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종의 시화기행>파리 뒷골목 거장의 화실… 글을 색으로 그려내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문학과 역사, 서사, 낭만적 상상력을 아우르고 즐기며 작품을 했던 들라크루아의 대표작 중 하나인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을 패러디했다. (김병종, 풍만한 여신, 종이에 파스텔, 30×41㎝,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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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파리 들라크루아 미술관

‘낭만파 거장’ 들라크루아
화실 겸 자택으로 쓰던 곳
작업실·도서관 함께 있어

문학-미술 중간지대 서서
5000여 작품에 서사 담아
빛과 색채에 文香이 자욱

고흐, 고갱, 세잔, 드가…라는 인상파로 가기 위해 우리는 들라크루아라는 빛과 색채의 다리 하나를 건너야 한다. 낭만주의의 거목 외젠 들라크루아, 루브르를 떠받치고 있는 거장 중 하나인 들라크루아 하면 누구라도 먼저 떠오르는 그림이 있다. 화면 정중앙에 한 손으로 붉은 깃발을 들고 민중을 이끄는, 우리로 하면 유관순 열사쯤 되는, 그러나 풍만한 가슴을 반쯤이나 드러낸 육감적 자유의 여신(1830)이다.

가슴을 훤히 드러낸 여인이 치마에 감긴 둔부와 하체의 미묘한 곡선을 여실히 드러내며 혁명군을 진두지휘하는 난센스 같은 그림. 여인은 뒤따르는 남자들을 사선으로 내리깔고 보며 그 몸체 또한 웬만한 남자들이 곁에 오기도 어려울 만큼 우람하고 풍만하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들라크루아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그래서 발표 당시에는 물론이고 후세의 비평가와 화가들에게도 두고두고 빈축과 논란의 대상이 됐던 작품이다. 위대한 민중혁명을 비틀고 희화화시켜버렸다, 누드를 그리다가 중간에 혁명으로 바꾸었다, 옷매무새마저 제대로 갖춰 입지 않은 무례한 맨발의 기층 여인이 ‘남성과 주류층 사회를 사정없이 밟아버렸다’는 비난이 우박처럼 쏟아졌다. 한 정신과 의사는 그 그림 속에 혁명에 대한 비전보다는 부권적 모성에 대한 소년적 갈망이 숨어 있다고도 한 바 있다.

그런 모든 논란과 시비를 예상해서였을까. 화가는 희랍시대도 아닌데 난데없이 여인에게 ‘여신’이라는 칭호를 부여해 빠져나간다. 어쨌거나 누구라도 그 앞에 서면 혁명이 피 한 방울 없이 이토록 우아한 형체와 아름다운 색채들로 연출될 수도 있구나 싶었을 것이다.

그가 생전 화실 겸 자택으로 썼던 집은 생 제르망 데 프레 성당과 가까운 한적한 주택가에 있다. 그의 자취와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는, 마치 고가구를 그렇게 보관하듯 세월을 보자기로 덮어놓은 듯한 집이다. 오래된 귀족의 저택 같은, 그러나 그리 크지는 않은 상당한 규모의 본채와 구름다리로 건너는 별채, 그리고 그 별채 뒤의 200여 평쯤 돼 보이는 후원이다. 그 정원에는 키 큰 나무 세 그루와 화가가 내려와서 쉬었음 직한 벤치, 그리고 장미가 가득한 작은 화단이 있다. 어쩐지 화가의 집이기보다는 그 단아한 품새가 느껴지는 문인이나 피아노 소리가 들려오는 음악가의 집 같다는 느낌이 든다.

그는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이 집에서 5000여 점을 헤아리는 작품을 남겼다고 한다. 드로잉과 자필 원고 등의 양 또한 엄청나다는데 그 많은 작품과 스케치, 원고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싶게 그의 이름이 붙은 미술관에는 전시된 작품 수가 그리 많지 않다.

그런데도 그의 그림에는 한결같이 서사(書辭)가 있고, 시나 소설을 읽는 것 같은 스토리가 있다. 분명히 하나의 장면을 그리고 있는데 마치 정지된 화면처럼 보이지 않는 이야기들이 거기에 숨어 있다. 흥미로운 일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그림으로 글을 쓰는 화가’라고 불렀을 것이다. 또 하나의 특징은 현실의 한 단면을 그리면서 동시에 그 현실 너머의 꿈 꾸는 듯한 세계를 바라보고 있다는 점. 그는 사실 종교적 주제의 작품을 많이 그려서 실제 그가 생활했던 시기보다 훨씬 더 먼 시대의 작가로 느껴지는 경우가 많다.

미술사에서는 긴가민가 아득하게 멀었던 그 이름, 들라크루아가 이 집에 와서야 비로소 어제 떠난 사람처럼 생생하다. 관람객으로 붐비는 피카소 미술관에 비해 그의 집은 한산하다 못해 적막한 느낌까지 들 정도다. 그래서 그 고요한 정적의 느낌이 작품 분위기를 훨씬 더 맑고 잔잔하게 전해준다.

미술관에 작업실과 함께 도서관을 거느린 거의 유일한 작가. 읽고 그리는 노동이 세끼 밥 먹는 것 같았던 작가. 현실과 이상 사이에, 문학과 미술의 중간지대에 서 있었던 그는, 그러나 자신이 낭만주의 화가로 분류되는 것을 끔찍이 싫어했다고 한다. 낭만주의란 현실을 떠나 구름 위에 있는 것과 같이 몽롱한 상태라고 느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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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자신이 얼마나 철저하게 현실에 기초해 사생했는가를 사람들이 잘 몰라준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자신을 어물쩍 낭만이라는 이름으로 띄워버리는 것에 거부감을 느꼈던 것. 아닌 게 아니라 미술관에는 설마 그의 작품인가 싶을 만큼 손과 팔의 근육이며 형태를 정밀하게 묘사한 드로잉이 많이 나오고 개·고양이·호랑이 등을 정밀하게 그린, 동물도감에나 나옴 직한 사실적인 그림들도 보인다.

그만큼 이 아틀리에에서는 생생하게 작가의 손놀림과 호흡까지 전해 받게 된다. 당대 최고의 인기 화가였다는 들라크루아. 그림은 물론 그 박학다식함으로 젊은 작가들의 우상이 됐다는 그는 이 아틀리에를 나가 큰 거리로 가는 순간, 사람들에게 금방 에워싸일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 면에서 그는 홀로였지만 결코 외롭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 예술과 인문의 벨에포크 시대가 눈에 그려진다.

화가·서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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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들라크루아 미술관

직접 쓴 원고부터 드로잉·페인팅까지 그대로

파리 생 제르망 데 프레 뒷골목 주택가에 있는 작고 우아한 미술관에는 생전 문학과 미술 양쪽에 걸쳐서 재능을 보였던 화가 들라크루아가 썼던 육필 원고 및 장서들, 드로잉, 페인팅 등이 잘 분류·정돈돼 있다. 이 집을 무척이나 아끼고 사랑했던 화가는 독신으로 살며 유명을 달리하기까지 이곳을 떠나지 않는다. 화가로는 독특하게도 왕성한 독서력에 방대한 장서를 보유하고 끊임없이 그 작품 속에 문학적 서사를 구현해 냈던 작가의 체취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