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일본을 반성하고 갈 길을 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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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文明). 이 단어만큼 근대를 대변하는 상징어도 없을 것이다. 동아시아에서 근대는 서구문명의 유입과 더불어 시작됐다. 이 지역에서 가장 먼저 서구문명을 받아들인 일본은 ‘시빌라이제이션 (Civilization)’을 문명으로 번역했다. 이어 일본을 통해 한반도와 중국에도 근대문명의 물결이 밀어닥쳤다. 책은, 일본 근대 여명기에 대표적인 계몽사상가로 활약한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1835~1901)의 명저 ‘문명론의 개략’을 오늘의 시각으로 재해석하고 있다. 후쿠자와는 이른바 메이지(明治) 계몽사상의 체현자였으며, 근대 형성기의 일본 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 게이오대를 창설, 근대사회가 요구하는 학문과 학생을 길러냈으며 ‘문명론의 개략’과 더불어 ‘학문의 권유’라는 저서로 근대 일본의 지식인 사회에 방향타 역할을 했다.

지금으로부터 132년 전에 나온 ‘문명론의 개략’은 일본에선 고전으로 꼽힌다. 하지만 21세기가 시작된 지도 벌써 7년이 지난 오늘날, 저자는 왜 ‘문명론의 개략’을 다시 읽는다고 나선 것일까. 그것도 ‘정밀하게’ 읽는다고 스스로 내세우기까지 하면서 말이다. 이에 대해 저자는 “현재의 일본을 다시 보기 위해서, 우리의 과제를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밝히고 있다.

다시 말해 “근대 일본 여명기에 후쿠자와가 지극히 급진적으로 제시한 일본의 진로를, 우리는 진정으로 다시 물어왔는가”라고 저자는 묻고 있는 것이다. 이같은 질문은 1945년의 경험(패전)을 딛고, 다시금 정상국가들(Summit)의 일원이 된 일본이 여전히 종전과 같은 진로를 밟고 있는 것이 아닌가는 반성과 맞닿아 있다.

저자는 “19세기 후반에 후쿠자와가 냉정한 시각으로 아시아 입장에서의 ‘외국 교제’를 논했던 세계를, 역사가들은 지금 글로벌리제이션(Globalization)과 패권국가(覇權國家)라는 용어로써 논의하고 있다”며 “그것은 21세기 현재 직면하고 있는 문제를 이전 시대 옆에 놓으면서 역사인식을 재구성하려는 것”이라고 말한다.

말하자면 19세기의 근대 일본과 대비하면서 현재의 새로운 문제와 앞으로의 진로를 다시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20세기 근대 일본이 걸었던 길에 대한 총체적 반성과도 맞물려 있다.

그렇다면 후쿠자와는 ‘문명론의 개략’에서 무엇을 주장했던가. ‘일본의 문명화는 서양의 근대문명을 목적으로 해야 한다’고 그는 주장했다. 즉 서양 선진문명국을 모델로 한 문명화, 곧 근대화를 부르짖었다. 그것은 한마디로 ‘탈아입구(脫亞入歐·아시아에서 벗어나 유럽에 들어서자는 것)’라는 국가전략으로 요약된다.

후쿠자와는 또한 문명과 야만을 선명하게 대비시켰다. 문명 지향국인 일본에 정체된 전제국가 지나(支那·중국)를 대비시켜 문명과 야만이라는 구분을 지었던 것이다. 따라서 야만에서 벗어나 문명을 향하는 것, 곧 정체된 아시아 국가에서 벗어나 개명된 유럽사회에 들어서는 것이야말로 당대의 목표였다.

후쿠자와는 또한 천황제 국가인 일본의 앞날을 내다본듯 ‘인민(人民)의 지력의 충실’과 ‘인민의 자립’을 주창했다. 이는 곧 인민을 신민(臣民)으로 변질시키려고 하는 데 대한 격렬한 사상투쟁의 전개이기도 했다. 하지만 일본 근대사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후쿠자와의 ‘인민 자립적 민권’ 입장은 국가 지상의 국가주의에 파묻히고 말았다.

한편으로, 후쿠자와는 ‘일국 독립적 민권’을 강조했다. 이는 곧 서양의 근대 주권국가 형성 방식에 일본이 적극적으로 동참한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후쿠자와가 종국에는 “일국의 인심을 흥기시켜 전체를 감동시킬 수 있는 방편은 외국과의 전쟁만한 것이 없다”라는 결론에 다다른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일본이 ‘상업’과 ‘전쟁’이라는 두 가지 방법으로 이웃 아시아 국가들을 대하게 된 것은 바로 그 직후였다.

저자는 “후쿠자와 문명론이 가진, 인민 자립과 억압에 대한 배제를 지향했던 급진주의야말로 현재 우리가 계승해야 할 것”이라면서도 “후쿠자와 문명론에서 인민적 입장을 규정하고 있는 ‘국권’과 ‘민권’이라는 대항관계 자체를 급진적으로 재차 묻지 않을 수 없다”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후쿠자와의 일국 독립적 민권에 대해 저자는 “21세기의 인민 자립은 아시아 인민의 공생(共生)을 향한 자립이 아니면 안될 것”이라고 반박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저자는 ‘탈근대(또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입장에서 ‘문명론의 개략’을 재해석하고 있다. 근대를 넘어선 자리에서 일본 근대사와 사상사를 거시적으로 되돌아보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을 한국인의 입장에서 다시한번 ‘정밀하게’ 읽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근대 일본의 사상이 어떻게 성립됐으며, 그 배경은 무엇인지, 우리가 긍정할 수 있는 지점과 극복해야 할 한계는 무엇인지를 엄밀하게 따져물어야 하는 것이다. 이는 일본을 통해 근대문명을 받아들인 한국인에겐 끝내 마쳐야 하는 숙제와도 같지 않을까.

김영번기자 zerokim@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