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생각하며>이 세상 어딘가에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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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택 시인

김수영 詩는 지식의 논밭 갈아
씨 뿌리고 싹 틔우는 ‘농사일’

평생 정원사로 살다 간 하우게
그를 통해 삶·죽음의 안심 얻어

백석·이용악 시집 지금도 탐독
살아 있는 생명들의 숨결 느껴

나의 서재는 마을이다. 마을에 있는 나무·바위·강물·달·별, 사람들의 노동, 논과 밭, 바람과 하늘과 구름, 벌레들과 기어가는 달팽이와 폴짝폴짝 뛰는 개구리들이 다 책이다. 당숙모의 작은 밭과 동환이 아저씨가 일없이 걸어 다니는 강변 길도 내 책이다. 산이 책이다. 저 앞산만 한 책을 나는 아직 만나지 못했다. 돌이 많은 뒷산으로 달이 진다. 돌 많은 우리 집 뒷산이 내 서재다. 마을에는, 세상으로 나가고 돌아오는 길이 있다. 그 길 끝에 아버지가 지어준 아름다운 집, 내 글이 돌아오는 집 ‘회문재(回文齋)’, 이 집에 내 서재가 있다.

전형적인 농경사회에서 태어나 자라고 살고 있는 나는 오랫동안 김수영의 시를 이해하지 못했다. 땅 위의 농사는 확실하였다. 땅에 씨를 뿌리면 싹이 터 자라나며, 꽃이 피고 열매를 맺고 다시 씨를 땅에 떨어뜨렸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은 확실하여 확인할 수 있고, 사람들은 자연이 만들어준 그 씨앗을 모아 먹고 산다. 땀 흘린 노동은 틀림없이 성과를 낸다. 농사에서 나오는 말은 거짓이 없다. 노동은 지식이 아니고 삶의 현장이다. 김수영은 지식인이다. 지식인은 세상이 자기 논밭이다. ‘어떻게 농사를 지어 틀림없는 성과를 낼까’는 지식인의 운명이다. 나는 오랜 세월 김수영의 산문을 읽고, 그리고 멈추지 않고 그의 시를 읽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시를 이해하게 되었다. 그의 시는 치열하게 지식의 논밭을 갈아 씨를 뿌리고, 싹을 틔워 꽃을 보고 열매를 맺어 가는 지식 ‘농사일 중 한 가지’였다. 산문의 논과 밭에서 자란 곡식들의 꽃들이 그의 시였다.

장욱진의 ‘강가의 아틀리에’는 몇 번을 거쳐 증보판이 나왔다. 그때마다 나는 그의 책을 샀다. 그의 글은 단순하다. 심플하다. 군더더기가 없다. 글을 전문으로 쓰는 지식인의 냄새가 가신 심플한 그의 글은 묘한 매력으로 사람을 가르친다. 단순과 생략의 천진무구함은 오히려 마주 앉은 이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처럼 직접적이고 현실적이다. 장욱진은 멋진 화가다. 그는 많은 거처를 옮겨 다니며 그림을 그렸다. 나는 그의 거처 중 덕소의 화실 밖 강가 풍경을 좋아하였다. 그의 책 ‘강가의 아틀리에’가 거기다.

1980년대, 신군부는 그들의 역사적인 정당성을 얻기 위해 놀랍게도 ‘정의 사회 구현’을 외쳤다. 정의를 짓밟고 역사를 찬탈한 세력이 정의를 부르짖다니, 말문이 막혔다. 그때부터 정치가 사람들의 말문을 막는 얼토당토않은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것’을 어긴 자들이 ‘그것’을 부르짖는, 웃을 수 없는 이 개그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창작과 비평’ ‘문학과 지성’과 ‘뿌리깊은 나무’ 같은 책을 폐간시킨 신군부가 어떻게 이기백의 ‘한국사신론’의 출간을 허가했는지…, 나는 그때 이 책을 보았다. 어느 해 이 책을 어떤 지면에 짧게 소개한 적이 있다. 어느 날 소포가 왔다. 무심코 소포를 뜯다가 발신인을 보았다. 이기백이었다. 긴가민가했다. 이분이 그분인가. 소포 속에는 생전 처음 본 초콜릿이 있었다. 편지가 들어 있었다. 아! 이기백 선생님이었다. 그분이 맞다. 나는 놀랐다. 감동했다. 선생님은 이 초콜릿을 아이들에게 주라고 했다. ‘김용택 선생도 하나 먹으라’는 말이 없어서 아이들이 초콜릿을 먹는 입만 바라보았다. 역사를 엎어 깔아뭉개는 치욕을 뒤집어쓰며 우리는 지금도 산다. 역사가 없는 나라는 물이 없는 강이나 마찬가지다. 역사의 강물에서 발을 빼지 말라. 역사는 살아 있어서 죄를 반드시 단죄한다.

올라브 하우게의 시집 중 ‘어린 나무의 눈을 털어주다’가 있다. 몇 년 전부터 어디 멀리 갈 때면 몇 편 안 되는 이 작고 가벼운 시집을 가지고 간다. 하우게는 노르웨이 시인이다. 몇 년 전 노르웨이를 갔었다. 도서관에서 교민들과 현지 주민들에게 강연을 했다. 대담을 하던 중 하우게가 살았던 노르웨이를 사랑하게 되었다며 이 번역 시집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하우게라는 시인의 시집이 한국에서 많은 독자를 불러모으고 있다고 소개했다. 사람들이 놀랐다. 강연이 끝나고 사람들이 몰려왔다. 하우게는 노르웨이의 작은 마을 과수원에서 정원사로 일하며 평생을 살았다. 나는 이 작은 한 권의 시집 뒤에 실린 다음 글을 아주 좋아한다. 이 짧은 글로 나는 내 삶과 죽음의 안심을 얻었다.

‘하우게는 줄 것이 많은 사람이다. 그렇지만 그는 작은 스푼으로 마치 간호사가 약을 주듯 먹여준다. 그는 옛날 방식으로 죽었다. 어떤 병증도 없었다. 단지 열흘 동안 먹지 않았다. 슬픔과 감사로 가득했던 장례식은 어린 하우게가 세례받았던 계곡 아래 성당에서 있었다. 말이 끄는 수레가 그의 몸을 싣고 산으로 올라갔다. 작은 망아지가 어미 말과 관을 따라 내내 행복하게 뛰어갔다.’ ―로버트 블라이(시인)

백석과 이용악과 박용래와 김소월과 윤동주의 시들을 지금도 읽는다. 이들 시집 중에서 나는 백석과 이용악의 시집을 좋아한다. 겨울밤이 있다. 창밖에 눈이 내리고, 창문을 두드리는 바람 소리가 있다. 높은 겨울 달이 있고, 찬바람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별들도 있다. 방에 누워 시를 읽다가 다시 엎드려 시를 읽는 길고 깊은 밤을 가진 이들이 있다. 살아 있는 생명들의 곁, 이 세상 어딘가에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