 자세로 든 채 수 시간을 버텨야 했다. 1970년대의 10월은 아직 여름의 열기가 채 가시지 않은 때라 광장의 아스팔트 열기가 극심할 만큼 대단해서 일부 어린 학생을 일사병으로 픽픽 쓰러지게 만들기도 했다. 지금은 고즈넉한 산책로와 함께 서울시민의 대표적인 휴식처가 된 여의도 공원의 현대사가 결코 그리 녹록(碌碌)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사극 판타지 멜로영화 ‘은행나무 침대’로 이른바 ‘뉴 코리안 시네마’ 시대를 연 강제규 감독이 1999년에 내놓은 ‘쉬리’는 한마디로 문화적 충격이었다. 그때까지 나왔던 한국영화 가운데 이렇게까지 사실에 가까울 만큼 총격 액션 신을 보여준 작품이 없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사람들이 놀랐던 것은 서울 시내, 그것도 여의도라는 대표적 중심가에 북한 특수부대가 출몰해 남한의 기동대, 첩보요원들과 일대 총격 난사전을 벌인다는 설정이었다. 한국, 특히 서울에서는 1968년 1월 21일 김신조로 대표되는 북한 무장 테러단의 청와대 기습사건(1·21 사건)과 1974년 8월 15일 소위 문세광 사건(자생적 공산주의자였던 조총련계 문세광이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열린 제29회 광복절 기념식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을 3·8구경 권총으로 암살하려 했던 사건. 이 총격으로 당시 영부인이었던 육영수 여사가 사망했다. 이 사건은 박정희 정권의 철권통치가 시작되는 신호탄이기도 했다) 이후 북한군의 총격을 듣는다는 것 자체가 금기시됐었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남한에서 개발한 첨단무기 CTX를 탈취하기 위해 남하해 테러를 획책하는 북한 최정예 특수부대 8군단의 교관 박무영(최민식)을 저지하려는 한국 비밀 첩보기관 OT의 요원 중원(한석규)과 장길(송강호)의 활약이 주 내용이다. 여기에 중원과 명현(김윤진)의 러브라인이 교차되는데 알고 보니 이 여인이 결국 박무영이 길러 낸 최정예 저격수 이방희였음이 드러나게 된다는 이야기다.

남한에 오랜 기간(영화에서는 약 15년간) 암약하고 있는 고정간첩이 존재한다는 점, 그것도 지고지순한 스타일의 여성으로서 존재해 왔다는 점이야말로 무차별 총격 신과 함께 이 영화가 만들어 낸 최고조의 긴장감 중 하나였다. 게다가 남한에 침투한 박무영의 흔들리지 않는 남한 적화(赤化)에 대한 신념 역시 그 이전에 나왔던 다분히 상투적인 반공(反共)영화와는 궤를 달리하는 것이어서 충격과 화제를 낳기에 충분했다.

이 영화가 나왔을 때는 한국사회가 잠깐 ‘열렸다 닫혔던’ 시기였다. 김대중 정부 시절이었고,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2000년 6월)이 열리기 한 해 전이었다. 북한에 대해 일종의 ‘열린 사고’가 가능하거나 혹은 그렇게 요구되던 때였지만 아직은 그것이 수면하에서 작동하던 때였다. 강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정치·사회적 공기(空氣)를 감각적으로 미리 맡아 낸 셈이다. 영화는 사회보다 늘 한발 앞서 시대의 흐름을 읽어 낸다. ‘쉬리’야말로 그런 영화의 대표 격이었음을 보여 준다.

이 영화의 여의도 총격 신은 지금 봐도 아슬아슬하다. 유탄이 날아들면서 공중전화가 박살 나고 여의도 일대가 쑥대밭이 된다. 이 영화에 등장한 총기는 M16과 K1소총 등 당시로서는 가장 현대화된 장비여서 실감을 더했다. 하지만 이를 위해 영화 제작진은 미국의 전문 총기업체인 깁슨사로부터 실제 총기를 대여하느라 어려움을 겪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깁슨사는 한국에서 영화를 찍기 위해 총기를 빌려 간 전례가 한 번도 없다며 고액의 보증금을 요구했는데 그 액수가 제작비의 10분의 1에 해당할 정도였다. 이 영화는 순제작비 24억 원의 예산으로 만들어졌으며 전국 대도시 기준 620만 명의 관객을 모으는 어마어마한 성공을 거뒀다. 당시는 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이 갖추어지기 전이었기 때문에 총 관객수 집계가 지방 소도시나 재개봉 수치까지 이뤄지지 않았던 터라 지금 기준으로 봤을 때는 1000만 명이 훌쩍 넘는 흥행이었던 셈이다.

스턴트 액션 역시 그전과는 사뭇 다르게 진행됐다. 연기자들 모두 사전에 군사훈련을 철저히 받아야 했는데 이는 명현 역의 김윤진까지도 실제 총기를 다뤄야 했기 때문이다. 아니 김윤진은 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는데 G3-SG1류의 정교한 저격용 라이플을 다루는 캐릭터였다.

가장 치열한 총격 신은 지금의 여의도증권가와 원효대교, 여의교 사이에 있는 KBS별관 주변에서 펼쳐졌다. 당시에는 보기 드물게 차도와 보도를 대부분 통제한 상태에서 낮 촬영으로 진행됐다. 한편으로는 이 영화가 국가정보원과 국방부, 관련 행정기관의 지원을 톡톡히 받았음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특히 KBS별관 우측 골목 내 사거리에서 벌어진 총격 신 촬영 때는 근처 아파트 주민들이 소리에 놀라 밖으로 뛰쳐나왔을 정도다. 1980년 전두환이 이끌던 계엄사가 일으킨 12·12 쿠데타를 경험했던 사람들로서는 또 한 번 실제 군사 작전이 벌어진 것으로 착각했을 법하다. 게다가 국회의사당이 코앞이다. 그만큼 영화 촬영 당시의 현장 총격 음이 극도로 요란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강 감독은 총격 장면의 사실감과 사운드가 이 영화의 리얼리티를 살리는 핵심적 요소라고 생각했다. 그의 판단이 적중했음은 이후 영화의 흥행 과정에서 입증됐다. 깁슨사에서 가져온 모든 총기에는 탄두를 제거한 실탄이 사용됐으며 발사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탄피에 발사용 화약 3분의 1이 채워진 상태에서 격발하게끔 했다. 영화를 보면서 실제 총기가 발사되는 느낌을 받게 되는 건 그 때문이다.

이 영화의 총격 신은 역설적으로 기묘한 추억의 회상을 불러일으킨다. 지금 봐도 실감이 철철 흐르는 군사적 긴장감 때문만은 아니다. 우리가 언제 이런 영화를 만든 적이 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들며 이 작품 이후 20년간 한국영화가 얼마나 진화해왔는가를 곱씹게 만든다. 그건 아마도 남북관계의 지난한 과정 때문일 것일 수 있겠다. 영화는 종종 시대를 앞서 열지만 오히려 그런 세상은 자주 영화가 나아 갈 길에 장막을 친다. 사회는 그렇게 열렸다, 닫혔다를 반복하는 것이다. 여의도 한복판에 서서 오래전 이곳에서 촬영된 ‘쉬리’를 생각할 때마다 지난 20년의 한국 현대사가 새롭게 다가서는 건 실로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다.

오동진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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