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결과 대화’ 사이의 지도자들… 우크라이나 둘러싼 ‘복합 방정식’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 글로벌 포커스

아프간 철군으로 곤욕 바이든
러시아 상대로 ‘메가폰 외교’
강력한 대응방안 세세히 공개

푸틴과 6시간 대화 佛 마크롱
4월 대선앞 ‘유럽 대통령’ 야심

러 가스 의존도 높은 獨 숄츠
동맹국들과 단합된 조치 약속

“푸틴, 미치광이 전략” 분석속
“진짜 미치광이 될수도”전망

지난 1일 우크라이나에선 30명 남짓한 국회의원이 의회 중앙에 모여 미국·영국·캐나다·폴란드·덴마크·체코·에스토니아 등의 국기를 펼쳐 보이는 이례적인 장면이 연출됐다. 소피야 페디나 의원은 깃발들에 둘러싸인 채로 “우크라이나와 함께하는 파트너들에게 감사한다”고 영어로 말했다. 이날 영국 국기인 유니언잭은 무려 2개였다. 영국은 폴란드와 함께 우크라이나가 가장 신뢰하는 것으로 알려진 나라로, 당시 보리스 존슨 총리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대규모 군사·경제적 지원 의사를 밝힌 상태였다. 영국을 비롯한 이들 국가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국경 지대에 병력을 집결시키자 즉각적으로 지원에 나선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 회원국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런데 유럽연합(EU) 순회의장국이기도 한 프랑스와 앙겔라 메르켈 정권 내내 국제 문제의 ‘해결사’ 역할을 자처했던 독일의 국기는 이 자리에 없었다. 공교롭게도 이 장면은 엄연히 유럽 대륙에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대 규모”라 여겨지는 안보 위기가 발생했는데도 러시아와의 협상 과정에서 유럽 주요국들이 배제돼 있다는 지적이 나오던 때와 맞물렸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이즈음부터 우크라이나 사태를 둘러싼 ‘외교의 시간’이 본격화하기 시작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1월 이후 3차례 통화를 거듭하던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아예 러시아 모스크바로 넘어가 그와 직접 대면했고, 러시아산 가스 의존도가 높아 나토의 ‘약한 고리’로 여겨지던 독일의 올라프 숄츠 총리도 미국을 찾아 동맹국들과 “단합된 조치”를 취하겠다고 약속했다. 숄츠 총리 역시 오는 14~15일 우크라이나 키예프와 모스크바를 순차적으로 방문할 예정이다. 이 같은 움직임 속에서 이번 사태의 향방이 결론 나는 ‘결정적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바로 러시아·벨라루스의 합동 군사훈련이 열리는 10일부터 열흘 동안으로, 훈련이 끝나는 20일은 마침 제이크 설리번 미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러시아의 침공 시한으로 제시한, 베이징동계올림픽 폐막일이기도 하다. 양측이 외교적 대타협을 이뤄낼지, 21세기 유럽 대륙에서의 첫 ‘열전(hot war)’으로 뛰어들지가 남은 10일간 주요국 정상들의 입에 달려 있다.

◇메가폰 든 美 바이든 “푸틴이 뭘 할지는 본인밖에 몰라”=외교 정책의 방점을 ‘중국 견제’에 두고 러시아와는 군축 협상 등을 매개로 안정적인 관계를 유지할 생각이었던 조 바이든 대통령은 불안하다. 아프가니스탄 철군 결정으로 입지가 뿌리째 흔들린 그에게 더 이상의 외교 실패는 용납되지 않기 때문이다. 바이든 대통령은 아프간에서 미군 병력을 빼낸 지 반년도 채 되지 않아 (나토군을 지원하는 형식으로) 동유럽에 대한 파병 지시를 내렸고, 러시아에 대한 각종 경제제재 조치를 거론하며 ‘강 대 강’의 대결 의지를 불사하고 있다. 지난 7일 숄츠 총리와의 양자 회담이 끝난 직후 기자회견에서 그는 “그(푸틴)가 뭘 할지 모르겠다. 이건 본인을 제외하면 아무도 모른다”며 이번 사태가 한 치 앞을 예측할 수 없는 상태로 흘러간다는 점을 강조했다.

