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익 “촬영 2개월간 태풍 3번…덕분에 돈 주고 못 살 장면 얻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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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자산어보’ 이준익 감독

CG없이 수묵화 같은 해무 찍어
지금 생각해보니 태풍도 스태프

조선의 근대화 역사 공부하다
유배중 물고기 연구 정약전 떠올라
인문학 중심 성리학 시대에
자연과학 세계관 알린 선구자

“왜 정약전이었나.”

1993년 영화 ‘키드캅’으로 데뷔한 후 28년간 열네 편을 내놓은 영화 장인에게 거추장스러운 워밍업은 필요 없었다. 22일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만난 이준익 감독에게 ‘자산어보’의 정약전을 주목한 이유부터 물었다. 정약전은 실학자 정약용의 형이다. 조선 후기 최고의 지성을 동생으로 둔 까닭에 깊고 빛나는 문재(文才)가 가려졌으나 그도 정약용 못지않은 대학자였다. 정약용이 구도의 길에서 벽에 부닥쳤을 때 제일 먼저 조언을 구했던 멘토이자 벗이었다.

“역사를 공부하다가 과연 조선의 근대화 시점은 어디인지 의문을 갖게 됐다. 흔히 정치나 전쟁으로 근대를 구분하는 것은 오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유럽은 문화에 근거해 르네상스라는 멋진 이름을 붙였고, 일본은 메이지(明治)유신이 있다. 우리는 그게 동학(東學) 같았다. 그럼 왜 동학인가. 앞에 서학(西學·천주교)이 있으니 동학이 나왔을 것이라 생각했고 1801년 신유박해와 황사영 백서사건이 보였다. 16세에 과거에 합격했지만 천주교도로 박해받다가 사형당한 황사영을 주목했다. 그가 숨어 있었다는 충북 제천의 토굴에 가봤고, 황사영으로 논문을 쓴 여진천 신부를 만나 이야기도 나눴다. 그러나 너무 짧게 살다간 황사영으로 두 시간을 채울 수는 없었다. 그때 떠오른 게 정약전이었다. 그가 흑산도에 유배돼 16년간 살다가 생을 마감한 것은 결국 조카사위 황사영 때문이었으니까. 그래서 자산어보를 봤는데 마침 서문에 의문의 인물 창대가 있더라. 창대를 통해 정약전을 선명하게 하고, 정약용까지 뚜렷하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치 윤동주에게 송몽규가 있었듯이…. 그렇게 신안군 도초도, 자은도 등에 머물며 정약전의 생애와 사상을 추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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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크게 정약전의 유배생활을 담은 전반부와 정약전에 의해 학문에 눈뜬 어부 창대의 길을 그린 후반부로 나뉜다. 전반부가 유배생활의 고단함과 외로움 속에서 자연과 물고기에 반해 새로운 지식을 찾아가는 과정을 묘사했다면, 후반부는 정약용의 ‘목민심서’를 교범 삼아 백성을 위하는 관리로 나아가려는 창대의 도전을 현실적이면서도 극적으로 다뤘다. 비록 유배지이지만 낭만이 가득했던 분위기는 부패한 관료들의 폭압과 횡포 속에 처참하고 황폐해진다. 관객들의 호불호가 갈리는 대목이기도 하다.

“전반부의 낭만은 사실 후반부의 불합리를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그러다 보니 전형적인 부패 관리가 등장하는데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조선이 왜 망했는지, 성리학은 어떻게 무너졌는지를 보여줘야 했다. 이는 너무도 자명한 역사적 사실이지만 시나리오가 처음 나왔을 때 모두가 불편해했다. 그러나 역사적 배경을 알면 10배 이상 재미있게 관람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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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산어보’는 ‘동주’(2015)에 이어 이 감독이 흑백필름으로 찍은 두 번째 영화다. 흑백의 대비는 ‘동주’ 때보다 더욱 깊어졌다. 산과 들, 파도가 더욱 회화적이고 입체적으로 다가온다.

“‘동주’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번엔 확신을 가지고 촬영했다. 장면이 회화적으로 보였다는 것은 바로 피사체 자체가 그랬다는 의미다. 도초도에서 바라본 해무는 컴퓨터그래픽(CG) 없이 그대로 하나의 수묵화였다. 2개월여의 촬영 중 태풍을 세 번 만났는데 초가 세트가 날아갈 뻔한 위기가 있었으나 또한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아름다운 그림을 얻었다. 지금 생각하니 태풍도 스태프였다.”

이 감독의 깔끔한 연출은 배우들의 흠잡을 데 없는 연기로 더욱 빛난다. 정약전을 연기한 설경구는 그간의 강렬한 캐릭터에서 힘을 빼고 조선 선비의 풍모를 고스란히 재현했다. 창대 역의 변요한은 엄청난 집중력으로 전라도 사투리를 자유자재로 소화하며 재주 많은 어부 창대를 입체화했다. 정약전을 물심양면으로 돌본 가거댁 역의 이정은도 말할 것 없다. “배우들이 도무지 집에 가질 않았다. 설경구, 변요한은 계속 섬에 머물며 캐릭터의 감정을 유지했다.”

이 감독은 “일부에선 영화가 비관적이라고 하던데 비관론은 아니다. 집단의 비관을 통해 개인의 낙관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할까. 정약전의 자연주의, 실용주의, 탈 국가적 사고를 지향한 건 맞다. 그러나 반국가는 아니며, ‘목민심서’의 길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인문학 중심의 성리학 시대에서 자연과학에 눈 뜨고 다른 세계관을 드러냈던 정약전의 삶을 전하고 싶었다. 하하.” ‘자산어보’는 31일 개봉한다.

김인구 기자 clark@munhwa.com