스페인 일간 엘 파이스는 지난해 말부터 바이든 행정부가 러시아를 상대로 ‘메가폰 외교’를 펼쳐왔다고 봤다. 협상장에선 원론적 입장을 고수하지만, 동시에 푸틴 정권의 계획과 관련해 정보 당국이 입수한 자료들과 이에 대한 미국의 대응 방안을 선제적으로 세세히 공개해 궁극적으로는 러시아의 침공 구상을 무력화시키는 방식이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미 조지타운대 교수이자 브루킹스연구소 선임연구원인 안젤라 스텐트는 “미국은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침공 당시 공개적인 사전 경고를 게을리했던 탓에 이에 대한 대비도 불충분했다고 판단하고 있다”며 “침공이 실행되면 경고했던 대로 대응에 나서면 되고, 공격이 무산되면 러시아의 전략을 노출시켜 이를 좌절시킨 셈이 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국제위기그룹(ICG)의 리처드 고완 유엔 담당 국장은 “러시아의 ‘하이브리드 전쟁’은 허위 정보를 기반으로 혼란을 초래하는 것이 핵심인데, 미국의 다소 과한 ‘투명성’ 전략이 이를 방해했다”면서 이 전략이 “지능적”이었다고 평했다. 그러나 이 같은 메가폰 전략은 단기적으로는 승기를 쥐여줄지는 몰라도 갈등의 핵심을 제거하지 못한 채 군사 대결을 장기화할 수 있다는 점이 리스크로 지적된다.

◇협상가 佛 마크롱 “러시아도 유럽…러시아 안보 보장 없인 유럽 안보도 위태”=미·러 간 군사적 대치의 틈을 타 외교적 타결책의 가능성을 집요하게 파고든 정상도 있었는데, 바로 마크롱 대통령이다. 그는 대러 강경 발언들을 쏟아내며 미국과 발을 맞춘 존슨 총리와는 다른 선택을 했다. 사흘 전 크렘린궁을 찾아 배석자 없이 푸틴 대통령과 일대일로 6시간 가까이 대화했고, 현지시간으로 밤 12시가 돼서야 공동 기자회견에 나섰다. 그는 우크라이나 사태 악화 이후 처음으로 푸틴을 만난 최고위급 서방 지도자였다.

회견에서 마크롱은 “러시아도 유럽이며, 러시아의 안보 없이는 유럽의 안보도 없다”며 “유럽을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러시아와 협력하고, ‘유럽의 미래’를 건설할 방법을 찾을 줄 알아야 한다”고 했다. 우크라이나 사태가 기본적으로 ‘유럽의 문제’이며, 유럽 국가 간에는 대화를 통한 해결이 가능하다고 피력한 것이다. 뉴욕타임스(NYT)는 자신과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과의 양자 회담 후 다시 한 번 통화에 응하겠다는 약속까지 푸틴으로부터 얻어낸 마크롱이 “유럽의 핵심 협상 대표”로 떠올랐다고 평가했다. 일련의 행보는 오는 4월 대선을 앞두고 명실상부한 ‘유럽의 대통령’이 되고자 하는 그의 정치적 야심과도 연결돼 있다.

◇사태 해결 키 쥔 푸틴, 미치광이 전략 썼나…“합동훈련 끝나면 병력 철수”설=마크롱 대통령의 ‘셔틀외교’는 일견 효과가 있었다. 양자 회담 직후 달러 대비 루블화 가치가 지난 1월 13일 이후 최고치로 뛰며 긴장 완화에 대한 시장의 기대가 입증됐다. 마크롱은 곧장 키예프로 넘어가 “사태가 더 악화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단언했고, 푸틴 대통령이 그에게 우크라이나 국경 지역에서 새로운 군사작전을 수행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는 언론 보도까지 나왔다.

파이낸셜타임스(FT) 등은 익명의 프랑스 관료들을 인용해 푸틴이 “벨라루스와의 합동훈련이 끝난 후 이달 중으로 3만 명의 군 병력을 철수하겠다”는 내용을 마크롱과 합의했다고 전했다. 냉전의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러시아를 포함해 역내 모든 국가의 안보를 담보하는 새로운 ‘집단안보체제’를 구축할 때가 됐다는 마크롱의 구상에 푸틴이 공감을 표했다는 설명도 더해졌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푸틴이 미치광이(madman)처럼 행동하며 협상력을 높이고 있다는 서방 지도자들의 ‘믿음’에서 기인하며, 그가 이성을 잃고 실제 미치광이로 변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시각도 존재한다. FT 칼럼니스트 기드온 라흐만은 “집권 장기화, 팬데믹 등으로 점점 더 고립되고 있는 푸틴은 위험할 정도로 적은 수의 민족주의자들로부터 자문을 받고 있다”면서 그가 최근 발표한 역사 관련 장문의 에세이들이 이를 뒷받침한다고 주장했다. 러시아에서도 “결국 (우리와의) 협상 당사자는 미국”이라고 밝혀, 유럽의 중재가 결정적 역할을 하진 못할 것이란 비관적 전망도 나온다.

장서우 기자 suwu@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